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포항제철사장‘철의사나이’ 박태준님께 바치는 헌사

천마리학 2011. 12. 14. 19:24

 




박태준, 일본에게서 배워 일본을 이긴 '철의 사나이'

 

1978년 중국의 딩샤오핑이 이나야마 요시히로 신일본제철 회장에게 중국에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부탁하자 이나야마 회장은 이렇게 말했지요. “중국에선 불가능합니다. 공장은 지을 수 있지만,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은가요?”

1927년 오늘은 ‘철의 사나이’ 청암 박태준 전 포항제철 명예회장이 세상에 태어난 날입니다. 청암은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졸업하고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출신의 장옥자 여사와 결혼했는데, 부인의 첫 선물은 《경제학 원론》 책이었습니다. 이것이 징조였는지, 청암은 세계 경제의 거목이 됩니다.

청암은 육사 생도일 때 중대장으로, 나중에 1군단에서 상사로 모셨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믿었던 인재였습니다. 박 대통령은 5.16 군사정변을 일으켰을 때 “실패하면 가족을 책임져 달라”면서 거사 명단에 제외시켰을 정도로 청암을 신뢰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육군 소장을 예편하고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던 청암을 불러서 대한중석(현재 워런 버핏이 이끄는 버크셔 해서웨이 그룹의 자회사인 대구텍)의 경영을 강권합니다. 청암은 1년 만에 적자기업을 흑자로 돌립니다. 1967년 박 대통령으로부터 ‘산업의 쌀’ 철강 산업을 맡으라고 지시받습니다.

그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을 찾아다니며 지원을 요청하지만 퇴짜를 맞습니다. 세계은행은 채산성이 없다는 보고서를 써서 결정적으로 찬물을 끼얹습니다. 우리나라 철강 산업을 지원하겠다던 국제제철차관단도 투자에 난색을 표합니다.

청암은 고민을 거듭하다가 한일 국교정상화 배상금을 전용하자고 박 대통령을 설득합니다. 청암은 일본 정계와 제철업계 요인들을 끈질기게 설득해서 일본수출입은행 상업차관과 신일본제철의 기술지원을 받는 데 성공합니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배상금을 농업 지원이 아니라 성공 가능성이 불분명한 제철산업에 쓰는 것에 대해서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청암은 “조상들의 피 값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건설하고 있다. 공사를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 모두 다 우향우해서 저 포항 앞바다에 빠져 죽자!”며 임직원들을 다독여서 1973년 6월 9일 포항제철 제 1 고로에서 첫 쇳물 생산을 완성했고 조업개시 6개월 만에 흑자를 달성했습니다.

청암은 제철소를 짓기 전에 사원주택단지부터 먼저 지어서 사방의 비난을 받았지만 “사원 복지 잘해서 망한 회사는 없다”고 밀어붙였습니다. 그가 부실공사 현장을 발견하곤 70% 진척된 공장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킨 뒤 다시 짓게 한 일화도 유명합니다.

청암은 강하면서도, 열린 인물이었습니다. 포항공대를 설립할 때 초대 총장인 김호길 박사가 “지금은 포항제철 부설 대학이지만 나중에는 포항공대 부설 포철이 될 것”이라며 당시 사학법에서 재단이사장의 권한으로 규정된 부분까지 자신에게 달라고 하자, “초대 총장은 창업자과 같다”며 기꺼이 요구를 수용합니다. 1988년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자 “우리나라에 이런 신문도 있어야 한다”면서 기업광고를 꾸준히 싣게 합니다.

청암이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 지지성명서에 서명하지 않았을 때,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길길이 날뛰며 박 대통령에게 보고하자 “그 친구 원래 그래. 제철소 일 열심히 하도록 건드리지 마!”라고 한 것도 유명한 일화지요.

청암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갈등을 빚다가 표적 수사를 받습니다. 포항제철 회장 직을 사퇴하겠다고 발표하자, 포항과 광양 시민들이 대규모 반대 시위를 한 것도 유명하지요. 김영삼 정부 때 수 백 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했고, 30여 억 원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됐고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퇴임 당시 포스코 주식은 단 1주도 없었다고 합니다. 2011년 세상을 떠날 때에 남은 재산은 젊었을 때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북아현동 자택이 전부였고, 그나마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했습니다.

