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배롱나무 대신 무궁화를, 시 '그리움의시'

천마리학 2018. 11. 3. 04:02




배롱나무 대신 무궁화로 * 권 천 학

시인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이사

 

 

모닝커피 타임, 커피가 더 좋아지는 초가을 아침, 커피를 내리며 저만큼 뒤란의 무궁화 꽃과 눈을 맞춘다. 우리집 뒤뜰과 뒷집 사이의 경계에 서있는 우리집 측백나무 생울타리 너머로 조랑조랑 분홍꽃송이를 매달고 있는 뒷집의 무궁화나무, 제법 키가 크고 무성해서 우리집 측백나무를 넘어다볼 뿐만이 아니라 가지사이로 손을 뻗어 초록 사이사이에 꽃을 올려놓고 있다. 초여름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하여 초가을까지 피고 지면서 여름 내내 눈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내린 커피잔을 들고 발코니로 나간다.


카나다에서 사는 동안 정원을 가꾸면서 몇 가지 한국의 꽃나무를 심어 가꾸고 싶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배롱나무였다. 토론토에 살 때나 따뜻하고 비가 많은 날씨덕에 식물이 풍부한 밴쿠버에 살 때에나 화원(花園)과 꽃가게를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했다. 결국 카나다엔 배롱나무가 없다는 결론을 갖게 되었고, 한국에서 가져와야겠다는 궁리를 하면서도 식물(植物) 반입이 금지되어 있어서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고향집 뜰과 향교(鄕校)의 뜰에 있던 해묵은 배롱나무, 묵은 티 나는 기와지붕과 잘도 어울렸고, 꽃이 피기시작하면서 집안분위기를 바꾸어놓았다. 배롱나무를 생각하면 향교의 헌(獻官)이었던 아버지의 모시옷도 떠오른다. 줄기를 덮고 있는 피부의 얼룩무늬가 마치 향토예비군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구불구불 잔가지들이 바람결에 흔들릴 때마다 붉은 꽃물이 번져 내가 간지러워지곤 했었는데, 후에 배롱나무에게 간지럼나무라는 별명이 붙었음을 알았을 때 나와 나무의 감정이 통했다는 생각에 신기했었다.

숭얼숭얼 끊임없이 피어나는 꽃숭어리들이 마치 그리움만 같았다. 꽃송이들의 숭얼거림과 간지럼 타던 그 시절의 감상을 섞어 배롱나무 시('나무 백일홍-그리움의 시')를 쓰기도 했었다.

온몸이 숭얼숭얼 가려운 날은 / 누군가, 나를 끝끝내 못 잊어 하고 있음이다....’


그 외에도 목백일홍이라고도 한다. 여름 내내 피고지고 피고지고, 백일(百日)동안이나 피는 나무라서 붙은 별명이다. (100)은 많음을 의미하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배롱나무를 기르고 싶은 이유는 여름 내내 허공을 물들이는 꽃을 보고 싶어서였다.

매미소리 들리는 대청마루에 앉아 부채질을 하면서 바라보던 배롱나무 꽃, 꽃을 보면서 더위를 잊어버리는 일이 얼마나 운치 있는 멋이던가.

지금 나의 뜰에는 봉숭아, 분꽃, 백일홍, 더덕, 나팔꽃, 싱건이, 비듬, 호박, 들깨 등 한국의 꽃 친구들이 많지만 그 꽃 친구들 사이에 배롱나무가 없어서 늘 아쉽다.

배롱나무 꽃을 아쉬워하던 올여름 어느 날, 뒤뜰 울타리에서 피어나기 시작한 무궁화나무와 안부를 나누다가 문득 무궁화, 너도 여름 내내 피고 지고 피고 지고하잖아!’ 혼잣말처럼 뇌었다. 그 순간, 번개처럼 스쳤다. ‘배롱나무 대신 무궁화꽃으로!’

