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통속적인 현실 너무나 통속적인-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천마리학 2007. 3. 15. 03:23

 

  

 

      통속적인 현실, 너무나 통속적인 이야기

 

                                  -공지영의 장편소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곳 토론토에 와서 독서의 시즌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읽은 것은 내가 떠나올 . 그러니까 작년 (2006 11 23)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영화로 만들어져 흥행이 되고 덕분에 이미 출간된 책도 70만부를 넘어서 소위 대박을 터트리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는 이런저런 핑게로 바쁘게 시간을 보내느라고 책은 도통 읽지 못하다가  가끔 외국에 나와 있는 철엔 으례이 소나기 독서를 하게 되고 나는 그것을 독서의 시즌이라고 부른다.

 

이번에도 토론토에 도착하자마자 독서의 시즌 읽을 책들을 하나를 통하여 토론토대학의 한국학 도서관에서 우선 이십 여권의 책들을 가져다 놓고 읽기 시작했다. 그동안 무지하게 별렀던 류영국의 <만월까지 1,2,3> 비롯하여 박상륭의 <죽음에 대한 연구 1,2> . 그런데 중에 공지영의 작품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봉순이 언니> <착한 여자 , > <인간에 대한 예의> 포함되어있다.

 

그뿐이 아니다. 황석영의 단편 <몰개월의 >  박민규의  <카스테라>까지 읽기 위하여 한국학 도서관에 요청했더니 불행히도 토론토 대학의 한국학 도서관에는 가지 없었다. 황석영의 <몰개월의 > 한국의 집에 전화해서 내가 없는 사이에 중에 혹시 있는가를 확인했더니 다행히도 있다고 해서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박민규의 <카스테라> 없고 그의 다른 작품인 장편소설 <삼미 슈퍼수타즈의 마지막 펜클럽> 있었다. 그거라도 읽자하고 확보했다.

 

황석영이란 이름이야 익히 알고 이미 그의 작품을 읽기도 하고 보유하고 있기도 터이지만  박민규라는 이름은 사실  낯선 이름이었다. 내가 권을 일부러 읽고자 것은 공지영때문이다. 여기 와서 인터넷을 통하여 어느 신문사 기자들과 공지영이 인텨뷰 내용 중에 공지영이 황석영의 단편 <몰개월의 >  박민규의  <카스테라> 아주 좋게 읽었다고 때문이었다.

 

단편이 좋다는 그의 의견에 나도 동의한다. 작품의 치밀성이나 플롯 소설의 기법을 충분히 담아내는데는 장편보다는 단편이 하이테크하기 때문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말은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물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불교의 경전에 나와있는 말로서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하여튼 그렇게 확보해놓은 그의 책들 중에서 먼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읽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동시에 공지영의 몇몇 작품들과 그가 좋게 읽었다는 작가의 책까지 확보한 것은 작가에 대해서 성향이나 특징을 알려면 사람의 작품을 두루 섭렵해야만 된다는 생각, 그리고 그가 좋아한다는 것까지 읽어보면 그의 취향이나 성향을 자세히 파악할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의 독서습관의 하나이기도 하고, 따라서 새로운 작가나 작품을 만나는 기회가 되는 정보가 되기도 한다. 

동안 공지영의 글은 한번도 읽어보지 못했다. 읽고싶은 일련의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리스트할 때마다 읽어봐야지 하고 벼르기만 하다가 미뤄지곤 했다.

 

그런가하면 사실 그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고등어> 이미 서가에 꽂혀있었지만 결국 미뤄지다가 지난 여름 토론토대학 한국한 도서관에 1,000여권의 책을 기증할 포함시켜버렸는데 결국은 토론토에 와서 빌려보게 것이다. 

미뤄진 구체적인 이유라든지 독서의 시즌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얘기하기로 하고 일단 공지영으로 돌아가자. 

