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어디로 가란 말인가?

천마리학 2013. 6. 23. 08:42

 

 

 

어디로 가란 말인가? * 권 천 학

 

 

요즘 늙은 부모들이 자식을 상대로 재산 반환 요구를 하는 소송이 많고, 그 소송에서 부모가 승소하는 예는 매우 드물다고 한다. 이유는 계약서가 법규대로 하자 없이 작성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설령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더라도 자식의 부양을 받을 권리가 부모에겐 있다. 따라서 자식에겐 늙은 부모를 부양할 의무가 분명 있다. 그것이 인간법 위의 하늘법이다. 그런데, 듣기에도 민망한 종이계약서를 작성하다니, 서글프고 부끄럽다.

계약조건은 부모 모시기. 명문화(明文化)되어 있진 않지만 쌍방이 이미 잘 알고 있는 묵시적 약속이다. 자식이 계약이행을 하지 않는다. 부모는 괘씸한 마음에 이어 살아온 인생 전체가 구렁에 빠지는 기분이 든다. 개선의 여지가 없다. 다시 일하고 돈을 벌 능력도 힘도 없다. 짧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목숨을 부지하려면 재산을 되돌려 받아야겠다. 이제나 저제나 자식 눈치를 보면서 전전긍긍하다가 결국은 재산반환 소송을 한다. 마지막 비참한 구걸행위다. 소송에서 진다. 발등을 열 번 찧고 싶은 마음이다. 부끄럽고 창피해서 어디 하소연 할 수도 없다. 깊은 한숨으로 사그라들어야 하다니. 목숨이 웬수다. 휜 허리가 더 휘고, 마음속 깊은 곳엔 천길 나락이 패인다. , 어디로 가란 말인가?

계약 당사자로 존재하는 부모와 자식,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을까? 왜 그렇게 되었을까?

 

 

 

 

 

 

8,90년대쯤, 대도시의 구()나 소도시에 청소년 회관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사회활동을 하고 있었고, 검소한 생활, 한글 사용, 국산품을 애용 등 건전한 사회로 가는 캠페인과 계몽에 열심이기도 했다. 지역마다 청소년 회관이 우선적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 해당부서에 건의했다. 청소년 회관보다 먼저 노인회관을 건립하자고, 그것이 경로사상을 자연스럽게 교육하며 성인(成人)인 우리의 본분도 지키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소위 동방예의지국으로서도 당연히 갖춰야 할 모습이 아니겠느냐고. 아무도 접수하지 않았다. 공감하고 동조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개의 관료들에겐 실적위주의 전시행정이 더 중요했고, 굳어진 대가리도 문제였다. 모두 왼쪽 길로 가는데 오른쪽으로 가야한다! 하고 주장하거나, 모두가 예스! 할 때 노! 하는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점, 주민들 앞에서 너그러운 표정으로 웃는 얼굴 뒤편에는 반듯이 시커먼 저의(底意)의 음흉한 또 하나의 얼굴이 있다는 점, 등등. 이래저래 그때도 나는 참 세상 많이 배웠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노인회관이나 노인을 위한 시설이 곳곳마다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노인을 위한 시설은 청소년을 위한 시설에 비해 취약하거나 미비하다. 그것은 차고 넘쳐 이루어진 순서일 뿐, 과감히 행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나로서는 세상 좋아졌다고들 하는 사람들처럼 마음 놓고 좋아진 세상이라고 거들 수가 없다.

천륜(天倫) 또는 인륜(人倫)이라고 일컬어왔던 관계가 바로 부모와 자식 관계다. 하늘의 인연으로 정해진 관계,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 지켜야겠다고 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저절로 있다. 본능이다. 피의 내림이고 몸과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 그런 것들이 무시되고 거꾸로 가는 예가 있어 우리를 끔찍하게도 한다. 그러나 꼭 살인이나 폭행을 해서 놀라게 하는 일만이 아니라 그저 일상적 관계에서 다반사처럼 저질러지는 잘못된 일이 있다는 것을 주지(主知)해야 한다. 살인이나 폭행은 사고, 정신질환 등등의 돌연변이 같은 사고는 일시적이고 돌발적인 현상으로나 치부할 수 있지만, 일상적 관계에서 별 스스럼도 없이 저질러지고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하여 세태(世態)’라는 이름으로 덮어버리기 쉽다. 대가리 굳은 관료와 다를 바 없다.

 

우리 모두는 부모이면서 자식이기도 하다. 세상이 아무리 바뀐다 해도 부모가 자식 될 수 없고 자식이 부모 될 수는 없다. 그런데 무뎌진 우리의 인식 속에서 계약당사자가 되어 이제 남은 것은 계약불이행이라는 논리만 남았다. 그 간단한 논리에서 졌다. 자 어디로 가란 말인가?

하긴, 들으면 참 한심한 이런 일들이 어제 오늘 일 만도 아니다. 한두 번 있었던 일도 아니다. 또 멀리 고국에서만 있는 일도 아니고 다른 나라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바로 이곳, 고국을 떠나와 잘 살아보겠다는 꿈을 펼친 이곳 토론토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때로는 부모를 폐기처분도 하고, 쓰레기장으로 보내기도 했다. 산 부모에게 그러하거늘 죽은 부모의 제산들 제대로 지낼까. 제 자식 잘못되거나 제 처지가 불편하면 부모 탓으로만 돌린다. 바로 자식교육이 문제다.

늙은 부모보다는 자식위주로 생활하면서 속보이게도 내리사랑이란 말을 앞세워 구실 삼기도 한다. 이게 과연 잘하는 짓인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스스로 판 구덩이에 빠지는 우매한 자식교육방식이다. 머지않아 자신의 앞날도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노후 자금을 충분히 마련하는 것만으로 삶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노후 자금마련과 병행해서 자식교육이 올바로 되어야만 천륜과 인륜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의미를 깨닫고 누릴 수 있다.

 

 

또 한 가지.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치 뉴스 속에나 등장하는 일처럼 멀리 듣는다. 비록 가까운 주변에서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게 바로 나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기 일쑤다. 방법만 다를 뿐, 내가 바로 그 뉴스속의 등장인물일 수 있다는 인식이 중요하다. 가치판단 능력이 무뎌졌다. 그러다보니 모두들 그런 소식을 남의 말 하듯 한다. 그러려니 하거나 또 그렇구나 하면서 눈 한 번 질끈 감고, 세태가 그런 걸 어쩌란 말이냐로 돌리고 만다. 슬쩍 양심이 있는 것처럼, 씁쓸하다며 입맛한번 다시며.

나 역시 지금 대안도 실천도 없이 막연히 화만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내가 가증스럽고, 인간이 가증스럽다. 침 한 번 칵 뱉어주고 싶다.

 

지금이 우리에게 반성을 촉구하는 5월이다. 제대로 된 성인이라면 5월이 카네이션 한 송이로 마감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오늘 아침 내가 먹은 마음부터 점검해보자. 함께 살거나 떨어져 살거나 간에 부모님께 전화 한통 하고, 용돈 몇 푼 드린 것으로 마음을 놓지 말자. 진심어린 마음 속 안방으로 부모님을 모셔 들이자. 겨우 용돈 보내드리고, 한국으로 전화하면서 죄송하다는 말만 연거푸 해놓고, 잠깐 동안 울먹이는 마음으로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을 반성한다.

<201332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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