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여기 한국사람 있소! * 권 천 학

천마리학 2013. 3. 12. 03:48

 

 

 앞에 올린 칼럼 <헛된 꿈이라도 목소리를 내자>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그 이전에 썼던 칼럼을 올린다.

 

여기 한국사람 있소! * 권 천 학

 

 

캐나다로 랜딩 이미그랜트 절차를 마치고 영주권을 얻어 토론토에 살기 시작한지가 벌써 4 년째다. 늦게 시작한 이민생활, 모든 낯선 것들과의 소통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말, 영어였다. 안전하게 정착하기 위해서는 우선 영어의 벽을 뛰어넘어야 했다.

캐나다 정부에서 이민자들을 위해서 실시하는 무료 교육인 ESL을 선택했다. 켄싱턴 마켓 근처에 있는 세인트 스테판 하우스에 있는 영어교실에서 레벨 2에서부터 시작했다.

여러 개의 영어교실은 온통 중국인들이었고 한국인은 딱 나 한 사람이었다. 99%의 중국인과 1%의 한국인, 보이지 않는 은근한 대립을 느끼며 물 위에 기름 뜨듯, 낯설게, 서툴게 수업을 들어야했다. 말하자면 일당백(一當百)의 전사(戰士)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영어공부를 하면서 뜻밖의 일을 경험했다. 그것은 한국인으로서의 목소리.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학생들만이 아니라 사무실 직원도 중국인, 선생님들도 두 명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중국인이었다. 그러다보니 모든 일들이 중국인 위주로 굴러갔다. 낮은 수준의 영어 클라스여선지 몰라도 중국인들의 영어발음을 도통 알아들을 수 없어 클라스 메이트들인데도 전혀 소통이 되지 않았다. 그 사람들끼리는 중국말로 통하니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그것이 영어의 진도에는 좋지 않다는 걸 인식하면서도 그저 놀러온 기분으로 중국말로 수다를 떨며 보내다가 돌아가곤 하는 중국인들이 있었다. 떼거리로 뭉쳐 다니는 그들 사이에서 내가 느끼기엔 영어공부라기 보다는 그저 낯선 타국생활의 외로움을 달래는 심심풀이 땅콩 정도의 3등 열차 칸 같은 것이었다.

 

분명 영어를 배우는 곳인데도 수업시간만 지나면 복도에서건 교실에서건, 화장실에서까지 중국어가 판을 쳤다. 어쩔 수없는 현상이라고 이해하면서도 달갑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런 속에서 홀로인 나는 왕따 보다는 한국인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해가며, 자존심 경쟁하느라고 보이지 않게 날을 세웠다. 가끔 전체적인 분위기 속에 휩쓸려가는 경우도 생기곤 했다. 말이 통하지 않고 숫자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인해전술(人海戰術)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경우이든 내가 무시당하는 것은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지만 내 나라 대한민국이 무시당하는 일은 수용할 수 없다는 뚝심이 자리 잡았다. 나는 나 개인이면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이란 위치를 다짐하며 매사 조심하고 신경 쓰며 내심 단호했다.

 

어느 날, 전달사항을 전하기 위해서 교실에 들어온 사무실 직원이 중국말로 전달사항을 전하고 질문이 오고가더니 자기들끼리 마무리하고 나가버렸다. 찜찜했다. 그 다음에 또 그런 일이 벌어졌다. 내 속에서 뭔가가 꿈틀했다. 세 번 째 그런 일이 벌어졌다. 기분 나빴다. 내가 모르는 농담까지 여유롭게 주고받은 후 돌아서려는 직원을 불러 세웠다. “Excuse me?” 그리고 서툰 영어로 말했다.

“I am a Korean. only one. But…… 전달사항을 영어로 말해 주십시오. 그리고 중국말로 끝을 냈으니 이젠 한국말로도 해 주십시오

뜻밖의 기습에 당황한 사무실 직원은 미안하다고 하면서 한국 사람인 줄 몰랐다고 하면서 한국말을 모르니 영어로 다시 하겠다고 하고 조금 전에 중국말로 했던 내용을 영어로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전달하러 들어온 사람이 바뀔 때마다 그와 비슷한 일이 몇 번 더 반복되었다. 그렇게 나는 미운오리 새끼가 되어갔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단 한 명이지만 분명히 나는 거기에 있고 그리고 한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무시당하는 건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지만, 내 나라 대한민국이 무시당하는 건 참을 수 없다.

