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지팡이 사던 날 * 권천학

천마리학 2006. 3. 14. 00:09



지팡이 사던 날 * 권천학





팡이를 사기 위해 아버지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맞잡은 손바닥에서 아버지의 온기가 나지막하게 전해져왔다. 전처럼 뜨겁지가 않고 그저 예릿한 정도여서 가슴이 또다시 먹먹해졌다. 아버지의 손가락 끝 부분이 서늘하게 느껴져서 내 손으로 아버지의 손가락 끝 부분을 모아잡고 걸었다. 자세가 약간 불편해졌지만 그렇게라도 아버지의 손을 덥혀드리고 싶었다. 그렇게 요모조모 손을 옮겨 잡아가며 걷는데 아버지의 걸음이 자꾸만 빨라지는 걸 알 수 있었다.
왜이리 급하실까? 그 늠늠하고 당당하시던 모습은 다 어디로 갔을까? 평생을 절제와 훈련으로 다듬어진 장군(將軍)처럼 가슴 쭉 펴고 반듯하게 걸으시던 아버지.

'계집애가 거만하게 보인다니까', 나 학생적 아버지 자세 닮았다는 이유로 어머니로부터 자주 듣던 말이다.

젊으셨을 때 말술을 마시면서도 한 번도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셨던 아버지셨다.
“아버지, 뭐가 그리 급하세요? 서두르지 마시고 천천히 걸으세요”
“서두르는게 아니라 몸이 자꾸만 앞으로 쏠려 넘어질거 같아서 발을 내딛다보니..... 그렇게 돼”

아버지의 대답에 또다시 가슴이 서늘해져온다.

려서는 네 다리로 젊어서는 두 다리로 늙어서는 세 다리로 걷는게 뭘까?
어렸을 때 아버지가 들려주신 수수께끼 중의 하나다.
또 있다.
젊어서는 파란 주머니에 은돈 열냥, 늙어서는 빨간 주머니에 금돈 열냥 가진게 뭐지?
그게 뭘까? 그게 뭘까? 궁리하다가 답을 맞추면 목마를 태워주시곤 했다.
어쩌다가 한가로운 저녁이면 손모양을 이리저리 맞추어서 벽 위에 그림자를 만들어 보여주시기도 했었다. 호롱불빛에 만들어지는 컹컹 짓는 개모양이며 깡총토끼, 기러기 훨훨..... 그게 얼마나 신기했던지.....

느 사이 이토록 많은 세월이 흘러가버렸을까.

아버지의 목에 매달려 흉내내며 깔깔거리던 그때가 눈에 선한데 지금은 기울어진 어깨, 회한 가득해 보이는 아버지의 눈빛을 느낄 때마다 가슴이 시리다. 비로소 아버지를 83세의 노인으로 실감해야하는 일이 서러울 뿐이다.
아버지의 손을 요리조리 옮겨 잡아가면서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드리려고 마음을 써봤지만 그게 무슨 힘이 될까? 아버지의 힘이 되어드릴 수 없는 한스러움이 가느다란 한숨으로 새어나왔다.




칠전, 부모님을 뵈러 갔던 날 아버지께서는 처음으로 지팡이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의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나는 가슴 속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흡사 못들을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모른척 하고 싶었다. 이삼년 전 부터 눈에 띄게 근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고, 근래에 와서 확연히 왜소해진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리고 조마조마해오던 터였다.
곁에 계시던 어머니께서 딸에게 미안해선지 신발장 안에 있는 거 쓰지 그러느냐고 한 마디 거드셨다. 몇 해 전 어머니께서 계단에서 넘어져 병원치료를 받을 때 쓰시던 것이었다.
“그건 짧아서 안돼”

아버지께서는 속에 칼이 달려있는 3단 지팡이, 손잡이 장식이 멋지게 조각되어있는 금속
 지팡이, 나무로 만들어진 지팡이, 여뀌대 지팡이 등 친구분들이 가지고 있는 지팡이들을 설명하셨다.
그렇게 계속 지팡이에 대한 이야기를 주거니받거니 하는 동안 나는 듣는둥 마는둥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결국 그날이 마침 일요일이어서 문을 닫은 가게들이 많을테니까 다른 날 기회 봐서 알아보겠다는 말로 얼버무리고 말았었다.

버지에 대한 추억들 중에서 감동으로 각인된 아버지의 모습이 담겨 지워지지 않는 오래된 기억이 하나 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일찌기 고향인 경북 안동을 떠나 객지인 전라북도 김제와 이리(익산)지방에서 사업을 하시며 생활기반을 잡으셨기 때문에 나를 제외한 나의 형제들의 본적은 경북 안동이면서 전라북도 태생일 뿐만 아니라 중고등학교도 그곳에서 다니게 되었다. 전라도에서 “경상도집”으로 불리우며 정미소, 양조장, 제재소 등을 경영하셨다. 사업의 기반이 잡히자 고향 안동에서 할머니를 모셔와 함께 살았다. 우리집으로 오시기 전까지는 한번도 고향을 떠나본 일이 없으시던 할머니께서는 소위 말하는 '전라도에서 성공했다'는 큰아들의 집에서 지내시면서 노후의 안락을 누리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께서는 해가 갈수록 당신의 손때가 묻은 고향을 잊지 못하셨고 늘 고향에 가고싶어하셨다. 가끔 조상들 발치에 묻혀야지 하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러던 차에 내가 고등학교 진학을 하던 해 새학기가 시작될 무렵 몸이 허약했던 나는 부득이 한해를 휴학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기회에 할머니를 모시고 고향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금이야 교통이 좋아져서 비교적 쉽게 당일치기로 갈수가 있지만 그때만해도 교통이 불편해서 전라북도 김제에서 경상북도 안동까지 가는 일이 수월치가 않아서 버스와 기차를 갈아타면서 가는데 걸리는 시간만도 이틀이 걸리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내가 어찌어찌 할머니를 모시고 간 고향에서 머물고 있던 어느 날 밤 할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다. 뜻하지 않은 일에 온집안 식구들이 경황이 없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아들인 나의 아버지께 급전(急傳)이 날아갔고 그 비보를 받은 아버지께서는 헐레벌떡 밤을 새워 그 먼길을 달려 다음 날 새벽녘에 당도하셨는데, 어두운 밤 고향마을 근처에 있는 냇물을 서둘러 건너시다가 넘어져서 허리를
다쳐 거동이 불편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당신의 아픈 허리는 간데없고 할머니의 주검 앞에서 애통해하시던 모습에서 아버지의 상심(傷心)이 얼마나 깊었던지, 나만이 아니라 보는 이 모두가 가슴아파할 정도였다. 그때 아버지는 나를 다둑이시며 “철모르는 니가 아빠대신 종신했구나”하시고는 할머니의 시신 앞에 무릎 꿇고 임종(臨終)을 지키지 못한 불효를 빌며 통탄해하셨다.




