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가을물 흠뻑 들어 온 Spencer Valley

천마리학 2008. 11. 7. 13:57

 

 

 

 

하이킹

가을물 흠뻑 들어 온 Spencer Valley

 

 


아침 7시, 억지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요즘 또다시 잠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라서 간밤에 또 잠을 설쳐 일어나는 일이 힘들었다. 도시락은 또 어떻게 싸야하나 행장은 어떻게 차려야하나... 모두가 부담스러운 가운데 별러오던 하이킹을 꼭 실현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눌렀다.

거실에 불이 켜져 있고 페트릭이 싱크대 앞에 있었다. 그리고 싱크대 위에 은박지로 포장된 무엇인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 페트릭이 새벽에 일어나서 샌드위치를 3덩이 만들어 싸 놓았다. 요즘 FDA의 감사를 받는 회사일만으로도 스트레스가 많은 것을 알고 있는 터인데 장모의 하이킹을 위해서 새벽부터 준비하다니, 뜻밖이었고 고마웠다.


미팅시간 8시, 미시사가의 모임장소까지 나를 데려다주기 위하여 7시 20분에 온가족이 함께 집을 나섰다. 가족이 좋다. 행복하기도 하면서 미안하기도 한 마음. 약속시간 5분 전에 도착, 티모씨 커피숍에서 처음 만나는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약간의 설명을 듣고... 승용차에 분승, 어딘가로 달렸다. 30분쯤? Hamilton을 지나 목적지의 주차장까지 가는 동안 간간이 스치는 가을풍경이 좋았다. 마치 우리가 가는 하이킹코스의 예고편이라고나 할까.

 

 

 

넓기만 한 캐나다 땅. 나 살던 김제의 들녘 같은 캐나다, 산이 어디 있을까? 늘 궁금해지는 캐나다. 주변을 둘러보면 솟아있는 산이 없는 것이 캐나다의 특징이다. 한국처럼 저만큼 높이 솟아있는 산이 보이는 그런 풍경이 아니다. 그저 밋밋하다. 그 넓은 땅덩어리가 호수와 산, 계곡... 온통 자연이다.

 

목적지인 Spencer Valley의 근처 주차장에 차들을 세워놓고 일행 15명의 하이킹이 시작되었다. 10명의 회원들은 현재 미국으로 여행을 간 상태이다.

주변을 둘러보면서 약간의 의구심이 생겼다. 어디 그리 깊은 계곡이 있을라고?


하이킹 클럽인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발로 쓰는 캐나다 여행>을 쓰신 김운영씨가 1996년에 만든 모임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현재 회원이 25명 정도. 역사가 긴 만큼 멤버들의 하이킹 능력도 상당하다. 20km 내외를 속보로 오르고 내리는 길을 걷기 때문에 초보자들은 따라가기 어렵다고 한다. 그렇지만 오늘은 속도를 좀 늦춰 볼 테니 힘들면 말하라는 리더 김운영 선생님의 배려의 말씀을 들으며 줄을 따랐다. 하이킹 코스에 대한 설명도 들었다.

 

 

오늘의 하이킹 코스는 Bruce Trail의 일부이다. Bruce Trail은 나이라가라 폭포부근에서 시작해서 Bruce Peninsula까지 산과 계곡 속으로 이어진 849km의 트레일 코스로 캐나다에서 가장 먼저 개발된 코스로 가장 길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서울에서 부산을 왕복하는 거리와 비슷하다. 남부온타리오에 있는 천혜의 자연환경이 있음은 캐나다 중에서도 온타리오사람들의 축복이라고 한다.

 

 

하이킹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첫 번째 폭포가 나왔다. 계곡에 숨겨진 폭포는  아담하면서도 수려했다. 눈 아래로 뻗어있는 던다스 시내의 모습과 기차 길이 지나가는 계곡을 멀리 내려다보는 맛도 일품이었다. 이야기꽃을 피우며 오르고 내리며 리더를 따라 가다보니 수북하게 쌓인 낙엽에 파묻힌 골짜기의 나무다리가 나왔다. 잠시 숨을 삭이고 돌아섰다. 어디가 어딘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따라갔다. 굳이 어디가 어딘지 알 필요도 없었다. 우린 모두 깊어진 가을 속을 지나가고 있었으니까. 그것으로 족하니까

 

 

 

 

 

 

 

해마다  3월이면 시산제를 지낸다는 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취형 교각 아래로 흐르는 물줄기가 길러내는 물가의 잔디밭. 햇볕과 그늘이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무둥치에 배낭을 벗어놓고, 땀 젖은 겉옷들을 벗고 땀을 식혔다. 간단한 인사 나눔으로 시작된 점심시간, 한 편에선 된장을 풀고 풋호박 썰어 넣은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두부 김치찌개가 자글자글, 양주잔이 나누어지는 틈 사이로 소주병이 나와 히트치고,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여기저기서 정담들이 오가는 사이에 갖가지 음식들이 나온다. 고추장에 버무린 옛날식 멸치볶음. 집에서 길러 담갔다는 올개닉 깻닢, 을지로 뒷골목 주점에서 먹던 새콤달콤 골뱅이무침에 누군가 끓여온 따끈따끈 누룽지까지. 그 틈에 내가 가져간 '사위가 싸준 샌드위치'도 한 몫.   