청암은 1969년 세계은행에서 부정적 보고서를 썼던 존 자페를 나중에 만나서 이런 말을 듣습니다. “나는 그 때로 돌아가도 똑같은 보고서를 쓸 거다. 철강 수요가 없는 나라가 100만 톤짜리 제철소를 짓는 것이 말이 되는가? 내 실수는 박태준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다. 당신이 상식을 초월하는 일을 하는 바람에 내 보고서가 엉망이 된 것.”

4차 산업 혁명의 기로에 놓인 2019년 대한민국, 누군가 상식을 초월하는 일을 할 수가 있을까요? 그런 일을 하려는 사람에게 박수를 칠 준비도 돼 있지 않은 듯한데…. 그래도 누군가 큰 뜻을 품고 온몸을 던지고 있겠지요?




 


 

 

 

인상학자-성형의사가 분석한 고 박태준 회장 얼굴

주선희·진세훈의 얼굴탐구 (17)

입력일 2011.12.22 14:53 ㅣ 수정일 2012.01.05 13:39

 

 

고(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군인의 기(氣)와 기업인의 혼(魂)을 가진 철강왕

우리나라 현대사를 일군 철강 기업 포스코의 창업자 박태준 회장이 타계했다. 한국 철강산업의 기적을 만들어낸 박회장은 1968년 설립 때부터 지난 13일 별세할 때까지 43년간 CEO(최고경영자)로서, 명예회장으로서 포스코에 온몸을 바쳤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철강산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그는 ‘철강왕’이란 별칭답게 인상적으로도 전형적 ‘철강형’ 인물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강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생전에 박 명예회장을 두고 “군인의 기와 기업인의 혼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지병으로 탄력이 떨어진 최근 얼굴보다는 한창 활약할 당시의 사진을 중심으로 박회장의 얼굴에 담긴 ‘군인의 기와 기업인의 혼’을 읽어보기로 하자.

 

박회장의 사인인 ‘흉막섬유종에 따른 호흡 곤란’은 ‘현장경영’으로 인한 직업병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 사인이 아니라면, 인상학적으로 박회장은 전형적 장수상이다. 우선 긴 눈썹털이 그렇다. 흔히 나이가 들면 눈썹털이 빠지면서 눈썹이 흐려지게 되는데, 박회장은 여전히 눈썹이 무성하고 눈썹 털이 길었다. 이는 젊은이 못지않은 에너지가 눈썹에 반영된 것이다. 좋은 귓밥, 그리고 귀안의 털도 기혈이 왕성한 장수상이다. 아마 박회장도 귀 안에도 털이 나있었을 것이다. 긴 인중도 장수상에 해당한다. 성격이 느긋하기 때문이다.

 