읽는 일이 미뤄지기만 했던 그의 작품을 이번 기회에 읽어보려고 시도한 것은 그동안 계속 미뤄지기는 했지만 읽어보고 싶었던 작가이기도 한데다 앞에서도 잠깐 비쳤듯이 요즘 뜨는 작가이기 때문에 앞당겨진 것이다.

 

내가 떠나올 때까지는 단순히 나의 기왕에 읽어보려고 했던 작가의 작품을 빨리 읽어보고 그의 작품이 어떤 즐거움을 주는 , 혹은 어떤 스타일인지 하는 것을 맛보고싶은 독자로서의 독서욕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기 토론토에 그에 대한 사적인 이야기들을 인터넷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놀라웠다. 그리고 연민이 갔다. 얼마나 힘들게 살았을까하는.

 

그가 세번 이혼하고 각각 () 다른 아이를 기르고 있다는 사실에 덧붙여서 딸은 이미 고등학생쯤 되는 나이가  되었는데 친구처럼 엄마의 입장을 너무나 이해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말하자면 성이 다른 아이를 기르지만 별문제 없이 , 그야말로 물소의 처럼 혼자서 잘도 가고 있다는 의미가 배경으로 깔려있었다. 사실 떠나오기 전에 어느 신문엔가 연재되고있는 딸에게 주는 편지글 형식의 그의 글을 간간히 보아오긴 했어도 그가  세번 이혼을 했다던가 성이 다른 각각의 아이를 기르고 있다던가 하는 사적인 내용은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기사를 읽고 나는 일단 그가 매우 용기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자기만의 특별한 삶을 가지고 말없이, 말못하고 사는 많은 여성들에게는  매우 부러운 면이기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세번 이혼하고 성이 다른 아이를 기르고 있다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실을 당당하게(?) 밝히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염려되기도 했다. 우선 너무나 사적인 이야기, 굳이 밝힐 필요가 없는 이야기여서다. 그가 소설가이지 연예인이 아니다. 내가 말한 당당함이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의 당당함일까? 

