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봄에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 파종

천마리학 2006. 3. 27. 13:30
봄에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 파종

  


            權       千       鶴




봄이면 눈이 없어도
눈 뜰 줄 아는 나무처럼
땅심 깊숙이 물관부를 열고
투명한 물길을 여는 나무처럼
초록 잎새 끝까지 밝히는
마음의 눈을 가진 나무처럼
눈 감고 있으면서
속눈 틔우는 나무처럼


실버들 가지 연두 빛으로
몸 트기 시작하는 춘분 때 쯤
환절기의 몸살감기를 앓는
내 삶의 낮과 밤
일교차 심한 봄추위 속에서
어느새 새 촉을 뽑아 올리며
푸릇푸릇 몸을 튼다


                         <춘분>




 

  너무 성급한것일까?
  매운 추위를 보낸 기억이 엊그젠데, 아직도 소매부리에 쌀쌀한 바람끝이 느껴지는데......
 나는 벌써 봄을 예감한다. 아직도 먼산엔 녹지 못한 눈이 그리움처럼 하얗게 쌓여있는데 코끝엔 이미 봄냄새가 스멀거린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얇아지고, 얼어있던 골목에서 바람 탱탱한 공처럼 튀어오르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창문을 흔든다. 창가에 둔 해말리아도 꽃대를 길게 뻗어 올려 창밖을 기웃거리며 나를 부른다.
  창가에 앉으면 길이 보인다.
  그 길은 동네를 벗어나 큰길로 나가고 큰길은 높고 낮은 빌딩들 사이로 몸을 감추었다 들어냈다 하면서 어디론가 내빼고 있다. 그리고는 멀리 보이는 산자락이나 강줄기 사이로 사라져버린다. 그 길로 봄이 곧 우리 앞에 당도할 것이다.
  
  우리가 가는 길도 거기 그 봄길 위에 있다.
  골목길을 걸어서 큰길로 나가고, 큰길을 달려 더 먼 길로 뻗어 뻗어서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우리가 알 수 없는 다른 세상에 이를 것이다.
  유년의 추억이 묻혀있는 골목길을 벗어나면 만나게 되는 큰길, 우리는 그 큰길에서 야망과 꿈으로 출렁이는 청춘을 풀어낸다. 야심찬 푸르름으로 속력을 내어 달려야하고 넘치는 패기로 깃발을 휘날리며 삶을 터득하며 채우고 쟁취한다.
  그러는 사이 그 길은 유년과 멀어지고 고향과 멀어지고 옛친구와 멀어지고 순수했던 시절과 멀어지고.....큰길은 탄탄대로만은 아니다. 아스팔트도 있고 구부러진 비포장도 있다. 갈래길과 구부러진 길을 만나 멈칫거리기도 하고 돌기도 하면서 더텨나가다보면 어느 사이 우리는 장년이 된다. 뽀얗고 포동포동하던 피부가 거무틱틱해지고 가녀리던 어깨가 튼실해지고 굳은살 박히는 근육 위에 삶의 무게가 실린다. 삶의 무게 역시 만만찮아서 지치기도 하고 주저앉기도 한다.
  희망의 문턱에서 빛나는 삶을 만끽하는가하면 절망의 구렁텅이로 곤두박질 칠 때도 있다.그러는 사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우리는 노년을 맞이하게 된다.
  봄길목에 서있던 꽃나무가 낙엽을 달고 부스스한 모습으로 서 있듯이 우리는 으스스 한기를 느껴야 한다. 


돌아보면 첫발을 내딛던 유년의 골목길은 보이지 않고 산 너머너머 멀리, 강 따라 굽이굽이 휘돌아서 구부러진 삶의 길을 걸어온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가득 채우려 피흘리며 치열했던 삶이 텅 비어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봄날의 꽃숭어리 같던 시절은 사라졌고 함께 부대끼며 지내던 사람들도 잊혀졌다. 그들이 나에게 잊혀진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내가 잊혀졌다는 사실에 소스라쳐 놀란다.
  외로워진다. 허무해진다. 쓸쓸해진다.
  청춘의 푸르름도 거짓말 같고 여름날의 펄펄 끓어오르던 힘도 추억일 수밖에 없다.
  이제 돌아가야 한다. 떠나왔던 동네 골목길을 향해 천천히, 잃어버린 감성을 찾아 천천히, 한가롭고 풋풋했던 옛 모습을 찾아 천천히..... 돌아서야한다.
 
  봄이 오던 그 길목으로 우리가 그렇게 다시 돌아올 때 빈손이어서는 안되겠다. 빈가슴이어서는 더욱 안되겠다.
  급하게 몰아치던 속도도 낮추고, 뜨겁던 피도 식히고, 스산한 바람결에 눈부시게 은발을 날리면서 편안하고 뿌듯한 가슴으로 떠났던 그 길로 들어서야겠다.
  그러기위해서 우리는 이 봄날을 허비해서는 안된다.
  무엇을 해야 할까?
  낙엽 밑에 열매를 익히는 나무처럼, 저문 들녘을 풍성하게 할 가을추수를 위하여, 아름다운 노년을 위하여, 따뜻한 겨울 잠자리를 위하여 온갖 생명이 시작되는 이 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깊이 새겨보아야 한다.


  봄에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 그것은 파종이다.  농부가 겨우내내 씨오쟁이에 간직해놓은 씨앗을 봄눈 녹은 땅위에 뿌리듯이,
  좀더 빛나는 내일을 위해 열심히 성장통을 앓으며 어린 나이를 쌓아가듯이,
  어부가 거친 풍랑의 바다를 향해서 끊임없는 투망질을 하듯이
  이봄에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위해, 다가올 겨울을 위해 의미있는 무엇인가를 시작하는 일, 그것이 곧 파종이다.
 
  차 한잔을 앞에 놓고 길이 보이는 창가에 앉으면 도란도란 볼에 와 닿는 햇볕, 나는 지금 그 봄볕이 전해오는 속깊은 귀속말을 듣고 있다.

 

(3월호원고-1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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