그것은 단순히 우리나라 꽃’ ‘은근과 끈기의 상징이라는 틀에 박힌 생각으로만 보아온 무궁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생각의 변화에 닿는 순간 무궁화는 배롱나무가 되었고, 그때부터 뒷집의 무궁화나무는 나의 나무가 되어버렸다. 그 후 어느 날엔가 딸도 여름 내내 무궁화 보는 재미가 쏠쏠해요.”하는 소리를 듣고 멋진 용단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lilac hibiscus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캐나다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유일한 한국사람인 우리집, 이태 전 이집으로 이사 오자마자 무궁화를 가득 심어 우리집의 특징으로 삼으려고 작정했다. 이사 온 지 삼년 째인 지금, 앞뜰과 뒤뜰 여기저기에 2년생 무궁화가 자라고 있다. 첫해에 소설 쓰는 아는 사람이 자기집에 오래 된 무궁화 나무가 있는데, 해마다 떨어지는 씨앗에서 돋는 어린 나무들을 뽑아내느라 애를 먹는 지경이니 몇 그루 주겠다고 하더니, 만나기로 한 어느 모임에서, 차의 트렁크에 싣고 나왔다고 했다. 그때 내가 차가 없음을 알고 머뭇거리는 기색이더니, 잠시 후 들고 가기 힘 들겠다 싶어서 다른 사람에게 주어버렸다고 했다. 그사이 나는 돌아갈 때 누구 동행할 사람을 알아보는 중이었는데, 이미 차를 가지고 온 다른 사람이 원해서 그 사람의 차 트렁크에 옮기기까지 했다니, 좀 허망했다. 결국 나는 준다는 소리만 듣고 실제나무는 보지도 못했다. 그해의 이맘때쯤, 동네 이집 저집에서 눈에 띄는 대로 씨를 받아 뿌린 어린 무궁화들이 지금 나의 뜰에서 자라고 있다.


우리집 뜰에 무궁화를 심으려는 것은 내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이고, 무궁화가 우리나라 꽃이기 때문이다. 사실 무궁화가 국화(國花)라는 법적 공인을 받은 것은 아니어서 정식으로 국화는 아니다. 비록 법적인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지만 오랜 동안 우리민족,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꽃으로 인식되어왔기 때문에 법적지위와는 상관없이 떠나와 살고 있는 나의 마음속엔 나라꽃으로 심어져있다. 고국 떠나 사는 모든 교민들도 비슷한 마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캐나다에도 곳곳마다 무궁화가 눈에 띄고, 우리 동네 역시 무궁화가 더러 있다. 캐나다만이 아니라 북미나 유렵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중에도 무궁화가 자주 눈에 띄는데 한국에 살 때 보아오던 무궁화보다 색상도 모양도 훨씬 다양했다. 무궁화의 강인함과 뛰어난 적응력 때문이리라. 특히 스위스의 친구 스잔의 집 정원에서 분홍과 보라의 꽃을 피우던 여러 그루의 무궁화가 생각난다.


처음에는 순진한 애국심으로 심으려던 무궁화가 이제는 기르고 싶어 한 배롱나무 대신 여름을 밝혀주는 몫도 하게 된 셈이다. 3년이면 꽃이 핀다니 내년엔 무궁화가 가득 피어 날 터이고, 그때쯤엔 커피타임이 더욱 풍성해지리라. 한여름보다는 꽃송이 숫자가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하다.

눈길을 주고받던 무궁화나무 가지가 가늘게 흔들리고 꽃송이들이 살랑거린다. 커피냄새를 맡고 바람이 찾아온 모양이다.

낚아 챈 늦여름 바람 한 줌, 무궁화 꽃의 분홍빛 윙크도 한 스푼, 가끔씩 들려오는 새소리도 한 움큼 타서 마시는 초가을 아침의 커피 맛이 짜르르 혀에 감긴다.

 




그리움의 시

        -나무 백일홍

 

 


배롱나무꽃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내 심장에 열이 나고

온 몸이 숭얼숭얼 가려운 날은

누군가끝끝내 나를 못 잊어 하고 있음이다

불치의 열병으로

온 몸을 뒤덮는 얼룩반점

치솟는 열정을

풀잎만으로는 견딜 수 없어

휘며 다지며 굵어진 기둥

 

한 여름에도 더위 먹지 않음은

잎 새 마다 바람 거느릴 줄 앎이다

 

가지마다 귀(내걸어놓고

문턱 안에 앉아 있음은

뜨락을 지나 나를 찾아오는

누군가의 발소리를 듣기 위함이다

 

일손도 잡히지 않고

유난히 귀가 가려운 날은

누군가아직도 썩지 않은 마음을

나에게 보내고 있음이다

 

나의 심장에 열꽃이 돋고

온 몸이 스멀스멀 가려운 날은

누군가끝내 나를 버리지 못하는 이의 그리움이

숭얼숭얼 피어나고 있음이다


 

-2시집 [텃밭에 몰래 심은 나의 사랑은]에 수록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