권천학의 수필방

닫힘공포증

천마리학 2007. 9. 14. 08:19
 
 

                   

                                닫힘공포증

            

                                                                               權     千     鶴


나는 닫혀있는 모든 것들이 두렵다.


'닫힘공포증'이란 말이 있는지 모르겠다. 흔히 들어본 '고소공포증'이라든지 '폐쇄공포증' '모서리공포증', '공간공포증'… 하여튼 공포증을 느끼는 대상도 가지각색이고 그에 대한 이름도 많다. 그런데 나에게는 '닫힘공포증'이 있다. 내가 지어내 붙인 이 이름 자체가 성립이 되는지는 모르지만 귀퉁이나 모서리를 무서워하는 공포증을 '모서리공포증'이라 하고, 텅빈 공간이나 넓은 공간을 무서워하는 증상을 '공간공포증'이라고 하는 걸 보면 맞을 것 같다.

'모서리공포증'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세상에 참 별별 공포증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로 '모서리 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책상모서리, 식탁모서리 등 모서리만 봐도 겁이 난다고 한다. 우리의 생활 주변에 모서리가 얼마나 많은가. 참 불편하겠구나 싶었다. 또 '공간 공포증'은 오래 동안 좁은 장소에서 일해 왔거나 교도소의 좁은 감방에서 구금 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에게 나타난다고 한다.


나는 뚜겅이건 문이건 닫혀 있는 모든 것이 두렵다. 예를 들면 장롱, 이불장의 문이 닫혀 있다든지, 싱크대의 문이 닫혀 있다든지 변기의 뚜껑이 닫혀 있는 것이 싫다. 물론 닫힌 현관문도 두렵다. 심지어 목욕탕의 욕조에 쳐진 샤워용 커튼이 닫혀 있는 것도 싫다. 그래서 장롱이나 이불장의 문을 열어 놓고 지낸다. 물론 변기의 뚜껑도 열어 놓고 지낸다. 그래도 아무 불편이 없다. 오히려 장롱이나 이불장의 문을 열어 놓음으로서 냄새를 없애기도 해서 편리하다고 생각한다. 욕조의 커튼도 물론 활짝 열어 놓는다. 이삼 일 들이로 수영을 하는 나는 수영복과 물안경 등을 널어 놓는 실내용 빨래 건조대를 욕조에 놓고 사용하는데, 가끔 손님이 올 땐 딸아이가 그것을 가리기 위해서 샤워용 커튼을 쳐버린다. 그러면 나는 또 커튼 뒤편이 두려워진다.    

 

 

 

 

 

 


평소에 주로 열어놓는 장롱이나 옷장의 문 그리고 변기뚜껑을 가까운 친구들이나 속내를 잘 아는 사람이 올 때는 상관없지만 어려운 손님들이 올 때만 닫아놓는다. 다만 싱크대의 문은 주로 닫혀있기 마련인데 후라이팬이나 냄비 같은 주방기구를 꺼내기 위해서 문을 열 때 순간적이긴 하지만 약간의 섬뜩함을 느끼고 꺼내거나 넣을 때 나도 모르게 안쪽의 침침한 구석을 살피곤 한다. 


내가 왜, 언제부터 닫힌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되었는지는 나 자신도 모른다. 그냥 무섭다. 무서워서 닫힌 옷장 문을 열려고 할 때 주춤거린다. 안에 혹시 무서운 괴물이 도사리고 있지나 않을까 하고.

또 누군가 도둑처럼 숨어들어 반들반들 눈을 뜨고 있지나 않을까 하고 조마조마, 열고나서도 줄줄이 걸린 옷걸이 사이를 조심스럽게 살피곤 한다. 닫힌 이불장 문을 열 때도 마찬가지다. 이불 켜켜 사이에 뭔가 숨어 있지나 않나, 심지어 내가 가장 징그러워하는 뱀이나 구렁이가 사리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상상까지 할 때도 있다. 변기 뚜껑을 열 때도 여는 순간 그 안에 있던 괴물이 튕겨져 올라오면 어떻게 하나? 핏물이 고여 있지 않을까? 어릴 때 동화에서나 있을법한, 초록색 혹은 보라색 등의 물이 고여 있지나 않을까? 심지어 변기의 관을 통해서 외부로부터 지렁이, 뱀 같은 것들이 집안으로 올라오지나 않을까? 혹은 배수관을 통하여 누군가가 화학물질이나 독약 같은 것을 쏘아 올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까지 한다. 선반 위에 오래 동안 엎어두었던 용기들을 내릴 때도 두근거리고, 솥뚜껑 위에 엎어져있는 바가지도 섬칫하고, 마루 바닥에 떨어져 엎어져 있는 프라스틱 그릇을 주워 들 때도 섬칫하다.


외출에서 돌아와 현관문을 열 때 나는 언제나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열쇠구멍에 키를 꽂으면서 달그락 달그락, 일부러 시간을 끌고 문을 발로 차서 일부러 소리를 내면서 키를 돌린다. 잠금쇠가 열리고나서도 바로 문을 열지 않는다. 두어 번 더 발로 문을 차거나 일부러 기침소리를 내거나 혼자소리처럼 안에 누구 없나요? 하고나서 문을 연다. 안으로 들어서서도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주어 '다녀왔습니다아' 하면서 구두를 벗는다. 신발장 문을 열려면 또 무서워서 주춤거린다. 실수한 것처럼 문고리를 일부러 두어 번 놓쳐가며 부시럭댄다. 내가 그러는 사이에 집안에 혹은 신발장 안에 있던 무엇인가가 사라져 달라는 신호이다.