토종음식과 소주와 양주가 서로 어울리면서 빚어내는 소탈함들이 이내 어색함을 걷어내고 시간을 건너 뛰어 한국적 분위기로 거나했다. 


다시 행장을 꾸려 다리를 건너 아래쪽으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갔다. 두 번째 폭포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점심을 먹은 장소가 바로 폭포의 위였다. 위에서 볼 때는 그저 잔잔하게 흐르는 시냇물이던 물길이 떨어지면서 빚어내는 또 다른 모습, 물의 길이 저렇게 다를까? 사람 사는 모습도 저러려니, 한 번쯤 커다란 변화를 겪으면서 달라지는 우리들 삶의 모습도 저러려니, 저러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려니…

숨어있는 경관들을 보면서 주차장에서 느꼈던 의구심이 사라졌다.

그럼 그렇지. 이렇게 큰 땅덩어리인데 뭐가 달라도 다르지 않을까 하고 마음을 주억거렸다. 알공퀸 국립공원에 간 일이 생각났다. 구석구석 파고 들어가야 보여주는 숨어있는 습지와 계곡과 호수들.


그동안 한국에서 살면서 몬트리올이나 퀘백 킹스턴 등 캐나다의 몇 곳을 여행한 일이 있는데 그때마다 늘 부럽게 느끼는 것이 넓은 땅덩어리였다. 부럽다 못해 질투가 났다. 이게 바로 좁은 나라국민이 가지는 콤플렉스일 것이다.

 

 

콤플렉스? 

몇 해 전 처음으로 토론토에 다니러 왔을 때 이민 온 지 30년이 넘는 교포분의 안내를 받아 온타리오 호수에 갔을 때였다.

"이 호수 한 가운데다 한국을 갖다놓으면 갈아 앉아 버려 보이지도 않습니다."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그분의 뜻은 온타리오 호수가 그만큼 크다는 설명을 한 것임을 내가 왜 모르랴. 헌데도 난 속 깊이 괜한 심통 비슷한 마음이 일었다.

"아, 그건 우리나라가 작아서가 아니라 인구가 워낙 많아서 무거워서 가라앉을 겁니다"

나의 대답에 함께 웃고 말았지만 왜 모르랴. 그게 작은 나라사람의 콤플렉스라는 것을.


가도 가도 끝을 보여주지 않을 듯이 이어지는 숲속 길을 물소리와 동행하는데 구비구비 낙엽이불을 덮고 있는 오솔길들이 때로는 화사하게 때로는 고즈넉하게 사람의 마음을 잡아 흔들었다. 오르고 내리는 길이 이어져서 처음으로 하는 나에겐 약간 힘이 들었지만 다른 멤버들에겐 그야말로 '어 피스 오브 케이크'이다. 실제로 오늘 코스는 다른 때에 비해서 짧기도 하고 평탄한 편이라고들 했다.

 

 

 

 

 

 

 

 

흠뻑 익어있는 숲속 풍경에 감탄사를 연발하던 일행들은 끝내 장난꾸러기가 되고 만다. 낙엽을 한 웅큼씩 끌어 모아 하늘로 날리더니 끝내 낙엽 위를 뒹굴어 버린다. 그 순간의 이곳은 낯설던 캐나다가 아니다. 그리고 이국땅에 짐을 푼 나그네도 아니다. 한때 고달팠던 삶으로 허리 휘던 이민자도 아니다. 이삼십 년 전, 호박넝쿨 뻗어있는 담장과 초가집 뒤동산에서 뒹굴던 한국의 가시네 머스마들, 그리고 꿈 많던 소년소녀들이다.

잘 익은 가을 숲이 단숨에 긴 세월과 먼 거리를 넘나들게 만들었다.

때맞춰 지나가는 기차를 향해서 서슴없이 손을 흔들자 기관사마저 취했는지, 취이이!취이이! 취했다는 답례의 기적을 울려주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에서 약간의 무릎 통증을 느꼈다. 그런데도 다른 때보다는 거리도 짧은 편이고 시간도 여유 있게 걸었다고 한다. 평소에는 오후 2시에 끝내는 산행이지만 오늘은 가을 정취에 마음속까지 흠뻑 젖느라고 3시가 넘었다. 

주차장으로 돌아왔을 때 회원들 모두가 제각각 곱게 물든 한 그루씩의 단풍나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