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저작권2-문학작품과 양심

천마리학 2013. 6. 28. 09:33

 

 

문학작품과 양심 * 權 千 鶴

-저작권2

 

 

 

조용필 씨와 싸이의 저작권 관련 글을 쓰면서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을 이야기 했지만 토론토도 마찬가지다. 이곳에서 발행되는 모 일간지들이 연속 연재하는 인기소설의 한국의 저자와 나는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다. 한 작품 연재가 끝나고 이어서 두 번 째 작품연재에 들어간 것에 대해서 썩 좋은 일이 아니라고 편집담당자와 친구에게 충고를 했지만 한 번 시작된 일이므로 다음엔 작가를 바꾸겠다고 하면서 넘어갔다. 그런데,

어느 날 갤러리아에서 이것저것 집어오는 신문들 속에서 우연히 다른 일간지와 주간지에도 그의 다른 작품들이 연재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에게 다시 충고했다. 볼썽사나운 것만이 아니라 함부로 싸구려가 되는 것 같아서였다. 이곳의 분위기나 상황을 전혀 모르는 탓에 되는대로 작품을 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뜻밖에도 내 친구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본인에게 허락은커녕, 통보도 없었다는 것이다. 마치 나의 시가 나도 모르게 지하철 시청역에 걸려있고, 뉴스매체나 잡지의 기사에 인용되는 것과 같다.

 

 

 

 

 

결국 나는 혀를 차는 그 친구를 진정시켜야 했다. 그저 조용히 보고 있다가 이번에 마치면 그걸로 종 치는 것으로 끝내고 마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이왈저왈 해봤자 이곳 신문들은 궁색한 변명으로 땜빵질 할 것이고, 변변한 사과조차 의심스럽고, 내 친구에게 속 시원한 보상이 갈 리도 만무해서다. 나 역시 토론토시민인고로 토론토의 격 낮아지는 일로 작은 소란도 바라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창작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세상물정에 어둡다. 더구나 저작권이 거론조차 되지 않았던 80년대, 나 역시 작품도둑을 맞은 경험이 있어서 조용필 씨가 이야기가 더욱 가슴에 닿았다.

노인문제를 다룬 드라마 [저녁노을 붉은 꽃]의 대본이 프로듀셔에게 배당되어 촬영계획을 조정하는 중이었다. 윗선에서 원고를 배당받은 프로듀서가 만나자고 하더니 두 가지 어려운 점을 토로했다.

하나는 극 중에 노인의 관을 사다리차로 운반해 내리는 장면을 고쳐달라는 것. 그런 장면을 촬영할 수 있도록 아파트를 빌려주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 드라마를 쓰면서도 관을 떼매고 고층아파트의 계단을 이리 쿵, 저리 쿵 부딪혀가며 내려오는 장면을 생각 안 한 것은 아니었다. 엘리베이터도 물론 생각했다. 하지만 급속히 현대화되어가는 속도 속에서 삭막해져가는 노인의 삶과 죽음을 상징화하는 하는데 오히려 더 진부하고 메시지전달이 더디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이삿짐을 올리고 내리는 사다리차를 이용하도록 한 것인데 그걸 고쳐달라니. 선뜻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장소를 빌려주지 않는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론 그런 줄로 알았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오십대 중반의 노인이 임신한 설정이었다. 우연히 사귀게 된 남자노인과의 사이에서 임신을 한 것이 아들에게 포착된 내용인데, 오십대가 임신한다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 저작권만이 아니라 사회의 인식도 그 정도였다. 고쳐 쓰지 않고 차일피일 시간을 끌고 있다가 그냥 희미해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어느 만큼 시간이 흐른 뒤 그 작품이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모양을 바뀌어서 방영된 것을 뒤늦게 알았다.

 

또 다른 나의 작품에서도 헛김나는 경험을 했다.

이름이 꽤 알려져 있는 모 선배드라마 작가가 만나자고 했다. 자기와 짝을 맞추고 일하는 프로듀서의 캐비닛에서 꺼내온 나의 대본을 자기가 각색해서 촬영하려고 하는데, 마지막 장면을 수정 해달라는 것.

폐병 3기의 남자주인공이 애인도 가족도 버리고 떠나와 바닷가 텐트 안에서 홀로 회생을 염원하며 접었던 천 마리 종이학,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머리맡에 쌓여있던 종이학이 한 마리씩 텐트를 벗어나 하늘로 진짜 학()이 되어 날아가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환상(幻想)이었다. 나는 바로 그 장면은 내가 추구하던 영상으로 쓰는 시()’라는 의지를 실현하는 것으로 심혈을 기울였는데 바로 그 마지막 장면을 바꾸자는 것. 이유는 당시의 기술로는 우리나라에서 촬영할 수가 없으므로 일본에 가서 촬영을 해 와야 하는데 그러자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제안은 내가 주인공으로 지목한 주연배우 박근형씨를 바꿔달라는 것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아마 그의 주가가 높아서였거나 아니면 프로듀서와의 사이가 안 좋았거나 둘 중의 하나였거나, 아니면 둘 다였을 수도 있다.

 

 

 

그 요청에서도 나는 물러설 수가 없었다. 특히 마지막장면, 영상으로 쓰는 시는 양보할 수가 없었다. 얼마쯤 시간이 흐른 후 우연히 그 내용이 달리 각색되어 방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헛웃음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항의할 생각을 못했다. 더구나 그때는 대중문화인 드라마를 하면 돈은 벌고 쉽게 이름은 날리지만 순수문학을 망치게 된다는 한 선배의 충고 때문에 이미 내가 방송가에서 떠난 후였다. 그 땐 그랬다. 저작권만이 아니라 대중문학과 순수문학이 엄연하게 가름되는 시절이기도 했다.

최근에 한국의 동료시인으로부터 자기 카페에 나의 시를 올리겠다는 요청을 받았다. 친분이나 역량으로나 잘 통하는 시인이라서 반갑게 오케이, 그런 걸 뭘 물어보기까지 하느냐고 했더니 대답이 묘했다. 요즘은 저작협회에서 저작권 침해여부를 알아내는 작업을 가동하고 있어서 허락 없이 시가 사용한 것을 적발해주면 500만원의 벌금이 부과된다는 것. 그 때문에 시 파파라치가 생겨서 눈에 불을 켜고 웹사이트를 들쑤시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나마 읽히지 않는 시의 보급을 막아서 내 친구 시인은 저작권협회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했다. 친구시인의 말을 새겨듣지 않을 수 없다.

시가 읽히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한편 시가 보급되는 길을 막는 저작권행사. 어찌 보면 모순일 수 있다. 그 틈새로 읽힐 시들은 읽히지만, 어찌됐건 문학작품은 그 작가가 영혼을 불어넣어 빚어낸 분신과 같다. 당연히 합당한 대우를 해주는 문화적양심이 상식화되어야 한다. 그것이 불면의 정신노동으로 빚어지는 창작품에 대한 예우이면서, 문화가 이 사회를 밝히는 공헌에 대한 보상이기도 하다.

<201342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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