소설가가 묵묵히 소설로 세상을 말하고, 자신의 사상을 이야기하고, 자기의 뜻을 전하고…. 그러면 됐지 굳이 너무나 사적인, 너무나  남달라서 세상적인 관심거리가 되기 쉬운 이야기들을 밝힌다는 것은 그에게 부담일 것이며 또한 주위의 사람들 가족에게 불편 내지는 상처가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에서다. 분명 사적인 부분이 세상사람들에겐 호기심이나 안주꺼리가 되고 흥미본위의 삼류 이야기처럼 되어버릴 수도 있다. 동안에도 극히 사적인, 색다른 이야기들이 베스트 셀러가 되고 그래서 유명해지는 것을 많이 보아오면서 개인적으로는 사람들은 남의 숨은 이야기에, 그것도 색다른 이야기를 훔쳐보기 좋아할까 하는 생각을 해왔었다. 예를 들면 십몇년 연하의 남자와 결혼을 했다던가, 외국남자와 결혼을 했다던가, 폭력남편을 만나 여러 인생이 망가지고 깨졌다던가 하는 식의. ‘별을 여자라든가 심지어 아이를 만드는 여자라는 식의 왜곡 또는 일시적인 흥미유발을 위해서 사생활이 망가지는(?)일을 서슴치 않는 것을 보아왔다. 남의 이야기를 훔쳐보기 좋아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라고 치더라도 소설가라면 흥미를 유발시키는 사적인 것보다는 문학으로서의 혹은 소설로서의 관심이 진지하고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어쨋거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읽는 중에 다른 소식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가 중앙일보에 <즐거운 나의 >(?-, 제목을 잊어버렸다^*^)그의 실제경험을 토대로 가족 대한 새로운 모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소설을 연재하기로  계약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럴 듯해 뵈는 명분이다. 이건 물론 생각이다. 그러나 기사를 보는 순간 다시 내가 했던 염려가 강하게 떠올랐다. 지난 염려는  그의  친정식구들이나  남편, 아이들이 대상이었고 중에서도 아이들이 가장 염려의 대상이었다. 큰아이가 아무리 엄마를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말하며 떠드는 사이 어느 구석엔가는 상처가 입혀질 있을 것이며,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여성으로서, 특히 어머니로서 자식의 보이지 않는 면까지 지켜주고 보살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염려의 가장 대상이 남편일 같았다. 세명의 남편 중에 어느 누구일진 몰라도, 어느 누구라해도 개운하지 않을 것이다. 순조롭지 못할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테러당하는 기분일수도 있겠고 테러를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염려는 사람들을 걱정하는 것도 있지만 소설가 공지영에 대한 일말의 실망감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아니나 다를까? 기사를 읽고 며칠 돼서 다시 그에 대한 기사가 떠올랐다. 남편이 법원에 연재중지를 요청했다는 소식이다. 이혼을 결혼기간 동안에 있었던 모든 일에 대해서 거론하지 않기로 약속했었다는 남편의 주장도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그런 미끼로 신문연재를 부추킨 신문사나 그에 응한 공지영의 처신이 그닥 좋아보이지 않으면서 그의 당당함에 대한 호의가 반감되었다. 따라서 용감함은 무모함이거나 경솔함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또한 인터뷰기사중의 다른 사실도 떠올랐다. 그는 어느 인터뷰 자리에서 대선배 소설가인 박완서씨와 함께 자리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박씨가 공지영씨는 얼굴이 이뻐서 인기가 있는 같다 말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밝힌 말이다. 물론 박씨가 정말 그런 의미로 말을 것인지는 알아봐야 일이지만 설마 그런 의미로 말했을까 했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일련의 세상 소문을 들을 후로는 어쩌면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쩌면 그렇게 떠벌려지는 것을 노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상업성을 노리는 신문사로서는 그러고도 남을 일이다. 그렇다해도 그것은 신문사의 입장이지 공지영의 입장에서 취할 일은 아닌 같다. 신중을 기해야 일이다. 

아직 시작도 하기 전에 들이닥친 연재중지처분에 대한 결과는 어떻게 날지 모르지만,  아무리 자신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그것을 드러낼 때는 이야기와 관련된 주변의 사람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교훈으로 새길 밖에 없다. 아울러 그가 특별한 사생활이 아닌 소설가로서 독자들의 관심을 받았으면 한다. 

이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돌아가자.

 

<무소의 ….> 읽었다. 읽는 사이 Ari 돌보는 일로 다른 때와는 달리 터덕거리느라 시간을 많이 끌기도 했고 중간중간 공지영의 사적인 소식들을 만나며 읽었다.  어쨌거나 읽었다. 그런데   읽고나서의 느낌은 아니 읽으면서도 내내 통속적인 이야기 자락을 들은 기분이다. 

 

통속적인 소설을 읽은 기분이 드는 것은 왤까? 

 

그는 1988 창작과 비평을 통하여 <동트는 새벽> 발표한 이래 여러 권의 소설을 발표했고 발표할 때마다 상당한 반응을 불러낸 인기작가가 됐다. <무소의 ….> 영화화했고 이번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영화화되면서 세상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무소의 …> 읽고나서의 느낌은 그의 이런 말하자면 통속적인 때문이 아닐까 하는 짐작이 들기도 했다. 내가 기대했던 문학성을 따지는 면으로는 기대에 못미쳐서 약간 실망스럽긴 하다.

 

우선 표현기법이나 문장에서도 관심을 끌만한 특이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어느 부분인가에서는 두어군데 논리가 맞지 않거나 이해하기가 애매한 표현이 있기도 했다. 그건 그렇다치고, 일단  소설의 내용이 매우 통속적이다. 

 

<무소의 …> 1993 이전에 쓰여진 작품이다. 뒤에 묶여있는 작가의 말이 1993 1 10일에 걸로 되어있으니까.