한편 박회장의 턱밑을 보면 닭의 목처럼 늘어진 살이 턱과 목을 연결하고 있다. 이 또한 전형적인 장수의 상이다. 이런 경우 젊었을 때는 목이 굵어 매우 건강했음을 일러준다. 이런 사람은 80이 넘어서까지도 건강이 좋아 활기차게 일한다. 지병만 아니라면 장수하면서 오래오래 한국 기업인들의 롤모델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박회장의 얼굴을 보면 왼쪽과 오른쪽이 상당히 다르다. 남자에게 왼쪽은 선천, 오른쪽은 후천이다. 박회장이 군인에서 기업인으로 변신한 나이가 36세, 바로 오른쪽 눈에 해당하는 나이다. 왼쪽 눈은 각이 지고 눈빛이 날카로운 군인의 눈이요 호랑이의 눈이다. 오른쪽 눈은 한결 예쁜, 자애로움이 담긴 민간인의 눈이다. 박회장은 한 얼굴 안에 엄격한 경영자와 따뜻한 경영자의 기질을 모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고인의 쌍꺼풀이 없는 왼쪽 눈은 내성적이며 생각을 깊이 하는 눈이며 쌍꺼풀이 있는 오른쪽의 큰 눈은 대외적으로 ‘얼굴’이 되는 눈이다. 내성적이면서 또한 외향적인 두 가지 기질을 지닌 음양안이란 말이다.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은 속을 잘 알 수가 없다. 대신 어떤 사람하고도 잘 맞출 수가 있다. 그래서 음양안을 가진 사업가는 머리가 좋고, 돈의 귀재다. 특히 왼쪽 눈은 태극모양인데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은 하고자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해내는 사람이다. ‘제철소를 짓지 못하면 영일만에 빠져 죽어야 한다’고 했던 그의 ‘우향우 정신’이 이 눈에 담겨있다. 만약 사업가가 아니라 군에 남았다하더라도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갔을 것이며, 특히 작전참모로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박회장의 정수리 부분을 보면 상당히 솟아있다. 이처럼 도덕골이 솟아있으면 도리를 아는 사람이다. 포스코의 창업 정신인 '나라를 지킨다'는 '보국(報國)'의 의지가 정수리에 자리 잡고 있다. 자기 분야의 일은 속속들이 알아야 직성이 풀리기 때문에 해박한 전문가가 된다. 포스코를 국가산업의 동력으로 키워내겠다는 사명감, 그리고 경영자로서의 통찰력이 바로 이 부분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도덕골과 함께 뚜렷한 미소선(법령)이 있는 사람은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고집불통이다. 그런데 박회장의 경우는 법령이 희미해서 무모한 고집을 부리지 않는다. 자신의 자리에서 즐겁게 최선을 다해 일하되 굳이 그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언제든 가볍게 떠날 수 있는 것도 이 법령선이 뚜렷하지 않아서이다. 희미하긴 하지만 법령이 유난히 넓게 퍼져있다. 다리 폭이 넓을수록 안정감이 있는 삼각대처럼 균형이 탄탄하여 무너지지 않는다. 이렇게 안정감이 있는 법령을 가지면 만년에 더욱 존경을 받게 된다. 식록창(코와 입 사이의 공간)이 넓고 두둑하니 재물운도 좋다.

 

인중이 길어 혹 아랫사람이 흡족하지 않더라도 참고 기다려줄 줄 안다. 그러니 훌훌 던지고 나와도 아랫사람들이 그를 여전히 존경하고 추앙하는 인물이 되는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인중에 버금갈 정도니, 아마 포스코에 양아들같은 직원들을 많이 두었을 것이다. 포스코 임직원들뿐 아니라 적지 않은 국민들로부터 포스코의 정신적 지주라는 평가를 받아온 것도, 박지만씨는 물론 심수봉씨까지 챙겨준 인품도 이 인중에 담겨있다.

박회장의 얼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코다. 그에게서 멧돼지의 기질이 보이는 것은 이 코가 돼지의 코처럼 두껍기 때문이다. 돈이 많은 코이되, 그 돈은 자력으로 버는 돈이며 또 남도 먹여 살려 주는 돈이다. 코가 옆으로 퍼져있어 자기 것은 잘 챙기지 않으며, 콧구멍이 커서 남에게는 잘 나누어 준다. 코가 짧아 순발력이 있고 민첩하며, 코가 높지 않아 몸소 현장경영에 나섰다.

 

진한 눈썹은 강한 추진력을 대변한다. 젊은 시절 눈썹은 너무 숱이 많고 털이 서로 엉켜있는데, 이는 지나치게 울창한 숲과 같아서 인맥에 어둡다.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사는 무사(武士)형 눈썹으로 부드러운 대인관계와는 거리가 멀다. 남은 잘 돌봐줘도 자신의 일은 남에게 부탁 할 줄을 모른다. 아부나 타협을 모르는 눈썹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눈썹 숱이 약간 줄어들면서 대인관계가 한결 원만해졌을 걸로 보인다.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것은 이마에서 코까지의 능선이 매끄럽게 잘 연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일자로 다문 입은 지퍼를 잠근 것처럼 무겁다. 무슨 일이 있어도 비밀을 지키는 믿을만한 사람이다. 박대통령이 박회장을 특별히 신뢰한 이유도 아마 이 입에 있었을 것이다.

 

박태준 회장은 이렇듯 진정으로 ‘강한’ 기운을 가진 리더의 상을 지니고 있다. 박회장처럼 다시 또 우리 현대사에 큰 획을 긋는 멋진 인상을 지닌 인물을 만날 수 있게 되길 기대해본다.