그런 나에게 한번은 난리가 났다. 추석이 지난 초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새벽잠에서 깨어났을 때 이상하게도 집안 어느 구석에선지 무슨 기척이 느껴졌다. 문갑 뒤편 벽 쪽에서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책장 뒤편 구석에서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문갑 뒤편에서 책장 뒤편으로 옮겨가는 것 같았다. 그 기척은 내가 집안에서 움직이면 조용하다가 TV를 보거나 컴퓨터 앞에 앉아서 열심히 글을 쓰고 있다거나 조용히 책을 읽고 있을 때 어느 구석에선가 느껴졌다. 말하자면 그 기척은 나의 조용한 시간을 갉아먹는 기분이었다.

뭘까? 몹시 궁금하고 불안한 채로 며칠이 지났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화분의 흙이 뒤집혀져있었다. 아하, 쥐로구나. 5층인 내 거처에 그동안 쥐라고는 없었는데 갑자기 어디서 온 걸까? 유추해보니 그 기척은 추석 전날 한 후배시인이 보내온 사과상자를 받은 일이 있었는데 그 이후부터 시작된 듯 했다. 사과상자에 실려 온 과수원 쥐인 모양이었다.


일단 쥐라는 것을 알았으니 두려움증은 가벼워졌지만 이젠 쥐를 잡아야하는데 겁이 많은 나에게는 쥐 잡는 일이 또 엄청난 일이었다. 쥐약을 사다가 고구마와 버무려 놓기도 하고 찐득이를 여기저기 놓아보았지만 허사였다. 쥐는 찐득이 사이를 잘도 피해 다니고 쥐약 버무린 고구마는 건드리지도 않고 그 옆의 신문지만 잘게 잘게 쪼아놓곤 했다.

 

외출을 할 때 현관문을 열어놓았다. 일부러 외출을 하기도 했다. 내가 없는 사이 계단 쪽으로 나가주길 바라서였다. 그렇게 이삼 일을 보냈는데도 한번 숨어 든 쥐는 보이지도 않게  집안의 이 구석 저 구석을 넘나들고 있었다. 영 찜찜한 마음으로 며칠을 보냈지만 도리가 없었다.

 

그 주말이었다. 산에 갔다가 늦은 오후에 집에 들어갔다. 열어놓은 현관문에서부터 조심조심 살피며 들어갔으나 아무런 기색이 없었다. 거실을 거쳐서 막 주방으로 가는데 갑자기 화장실 쪽에서 푸더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잠잠해졌다가 뜸뜸이 나기도 하고, 조용하다가도 거실에서 멈춰진 내가 숨을 죽이며 살그머니 발을 떼면 그 인기척에 응답이라도 하듯 들려왔다. 겁이 덜컥 났다. 닫혀있는 화장실 문을 여는 순간 나는 쥐가 아니면 어쩌나 하는 생각까지 스치면서 얼마나 손이 떨리던지. 등줄기가 꼿꼿해졌다.

 

화장실 문을 열고 보니 다행히 예상한대로 쥐였다. 푸더덕 거리는 모습이 변기에 빠진지 꽤 오래 됐는지 그야말로 물에 빠진 생쥐 꼴에다 어느 정도는 지쳐있는 듯 했다. 소스라쳐 놀라 뛰쳐나와서도 덜덜 떨렸다.

 

어떻게 하나. 정말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발을 동동 구르다가 함께 산행을 하고 조금 전에 집 앞에서 헤어진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멀리 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집으로 가던 친구가 발길을 돌려 우리 집으로 왔고 쥐잡기 공사를 벌였다. 막대기를 대어도 타고 올라올 것 같아서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결국 궁리 끝에 물을 끓여 붓는 방법이었다. 나는 멀리 도망가 있고 친구가 물을 끓여 변기에 부었다. 그리고나서 뚜껑을 닫았다. 한 동안의 시간을 보낸 후 건져내어 다 처지해준 다음에 친구는 돌아갔지만 밤새 잠자리가 편치 않았다.


쥐 사건으로 하여 나의 닫힌 변기에 대한 '닫힘 공포증'은 더해졌다. 열어놨기 때문에 다행히 쥐를 잡을 수 있긴 했으나, 닫아놓은 뚜껑을 열 때마다 복수를 하기 위하여 배관을 타고 올라온 남편쥐 아니면 아내쥐 혹은 아들쥐가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상상 하나가 더 늘었다.


나는 나의 '닫힘 공포증'이 언제 어디서 비롯됐는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치료가 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굳이 치료할 생각도 아예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나는 가끔 나의 '닫힘공포증'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모든 닫힌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내가 원하는 것은 닫힘이 아닌 열림이다. 열림은 곧 소통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원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뿐만이 아니라 사람과 동물 사이의 소통, 사람과 식물 사이의 소통, 사물과의 소통... 소통은 길이다. 끝없이 이어지고 끝없이 퍼져나가는 길. 길은 아름답다.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난 길은 참으로 따뜻하고 아름답다.


별스런 공포증도 있다고 말하는 이도 더러 있지만 그때마다 나는 지긋이 뇌까린다. 모든 사물은 열림과 닫힘이 있고 나는 닫힘 보다는 열림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닫힘공포증'은 생활에서의 닫힘보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닫힘이라고.


<2007년 9월 8일 토론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