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입춘에 묵은지 어때요?

천마리학 2006. 3. 22. 17:28

 



묵언기도 중인 겨울산에서

나무들이 모두 발가벗은 채

깊은 명상에 잠겨있었다


여름내내 들끓어 댄 근육 위에

흰 눈을 얹어놓고

피를 식히는 침묵의 계절


잔 가지에 이는 바람소리랄지

발밑에서 바스라지는 시간의 숨소리랄지

한사코 길을 막는

겨울 산 그 적막 속에서

부활의 숲을 날아오르는 새는

잘라낸 생애들이 삭혀내는

갈색 어휘들을 쪼아먹는다


그림자를 남기지 않으려고

벗어버린 나무들이 부처가 되고

낮은 뿌리로 스미는 빗물이

다시 하늘로 올라

투명한 물길로 열리는 겨울산

나무들이 벗어놓은 옷가지들이

해탈의 연기로 피어올랐다


           -권천학의 시 <겨울산>-


 



이번 겨울, 그리 춥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영하 10도 전후를 오르내리는 추위는 몇 차례 있었습니다만 서울지방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에는 눈도 귀했습니다. 오히려 제주도나 울릉도 심지어 부산이나 경남지방 등 예년에 눈이 내리지 않던 지역에 눈이 자주 내린 이변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대한(大寒)도 이미 지났고 입춘(立春)이 코앞에 다가서고있는 지금, 일기예보는 영하로 내려갈 강추위를 다시 예보하고 있습니다. 입춘추위라고할까요?
입춘 지나면 금방 설이 돌아옵니다.
언제나 설무렵이면 누비 솜바지 속으로 스며들던 가난하고 배고프던 옛시절의 추위를 떠올리는 어른들이 많을 것입니다.

아직 겨울이 남아있으니까 겨울 얘기하긴 좀 이른 감이 있긴 하지만 어떻튼 겨울이 따뜻해지고 있는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다시 온다는 강추위의 예보가 오히려 반갑기도 합니다. 오래동안 우리가 경험해왔던 것을 정상으로 생각한다면 겨울은 추운 것이 정상이려니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지구 온난화‘라는 말이 어쩐지 불길하게 생각되거든요.








입춘추위에 김장독 깨진다고 했던가요?
혹시 ‘묵은지’를 아세요?

얼마전 저를 찾아준 몇몇 글쟁이들과 함께 밤을 세우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때마침 저에게 남아있는 5년 묵은 ‘묵은지’를 내놓았더니 그 깊은 맛에 모두들 놀라워했습니다. 더하여 김치를 그렇게 오래 묵힐 수 있나 하는 것에 대한 놀라움도 컸습니다. 2000년에 담근 김장김치니까 정확히 말하면 5년째이지요.
아무튼 모두들 놀랐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수원씨, 감탄을 연발하며 어린 시절 눈덮인 겨울 추억에서부터 시린손으로 묻어둔 김치독에서 꺼내오던 어머니의 추억까지 그 줄기차고 구수한 입담에 실려 줄줄이 끌려나오는걸 보니..... 분명 정치적 발언이나 방송용 발언은 아니었습니다.
그 친구, ‘묵은지’ 맛을 제대로 알더라구요. 그 맛을 아는 자에게 복이 있을지니.....








우리는 흔히 ‘김치’라고만 알고 있고 ‘지’라는 단어는 왠지 어른들이나 아는 옛시절에 사용되었던 고어(古語)나 사투리쯤으로 여기게 되거나 약간은 촌스러운 느낌도 가지고 있습니다.
사라져가는 고어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확히 알고보면 단순히 ‘김치’의 고어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은 ‘묵은지’ 얘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야채요리를 할 때 ‘나물’과 ‘지’로 분류했다고 합니다.
‘나물’은 생야채를 그냥 날로 무친 것을 포함하여 삶거나 볶거나 익혀서 무친 것을 말하고, ‘지’는 야채를 발효시킨 것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콩나물, 숙주나물, 취나물무침, 도라지무침.....등 생으로 무치거나 살짝 데쳐서 무치거나 무친 것은 모두 ‘나물’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김치의 원조인 ‘지’는 다릅니다.
그냥 무친 것이 아니라 양념과 버무려서 발효시킨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발효과정을 겪지 않은 것은 ‘나물’이고, 발효가 된 것은 ‘지’입니다.
배추겉저리는 ‘지’가 아니라 ‘나물’입니다. 익지 않은 김치 또한 엄격한 의미에서 ‘지’가 아닙니다.
‘묵은지’는 최소한 6개월 이상 묵혀 발효와 숙성의 과정을 거친것이기 때문에 ‘묵은지’라고 합니다.