 

얼마 후 전체 학생들이 농장견학을 가는 날이었다. 세 대의 스쿨버스에 나눠 타고 낯선 곳으로 떠나가고 있었다. 중간 휴게소에서 버스가 멈췄을 때 행사의 진행을 맡은 다른 반 선생님이 올라왔다. 중국인인 그 역시 중국말로 그날의 행선지와 진행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중간 쯤에 앉아있던 나는 또 손을 들었다. 그리고는 영어로 말해 달라, 그렇지 않으면 중국말이 끝난 다음에 한국말로도 해달라고 요청했다. 당황한 그 역시 미안하다고 하며 영어로 고쳐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럴 때마다 주변엔 별 의미 없는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론 나의 도드라진 행동을 고깝게 생각한다는 것도 느낄 수가 있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숫자가 많든 적든 간에 공평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일이고 또 나라 대() 나라로는 중국이나 한국이 1:1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점차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수긍하는 분위기가 늘어났고, 내가 한국 사람임이 더 알려졌고, 오히려 사무실 직원들과의 소통하는 기회가 더 많아졌다. 사무실 직원이 교실에 들어오면 나에게 먼저 중국어로 한 다음에 영어로 한다든지, 영어로 말한 다음 중국어로도 한다든지 하는 양해를 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메니저가 들어왔다. 나를 불러 주목하게 하더니 특별히 나를 위한 정보라면서 다른 어디엔가 한국인 노래클럽이 있으니 한번 가보라고 알려주었다. 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알려주는 거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그들이 99%의 중국인과 단 1%인 한국인을 공평하게 기억하고 있고 신경 쓰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 노래클럽을 찾았을 때 나의 그 작은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하는 것을 더욱 깊게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노래클럽은 한국의 이민노인들을 위한 모임이었다. 내가 다니는 ESL의 근처의 건물로 같은 스테판 커뮤니티 소속의 건물이었다.

들어가는 순간 한국에서 눈에 익었던 동양화, 물론 중국풍의 동양화이지만 이곳의 서양화에 비하면 같은 맥락의 동양화이어서 거의 비슷해 보였다. 그림만이 아니라 서예작품, 도자기 작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모두 중국 이민자들의 습작품들이었다.

알고보니 그 건물의 2층 전체를 중국인들이 사용하고 있었고, 그 중의 한 칸, 그 한 칸에서도 반을 나눈 공간에, 그것도 일주일에 한 번씩,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사용하는 곁,곁방살이였다. 그날도 중국인들의 요리강습이 있어서 달그락달그락 주방기구 부딪치는 소리가 칸막이너머로 들려오고 음식냄새도 나는 속에서 우리 한국이민노인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처음엔 영문을 몰랐지만 진행자인 이선자씨의 설명을 들어 내용을 알게 되니 씁쓸했다.

 

그 건물이 같은 커뮤니티 소유의 건물로, 내가 다니는 ESL이 있는 곳이 본건물이며 한국노인들의 노래교실이 본 건물로 들어가고 싶지만 힘이 약해서 들어갈 수 없다는 것. 그 힘이 바로 목소리였다.

본건물의 교실 한 칸을 차지하면 프로그램도 여러 가지를 할 수 있고, 또 시간도 더 많이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어 활성화 될 수 있다는 것. 벌써 여러 해째 노력을 하고 있지만 성사가 되지 않고 있으며 그때도 신청해놓고 있는 중인데 한국 사람들의 존재가 없어 어렵다는 것이다.

그나마 내가 영어교실에서 자꾸만 거는 딴지가 나에게 그런 곳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곳에 가서 현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어떻든, 그렇게 자꾸 한국사람의 존재를 표시 해주어야 한국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의식 하게 되고, 그래야 한국일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생기고, 건물 한 칸이라도 배당받을 수 있는데 그동안 그곳에 온 한국인들은 여럿 있었어도 왔다가는 그냥 말없이 사라져버린다는 것이었다.

 

 

 

거기 오는 한국사람들은 중국인들보다 옷차림도 고급스럽고 영어실력도 나은 경우가 많은 편인데, 물론 도토리 키재기겠지만. 하여튼 한국인들은 왔다가 은근히 중국인들을 무시하는 눈초리를 내려 보다가 슬며시 사라지거나, 적응 못해서 사라지거나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처럼 불편을 말하고 불평등을 지적하는 행위가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른다면서 본의 아니게 나를 똑똑한 분이라고 환영해마지 않았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좀 더 적극적으로 그렇게 해주었으면 하는 은근한 주문이었다.

 

중국인 영어선생님들이 여럿 있는데, 내가 보기엔 실력이 썩 좋아 보이지 않더라고 평소의 내 느낌을 말했더니, 한국사람이 영어 실력이 더 좋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끼리 꽉 짜여있어서 채용이 안 된다는 것. 영어 선생님만이 아니라 청소부조차도 중국 사람이어야 취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실을 듣고 보니 사실이 이해되는 부분이 많았고 국력이 얼마나 중요한가 실감했다. 그리고 국력이란 꼭 국가적인 차원이 큰일만이 아니라 우리들 개개인이 진정한 의미의 자존심을 지키고 의견 즉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부터도 비롯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후로 나는 노래교실에는 나가지 않았지만 ESL은 계속 다니면서 의도적으로 건()를 만들어 메니져의 방을 방문하기도 하고, 사무실을 들락거리며 한담(閑談)도 나누는 등, 오버를 했다. 여기 한국사람이 있다는 목소리를 내는 것이 국력의 기초가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두 달 쯤 후 나는 한국을 다녀와야 할 상황이라서 영어학교도 멈출 수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