례식은 우리 집안의 풍속대로 월장(月葬)으로 결정하여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해 4월은 여늬 4월보다 날씨가 더워서 시신의 부패가 예상보다 빨리 일어나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냉장시설이 없던 그 시절, 시신을 온전히 보존하기란 아무리 갈무리를 잘 한다고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할머니의 시신을 모신 방에서 부패의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번갈아가며 시신을 지키던 자식들도 그방에 있기를 거북해할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만은 꼼짝도 안하시고 그방에서 나오시질 않으셨다. 살충제를 뿌리고 파리채를 들고 날아드는 파리들을 잡아내시면서 연거퍼 밤을 새우셨다. 집안 어른들이 만류하기도 하고 교대하기를 권하기도 했으나 아버지는 그저 말없이 시신에서 흐르는 분비물을 연신 닦아내고 돌보면서 그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냄새는 짙어져 집 근처에서도 맡아질 정도로 심했다. 장례 후에 시신을 안치했던 방의 방바닥 구둘을 모두 들어내야 했을 정도였다. 할 수없이 장례일정을 앞당겨 9일장(九日葬)으로 일을 처리하는 수 밖에 없었다.
평소에도 주변에서 ‘효자’라는 말을 들으시던 아버지셨긴 하지만, 할머니의 장례에 임하는 아버지의 태도는 나에게 감동을 넘어 경외감까지 안겨준 특별한 기억이 되었다.


삼년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나이답지 않게 활기차셨다.
힘있는 모습으로 매일 산에도 가시고, 어쩌다 찾아뵙는 일이 뜸하다싶으면 전화를 걸어 넌 뭐가 그리 바빠 얼굴보기 힘드냐? 하고 나무라기도 하셨고, 가끔은 너 요즘 바쁘냐?
안바쁘면 어디 구경좀 가자 하시기도 했다. 그러던 아버지께서 언제부턴가 음식을 드시면서도 별맛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셨고, 어디를 가자고 해도 귀찮아서 집에 있겠다고 사양하시는 일이 잦아졌다. 알게모르게 자세의 꼿꼿함이 사라지고 있음도 감지되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뜨끔뜨끔, 아버지 허리좀 펴보세요. 저도 아버지 닮아서 키가 작아지잖아요. 다시한번 드셔보세요, 맛이 있어요, 거기 가면 아버지 좋아하시는 거 있을지 모르는데....하면서 아버지의 스산함에 이르지 못하는 너스레를 떨곤 했다.



팡이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시던 며칠 전 그날도 자고
가거라 하시며 나를 붙드셨다. 언제나 그래오셨던 것처럼 그날 밤도 당신께서 늘 쓰시는 사우나 침대를 나에게 내어주시고 당신은 침대 옆 바닥에 자리를 펴고 주무셨다. 그뿐이 아니다.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육십을 눈앞에 둔 이 딸을 위해 따뜻한 세수물을 받아놓고 침대맡에 오셔서는 ‘얘 빨리 나와 식기 전에 세수해라’ 하셨다. 나 역시 늘 그렇듯 마지못한 척 ‘전 겨울에도 찬물 쓰는데 괜히 걱정하셔.....’하고 궁시렁대며
목욕실로 들어갔지만 따뜻한 세수물에 아버지를 느끼며 흐르는 눈물을 씻어야했다.


됩니다
아버지. 그 동안 당신은 자식들의 바람막이였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세상사에 지칠 때마다 쏟아내는 온갖 푸념까지도 다 들어주는 친구였고, 든든한 기둥이었습니다. 더 이상 허물어지시면 안됩니다아버지. 이제 어떻게 해야 제가 당신의 든든한 지팡이가 될 수 있을까요?

지금도 당신은 주머니에 금돈 열 량 대신 자식들에 대한 염려를 넣고 다니십니다. 그리고 제주머니엔 은 돈 열 량 대신, 당신에겐 아무
힘도 되지 못하는 걱정과 욕심들만 가득 들어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아버지가 실행하셨던 효행의 십분의 일, 아니 백분의 일도 못하고 있습니다. 저에게도 당신의 그 깊고깊은 효도를 백분의 일만큼이라도 실행 할 기회를 주십시오. 더 이상 허물어지시면 안됩니다아버지!


버지와 함께 백화점에서 마음에 드는 지팡이를 고르는 동안 내내 가슴 속으로 울부짖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