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오래되어 매가리없는 이야기

천마리학 2007. 4. 28. 05:26

 

 

 

여울물연재시작시 사진

 

 

 
      오래 되어 매가리 없는 이야기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 > 上 下를 읽고.
 
 
 
책을 덮는 순간 내가 그에게서 뭘 기대했던가?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생각은 책을 덮는 순간보다는 좀 더 일찍, 하권을 읽기 시작하여 중간쯤에서부터일 거다. 그 생각은 실망스럽다는 의미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한윤희가 남긴 편지글로 이어지던 것이 어느 부분에서부터 갑자기 한윤희가 화자가 되어 소설을 이끌고 있는 부분도 소설문법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야기 자체가 지루했다.

황석영. 
나는 황석영이라는 이름에 너무 기대를 한 것 같다.
적어도 대한민국의 작가를 대표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그만한 명성을 갖고 있지 않던가.

상권에서는 감옥이라는 특정지역의 생활들이 요즘이야 영화나 소설에서 많이 보아서 새로울 것 없지만 그래도 현실과 차단된 생활공간이 주는 호기심이 있었다. 또 그가 정치범으로 감옥행을 치룬 전적도 있기 때문에 좀더 소설적으로 예리하게 풀어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절로 되었다. 자진 방북이라든지 독일행이라든지 게다가 지금도 영국 어딘가에 자리하고 소설쓰기에 전념하고 있다는 뉴스를 들었으니까 그는 어쨌거나 돌출된 사람이고 독특한 작가이고 특별한 경험을 가진, 소설가로서는 행운아라는생각이 든다. 게다가 걸출한 입담도 가지고 있는 저력이 있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쓴 글로서는 너무나 평이한, 너무나 안이한 소설로 보여진다.
 
 
자신도 모르게 아이를 낳아 17년 동안 기른 한윤희, 더구나 암으로 이미 이 세상사람이 아닌 연인에 대한 뼈저린 통한이 황석영적으로 뭔가가 하권에서 펼쳐지려니 하는 기대를 하면서 읽었다. 그런데 아니다.
그런데 하권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한윤희가 갑자기 편지글에서 튀어나와 화자가 되어버린 것도 이상했다. 이점에 대해선 내가 모르는 소설의 특별한 문법일가? 그렇다하더라도 나는 줄곧 거슬렸다. 자꾸만 글쓰기의 기본문법에 어긋난다는 껄끄러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것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나의 학교 교육탓인가? 아니면 나의 융통성없는 무식탓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후반부에서는 다시 편지글로 돌아섰다. 그런 형식의 껄끄러움이야 또 그렇다치고  어쨌던 거기 담긴 이야기는 내내 지루했다.
 
왜 그렇게 지루하게 한윤희의 독일생활 이야기를, 베를린 장벽 무너진 이야기를 들어야 했을까?  작중의 인물 한윤희는 소위 인텔리 여성이다. 화가이면서 알게 모르게 의식화 되어있는 사람이다. 남자(오현우)도 모르게 아이를 낳았으니 그 남자에 대한 사랑도 지극하다. 지극할법하다. 그러나 용감하게(?) 자신의 길을 간다. 화가로서의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하여 아기를 친정에 맡기고, 또 동생의 호적에 입적시켜 기르게 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난다. 떠나서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가며 남자도 사귀고 화가로서의 영역도 넓힌다. 그러다가 암에 걸려 죽으면서 남긴 편지글, 그 편지글로 하여 무기수에서 감형되어 17년만에 나온 남자 오현우에게 전달된다. 

 

자, 이 남자의 통한이 얼마나 클까? 이 여자의 통한이 얼마나 클까? 읽는 사람의 가슴이 미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감정이다. 소설에선 담담하다. 너무나 느슨하다.