 

지금으로부터 14 전이다. 어찌보면 이미 시효성이 지나버린 글인지도 모른다. 문학성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못한 것이 그때문일까? 우리 시대의 무시당하는 여자들의 그렇고 그런 이야기여설까? 

그렇고 그런 얘기?

 

여자여서 차별받고, 여자니까 참아야 하고, 여자라는 이유로 소외당하는 우리시대 여성들의 보편적인 , 여자들끼리 모였다하면 흔히 이야기의 주제가 되는 남편들의 , 그저 수다로 끝나고 마는 그런 이야기이다. 결혼해서 남편에게 먹히고 아이들에게 받쳐지고 그러다보면 대학시절에 꾸었던 많은 꿈들과 포부들과 가능성들은 사장(死葬)되어버리고 왜소해지고 퇴색해버린 아줌마가 되는 와중에 남편들은 출세를 향해 나가고, 마치 사회생활의 수순처럼  다른 여자들과 바람을 피우고…. 대개는 그러려니 하고 눈감아버리고 살아가고 만다. 중에 간혹 다시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볼까 애써보는 사람도 있지만 성공하기엔 너무 어렵게 되고 오히려 몸부림은 피투성이가 되고, 부질없는 몸부림으로 끝날 제자리 걸음이고 그러는 사이 자신을 더욱 망가뜨리게 되기 일쑤다. 

나는 여권운동가는 아니다. 그러나 인간 혹은 인권운동가이고는 싶다. 여자라는 이유로  많은 것을 뺏기고 많은 기회로부터 소외당하는 , 나의 삶도 그러했으니까.

 

진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피나게 노력하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 아무도 손잡아 주지 않는다.

 

가족? 봉건적인 사고에 쩌들어있는 가족은 용납해주지 않는다. 오해려 상처를 만드는 제공자일뿐이다.

 

친구? 없다. 그런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거나 모색할만한 여자친구는 불행히도 없다.

 

여성?  역시 아니다. 동지여야 여성들이 오히려 방해물일 때가 많다.

 

진창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 벗어나서 새로운 삶을 산다면 삶이 현실적으로 비록 풍요와 담쌓은 것이라 해도 그것은 대단한 성공이다. 자신의 의지를 구현할 수있는 자유가 있으니까. 자신의 의견으로 삶을 살아낼 있으니까. 그러나 대개는 순응하고 살면서 평화로워보이는 삶을 택하지만 평화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평화는 아니다. 강요된 순응이고 위장된 평화이다. 여성 자신이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한다 해도 그것은 변명 내지는 합리화이기 일쑤이다. 그래서 나는 벗어나려다 무릎이 꺾이더라도 그것이 자신에게 충실한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무소의 ….> 나오는 혜완, 영선, 경혜는 여성은 대학은 나온 장래가 촉망되는 우리 시대의 인테리 여성, 소위 중산층의 여성이다. 그렇지만 여성의 삶에서는 없었다. 대학다닐 때는 모두 나가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연애도 했고 결혼도 했다. 그러나 혜완은 직장생활을 병행하는 남편의 뜻을 우기고 출근하다가 아이를 교통사고로 잃고나서 이혼을 했고, 영선은 꿈에 부푼 프랑스 유학도 하고 자기가 씨나리오로 남편이 대신 영화감독이 되어 유명한 감독이 되었는데 다른 여자들과 자유롭게 사귀며 출세를 즐기고, 경제적으로 빵빵한 집안의 아들과 결혼한 경혜 역시 남편의 바람기로 갈등을 느끼지만 세상에 드러나는 이혼은 절대로 안되니까 너도 보이지 않게만 즐겨라 하면서 계속해서 바람을 피워나가는 남편으로부터 받는 굴욕을 참아내며 살아가고 있다.