'싱건지' 역시 싱겁게 담가서 발효시킨 것을 의미합니다. '지'보다 국물을 많이 잡아서 싱겁게 담근 '싱거운 지'로 동치미가 대표적인 '싱건지'입니다.







김치의 발효과정도 기간이나 장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6개월동안 밀봉하여 발효시킨 상태가 가장 영양가도 좋을 뿐만 아니라 맛도 좋다고 합니다.
3년 이상 묵혀 먹는 지도 있는데 6개월 발효시킨 것보다 더 깊은 맛이 있습니다.

맛이 깊을뿐만 아니라 조직이 파괴되지 않고 그대로 살아있어서 씹을 때 아삭아삭한 맛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그것이 곧 우리의 전통 발효과정의 장점입니다.
공기와 닿지 않도록 김치 위에 배추잎을 우거지로 덮고 살짝 소금을 뿌리고 꾹꾹 눌러 다시 비닐로 싸서 빈틈이 없게 한 항아리를 땅속에 겨울 내내 6개월 정도 묻어두었다가 그것을 다시 저장고로 옮겨두면 오래 묵은 ‘묵은지’가 되는 것입니다.
 


저장고로 옮기는 것은 날씨가 따뜻한 계절이 되어 땅 속의 온도가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빈틈없이 꼭꼭 싸매는 것은 공기와 닿지 않게 하는 혐기성 발효를 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담아먹는 김치가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면 시어지는데 그 시어지는 맛은 산화 즉 공기와의 접촉때문입니다.
끼니때마다 김치 항아리에서 김치를 꺼내고나서 꾹꾹 눌러놓는 것도 공기의 차단을 위한 것입니다.

‘묵은지’가 시지 않으면서 구수하고 깊은 맛을 내는 것은 혐기성 발효과정을 채택한 때문이고, 발효과정에서 필수 아미노산이 생성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즐기는, 우리나라 사람들 만이 느끼는 특유한 맛의 그 ‘구수한맛’이라고 표현하는 그 구수함이 바로 아미노산의 맛입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무쇠솥 밥에 ‘묵은지’ 죽죽 찢어가며 한가닥 척 걸쳐먹는 그 맛이라니!
침넘어가세요?






이왕 ‘묵은지’ 이야기 나온김에 ‘묵은지’를 더 맛있게 먹는 방법에 대해서도 말씀드려보겠습니다.
가능한 한 ‘묵은지’는 칼로 썰지 않고 먹어야 제맛입니다.
그것은 단지 기분상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칼로 썰면 금속성과 닿는 부분이 산화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직이 위에서 아래로 되어있기 때문에 칼로 썰면 조직이 끊어집니다.

또 썰지 않고 가닥김치로 먹을 때 길이로 되어있는 조직을 그대로 먹을 수 있어 맛이 더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찢은 김치가닥을 어느 쪽에서부터 먹어야 더 맛이 있을까요?
대개들 잎쪽에서부터 먹게되는데 사실은 줄기쪽에서부터 먹어야 더 맛이 좋다고 합니다.
 


‘묵은지’ 백퍼센트 즐기며 제대로 먹는 방법을 정리해보자면 칼로 썰지 말고, 줄기쪽에서부터 먹는 것입니다.
게다가 김치의 아삭아삭한 소리와 맛은 특별하게 씹히는 것이 없는 흰쌀밥에 씹을거리를 제공하여 먹는 즐거움을 더해줍니다.
왜 재미 없는 것을 말할 때 '밥맛'이라고 하잖아요.
밥은 특별한 맛이 없기때문입니다.

이제 아시겠지요?
김치는 음식이 아니라 과학입니다.
가닥김치를 손으로 죽죽 찢어서 뜨거운 흰쌀밥에 척척 걸쳐먹던 옛추억.
으이구, 침넘어갑니다.




 

요즘이야 김치냉장고가 대신 해주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겠지만 이때쯤이 '묵은지'가 제맛을 톡톡히 해내며 식탁 위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계절입니다.

오늘 저녁, 묵은김치 맛을 살뜰히 음미해보는 거 어때요?
그러나 단지 김치맛을 즐기는 것만으로 끝내지는 마십시오.
배추가 김치가 되고, 김치가 발효하고 깊은 맛을 만들어내기까지의 과정.
영양가가 높고 맛이 좋은 ‘묵은지’가 되기까지의 숙성과 발효의 과정 속에는 조화와 스밈이 있고 절망과 절제와 은둔.....등 우리가 귀담아들어야 할 좋은 약제가 있습니다.
제가 하고싶은 이야기는 바로 그것입니다.


입동추위와 설, 잘 보내십시오.
추위가 잘 익으면 봄이 더욱 찬란할 것입니다.

멀리서 봄이 타고오는 수레소리가 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