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경망(輕妄)이 송곳 -청정심보살님이야기

천마리학 2013. 3. 14. 01:13

 

 

 

 

경망(輕妄)이 송곳 * 權 千 鶴

-청정심보살님이야기 

 

 

경망스럽지 말자!’

중학교 1학년 때였으니까 가장 일찍 내 안에 스며들어 좌우명처럼 되어버린 후 지금까지 나의 일생을 관통해온 채찍 중의 하나다. 아버지는 양조장, 양계장, 제재소 등을 겸하여 운영하셨기 때문에 우리 집엔 늘 많게는 삼사십 명의 일꾼들이 있는 상황에서 성장기를 거쳤다. 그 말을 들을 당시에도 우리 집은 익산시(전 이리시)와 김제 월봉리 부용(芙蓉), 두 곳에 있었다. 익산시에서 와이셔츠 공장을 하셨고, 부용에서는 정미소를 운영하셨다. 그해 나는 중학교 1학년이 되었는데, 주중에는 익산시에 있는 집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토요일이면 부용집으로 가서 주말을 보내곤 했다.

그날도 4명의 동생들과 함께 장기판을 둘러앉아 게임을 하고 있었다. 어느 대목인가에서 갑자기 웃음이 터지고, 자지러졌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쯧쯧, ~망스럽긴!”

정미소 기계 담당일꾼인 갑술이 아저씨가 뱉은 말이었다. 장기놀이에 빠져있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집 큰 공주 말이야.”

무슨 소리인가 싶어 어리둥절, 올려다보는 우리를 향해, 아니 나를 향해 한 마디, 확인사살이었다. 그 순간, 그 한 마디 총알은 나의 뇌리에 박혀왔다. 온몸에 숯불 뒤집어쓴 듯, 너무나 창피해서 화를 내기는커녕, 되물을 염도 하지 못한 채, 어물쩡 무렴 당 한 그 순간을 넘기고 말았다. 그 후 나는 절대로 경망스런 사람은 되지 말자!’는 결심을 했고, 그 말은 나의 생각과 행동을 간섭하며 좌지우지하는 생활방침 중의 하나가 됐다. 겉으로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갑술이 아저씨를 삶의 지침을 깨우쳐 준 사람으로 기억했다.

 

사십 넘어,

, 혹시 내가 경망스러운 사람은 아닐까?”

속을 터놓고 지내던 한 선배시인에게 나를 점검하는 말이었다. 그 무렵, 무슨 일인가가 있었다. 함께 활동하는 동인들 모임에서 무엇인가를 결정해야했고 결단한 뒤였다. 그 형은 내참, 별소릴 다 듣는다. 난 지금까지 권천학이가 경망스럽게 구는 꼴을 본 일이 없다. 차라리 좀 경망스러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지.’ 했다. 정말이야? 하고 반문하면서도 내심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 어찌 보면 허위로 보일 것도 같아서 갑술이 아저씨로부터 숯불 뒤집어 쓴 그때의 경위까지 이야기 했다. 형은 , 중학교 1학년이 뭘 안다고, 그런 생각 했다는 것부터가……

 

 

경망(輕妄), 경거망동(輕擧妄動)!

아무리 조심한다고 하며 살아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경망스러운 행동을 할지도 모르고, 또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가끔 되돌아보곤 했다. 사는 동안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당황스러운 일이 어디 한 두 번일까. 어찌 항상 침착할 수만 있을까. 하여튼,

크든 작든, 무슨 일이 있을 때 마다 그 말을 상기하며 사전사후 점검하곤 했다. 여전히 그 말은 나의 좌우명노릇을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번에 뜻밖의 일로 그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하는 일을 저질렀다.

 

독일에 사는 한 선배도반의 권유로 작년부터 안면암 사이트에 한 달에 두 번 정도, 나의 시와 수필을 올리고 있다. YMCA문화산책을 진행하면서 작년에 다룬 시와 수필들을 올리기도 한다. 

안면암 사이트의 단골보살님들의 댓글로 의견도 주고받고 좋은 말씀들을 많이 듣고 배운다. 불교적인 마음가짐과 가르침을 얻을 수 있어 좋다.