 

소설속의 여자는 아이를 낳긴 했어도 사실 아이를 직접 양육하지 않았고, 아이때문에 자신을 희생하는 어머니도 아니었다. 자기 인생에 대해서 용감하고 강한 현대여성이다.  
소설속의 남자는 운동권이긴 했어도 핵심인물도 아니고 대단한 이슈를 가진 남자도 아니다. 그저 그 시대의 운동권 학생들의 부류에 속해서 그 물결에 휩쓸린 주변적 인물이다. 
그 두 사람 사이의 사랑 역시  흔히 말하는 '목숨 건 절절한 사랑'은 아니라고 본다. 어쩌다가 우연찮게 만나서 함께 지내고 그러면서 아이가 생기고, 말하자면 한때의 시대적 상황이 두 사람의 운명을 묶었다고 할까. 그러나 두 사람은 그 운명에 끌려가지는 않았다. 이내 각각의 의사대로 자기들의 길을 가면서 되돌아본다고 할까? 담담하게 되돌아보면서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그래서 소설속의 인물들이 느슨하다는 얘기다.

결국 이 소설은 황석영씨가 겪은 감옥생활이나 북한방문이나 독일망명 등 남다른 경험을 토대로 한 소설임은 분명한데, 이 작품은 소설이라기보다는 그가 자신의 그 체험들을 잊지 않으려고 기록하는 정도의 의미밖에는 없다고 생각되었다. 소설이 아니라 소설의 이름을 빌어서, 황석영이라는 이미 평가받고 있는 이름에 편승해서 자신의 어느 한 특정시기의 체험을 기록해 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 불쾌하다.
 
물론 이런 독후감은 나 개인적인 것이긴 하다.
그러나 소설가 더구나 인정받는 소설가로서 독자에 대한 신뢰와 자신의 관리를 위해서도 작품을 남용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소설의 주인공 오현우, 그리고 그의 여자 한윤희의 삶을 통해서 보여준 게 뭘까?
의식화 혹은 민주화운동을 한 시대적 이슈가 얼마나 진지하고 또 얼마나 힘든 희생이었던가 하는 것을 말하려면 좀더 치중하던지. 아니면 수배인물인 오현우를 숨겨주는 일로 인하여 얽혀든 한윤희의 평탄치 못했던 삶이 한 시대의 증언이 되려면 좀더 강하게 조여주는 구성이 있어야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래된 정원'이라는 말이 품고 있는 남다른, 은밀한, 우리들의 숨겨진 저 아래 갈아 앉아있는 특별한, 그런 추억이거나 아니면  작가가 후기에서 밝힌 무릉도원이나 샹그릴라 같은 희망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결론은 작가자신이 소설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생애의 한 부분을 기억해두기 위해, 혹은 그 기간 동안의 자신의 행동을 변명 내지는 합리화하기 위해 약간의 스토리를 붙여 소설이라고 이름 붙여놓은 기분이다.
아무튼 오래전의 소설이라서 그런가보다. 그 후의 작품은 그러지 않겠지. 최신의 작품을 읽으면 괜찮으리라는 생각 자체가 실망이다.
<오래된 정원>은 오래 된 정원만큼 깊숙하고 묵직한 비밀의 추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래 되어 김빠진 이야기처럼 되어버렸다.
내가 그에게 너무 많은 것을 은연중에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작품에서 회복되기를 바란다.
 
 
(오래된 정원 상 하/황석영(黃晳暎) 장편소설/창작과 비평사/2000년 5월 발행)
*사실 독후감을 쓸까 말까 하다가 일단 읽었다는 기록을 위하여 쓸 생각을 하느라고 늦었다.^*^
<2007년 3월 토론토에서><18매>

황석영 소개;1943년 만주 장춘(長春)에서 태어나 고등학생 때인 1962년 단편 <입석부근(立石附近)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받으면서 등단,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탑>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본격화. 저서로는 소설집 <객지>(1974년), <북망, 멀고도 고적한 곳>(1975년), 심판의 집>(1977년), <가객(歌客)>(1978년), 장편소설 <장길산>(1984년, 10권), <무기의 그늘>(1988년, 전2권), <희곡집 <장산곶매>(1980년), 광주항쟁기록<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1985년), 등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