 

아이를 잃은 죄를 멍애로 짊어지고 있는 혜완. 그나마 대학생 꾸었던 작가가 되어 있지만 너무나 힘겹게 세상과의 대결을 벌여나가면서 남편의 후배와의 불안한 사랑에 빠져 갈팡질팡 하고, 남편의 배신으로 자해(自害) 하며 저항하던 영선은 결국 자살해버리고, 남편에 대한 복수로 혼외정사를 적당히 모색하며 살아가는 경혜 역시 온건하지 못한 방법으로 여자의 운명에 순응해버리는 그야말로 통속적인 이야기다. 바로 이런 통속적인 이야기라서 흥행에 성공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래봤자 니가 어쩔건데?’
신문팔이
소년이 버스 안에서 같잖게도 성추행을 하며 씨부려 던진 마디면 충분하다.

 

작가의 말에 인용된 노신(魯迅) 글에서도 표현되고있다.
집은 뛰쳐나간 노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노신이
학생들에게 던진 질문이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아마도 노라는 굶어죽었거나 창녀가 되었거나 그도 아니면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겁니다

노신이
머뭇거리는 학생들에게 대답이다.
개의 에피소드면 충분하지 않은가. 

아무리 세기가 바뀌어 21C 되었다해도 아무리 여권이 신장되었다해도 현실은 언제나 여자에게 냉정하다. 
그러니
물소의 뿔처럼 혼자서 해낼 밖에 없다.  
이것은
여성의 삶에 있어서의 여성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제각각 자기의 운명 앞에서 그런 것이다.

 

가지 얘기하자면, 실제 자기의 생활을 기반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것은 소설가로선 약점이 아닌가 한다.

 

() 다른 아이를 혼자 키우며 살아온 그의 노고는 더이상 말해 무엇하랴.그러나 굳이 그런 사실들을 들추어내야 했을까?
그저
묵묵히 덮어두고 살았더라면 좋았지 않을까?
지난 아쉬움을 다시한번 반추하면서, 아이가 이해한다고? 특히 십팔센가 되는 큰딸은 벌써 엄마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격려해주는 친구같다고? 과연 그럴까?
과연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난 사생활이고 아이의 인격과 자존심, 속마음과 관련된 부분이고, 공지영 자신의 극히 내밀한 사적인 공간이므로 그대로 보호해야 하는 좋지 않았을까? 
나는
안다. 나도 딸을 기른 엄마니까.

 

아이에게 그런 호응을 얻어내기 위해서,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하고 변명하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지성(知性) 바탕으로해서 그럴 듯하게 포장된 위선과 위장과 보이지 않는 강요가 작용했었음을 반성하라고 권하고 싶다.
마치
아이의 단점이나 잘못 가는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때로 과분한 칭찬을 하듯이.
그러나
그것은 긍정적인 면으로 활용하는 소위 교육적인 것일 있지만 자신의 삶에 대한 변명이나 자신의 행동에 대한 합리화를 위해서 것은 아이의 삶에 상처를 주는 교활하고 지능적인 수법이다. 자체를 알고 저지르는 수도 있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것이 최선의 방법으로 생각하고 저지르는 수도 있다. 알고 저지르는 것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면 것이고, 모르고 저지르는 것은 사람의 지적 수준이라고 나는 단호하게 말하고싶다.
나만이
아니라 자식을 길러본 엄마라면 누구나 있는 일이다. 

근간에 계속 뉴스메이커가 되고있는 것이 오버랩 되면서 내가 처음 읽은 그의 소설이 통속적이라는 느낌으로 남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엔 공지영이 앞으로는 가능한한  사적인 생활은 내보이지 않도록 덮어두고, 진정한 문학으로서, 소설 쓰기에서  무소의 뿔처럼가서 성공을 하기를 바란다.

 

그런 기대를 하면서 나는 공지영의 다음 작품들을 읽을 것이다.

 

 

(2007-02-25) 토론토에서  (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