지난 연말 무렵, 불교관련 책을 읽은 것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독일의 선배도반이 석지명 스님의 저서를 보내겠다고 주소를 알려달라고 해서 이메일로 알려주겠다고 썼다. 그 내용을 본 청정심이란 보살님이 자신에게도 주소를 알려달라고 하며 자신의 이메일주소까지 적어놓은 글이 올라왔다.

불교 관련서적에 대한 이야기 끝에 나온 말이라서 청정심보살님도 책을 보내 주시려나보다 지레짐작을 했다. 고맙고 반가운 일이긴 했지만 미안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주소를 알려드리는 메일을 띄우면서 마음을 통하는 도반님들과 길을 튼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말끝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지난 1228일이었다.

 

청정심보살님, 참고로 주소를 알려드리긴 합니다만, 책은 안 보내셔도 괜찮습니다.

읽을 만한 책이름과 저자, 출판사 등만 알려주시면 제가 이곳에서 구해보겠습니다.

마음 써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문을 열게 된 것도 참 좋구요.’

 

그 메일을 띄우고 난 뒤에 앗차! 실수! 내가 경망스러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보내려는게 아니라 그냥 안부를 나누고싶어 그랬을수도 있지않은가불교관련 책에 대한 이야기 끝에 나온 말이라서 지레짐작으로 한 말이 청정심 보살님에겐 부담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발송취소를 하려고 다시 들어갔지만 청정심 보살님의 이메일 주소가 G-mail 이라서 할 수가 없었다. 찜찜한 채로 지나는데, 새해가 된 오늘 청정심 보살님으로부터 메일이 왔다. 안면암의 달력을 보내주려고 한다는 내용이었다. , 얼마나 후련한지.

 

다른 사람에게 크든 작든 무엇인가를 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안다. 늘 넉넉잖게 살아오면서 남에게 절대로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마치 강박관념처럼 몸에 배었고, 하나뿐인 자식에게도 늘 절대로 남에게서 받은 선물이 작은 것이라 해도 시답잖게 생각하지 마라. 설령 A4 용지 한 장을 받았더라도 그 A4 용지 한 장만큼의 마음이 담겨있는 법이다. 너는 종이 한 장이라도 남에게 베풀 생각을 했는가를 생각하며 항상 받은 선물에 대하여 감사하여라하고 가르쳐 왔다. 한 끝도 거짓이 아니고, 지금도 그 생각 또한 변하지 않고 있다.

 

 

이제 곧 칠십이 코앞이다. 살아오는 내내 그렇게도 조심했건만 그놈의 경망이 기어코 뾰족한 끝을 드러내다니. 이래서 살아도 살아도 무명(無明)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衆生)인 모양이다. 떠오르는 한 생각.

낭중지추(囊中之錐)!

주머니 속의 송곳은 반듯이 삐져나온다는 뜻으로 모수자천(毛遂自薦)이라고도 하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평원군열전(平原君列傳)’에 나오는 그 말이 떠올랐다.

 

중국 조나라의 왕족이며 재상(宰相)인 평원군은 평소에 인심이 후해서 수하에 수 천 명의 식객들 거느렸는데, 서쪽의 진나라로부터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침략 당했다. 평원군이 남쪽의 초나라에 연합을 협상하는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식객들 중에서 문무를 겸비한 인물20명을 뽑아 사신단(使臣團)을 만들기로 작정, 19명까지는 수월하게 뽑았다. 나머지 한 명 뽑기가 어려웠다. 그때 모수(毛遂)라는 사람이 자천(自薦)하고 나섰다. 한 번도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어서 평원군이 물었다. ‘무릇 뛰어난 사람은 주머니속의 송곳처럼 드러나기 마련인데 나의 문하(門下)에 기거(寄居)한지 3 년 동안 한 번도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 무슨 능력이 있는가’. 모수가 대답하길 오늘에야 처음으로 주머니에 넣어달라고 원했기 때문입니다. 일찍 주머니에 넣어졌더라면 주머니가 아니라 자루라도 드러났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말에 모수를 사신일행에 가담시켰고, 초나라와의 협상을 성공으로 이끌었다는데서 유래한 말이다.

그런데 나는 재주 대신 경망스러움이 주머니 속에 들어있어서 아직까지도 삭이지 못한 그 끝을 가끔 드러내니

애고! 관세음보살 도로아미 타불!

<201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