 

 

 

 

인상학자-성형의사가 분석한 고 박태준 회장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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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은 눈썹과 큰 코, 너그러운 턱의 조화

최근 타계한 박태준 회장은 생전에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 분이다. 돌아가신 분의 얼굴을 미학적으로 분석하려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 분을 닮고자 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고 과거 그분의 모습에서 오늘 우리가 배우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으로 그 분의 얼굴을 살펴보기로 한다.

박 회장의 얼굴을 길이로 3분의 1씩 나눈 세 부분의 균형을 보면 미학적인 기준에 상당히 잘 맞게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둥글고 높은 이마가 돋보인다. 얼굴에 주름이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은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주름이 꼭 많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주름은 나이가 들면서 피부에 탄력이 없어져 생기긴 하지만, 탄력을 잃는 것에 더해 피부가 겹쳐지는 동작이 반복적으로 많이 있어야 형성되는 것이다.

고인의 눈썹은 굵고 짙으며 숱이 많아서 강하고 뚜렷한 인상을 만들어 준다. 많은 남자들이 이런 눈썹을 원하지만 박 회장처럼 타고나지 않은 이상 수술이 아니고서는 갖기 어렵다. 눈썹의 특징은 일정한 길이 이상으로는 자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문헌에 의하면 10명 중 3명은 눈썹을 뽑는 게 아니라 깎기만 해도 다시 자라지 않는다는 보고가 있다. 그래서 다른 부위는 찢어지면 감염 위험을 줄이기 위해 그 부분의 털을 제거하고 꿰매지만, 눈썹 부분은 찢어져도 눈썹을 깎지 않고 치료를 해야 한다.

이처럼 짙고 굵으며 힘찬 눈썹을 만들려면 개별 모발이식술이 유일한 방법이다. 우선, 눈에 잘 뜨이지 않는 머리 뒤쪽 부분의 굵은 모발을 필요한 만큼 한꺼번에 피부째 떼어내고 그 자리는 봉합한다. 그 다음 머리카락 한올 한올을 모근이 상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분리하여 모발이식기계에 한올 한올 채워 넣고 나서 이식할 부분을 정한 뒤 심는다. 이때 조심해야 할 점은 털이 서있는 방향이 위치에 따라 다르다는 점이다. 미간에 가까운 부분의 털은 거의 수직으로 서있고 중간에서 눈꼬리 쪽으로 갈수록 점점 눕는다. 또한 눈썹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의 털은 모두 눈썹의 가운데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개인에 따라서도 눈썹의 방향이 각기 다르다. 이런 요소를 모두 감안해서 이식해야 한다.

이식한 털은 1개월 내외에 모두 빠지고 2~3달 지난 뒤 그 자리에서 다시 털이 나기 시작한다. 이때 다시 나기 시작하는 털은 원래 있던 자리에 난 털의 특성을 그대로 갖고 있다. 따라서 눈썹같이 적당한 길이로 자라고 마는 것이 아니라 머리카락 같이 계속 자라는 문제점이 있다. 따라서 적당한 길이에 맞춰 잘라가면서 관리를 해야 한다. 정치 지망생의 경우 나이가 젊어도 눈썹에 모발을 이식하는 수술을 원하는 경우가 많다. 이로 보아서도 눈썹은 개인의 강한 의지를 표현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겠다.

고인의 눈썹과 눈까지의 거리는 짧아서 관대하고 여유롭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눈이 깊고 코가 크고 높아서 얼굴 전체에 입체감을 만들어 내면서 굽히지 않는 강한 의지와 추진력을 표현하는 듯하다. 이런 코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박 회장의 경우처럼 강한 이미지의 눈썹과 코가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런 코만을 가지면 투박하고 거칠어 보일 수 있으므로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고인의 코는 미간사이 높은 곳에서 시작되고 뿌리 부분은 넓고 높으며 아래로 곧게 뻗어 내려와서 긴 윗입술에서 멈추며 완성된다. 인중은 다소 길게 느껴질 정도로 윗입술이 길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은 두꺼운 편으로 붉은 입술 빛이 짙고 선명하다. 특히 가운데 얼굴이 발달되어 눈과 입 사이 거리가 짧지 않고 광대뼈도 돌출되어 있지 않다. 이런 점들은 남방계 골격의 대표적인 특징을 이루고 있다.

턱은 뾰족하지 않고 둥글며 피하지방이 여유 있는 편이라 아랫사람에게 관대할 것 같은 인상을 준다. 특히 사업하는 분들 중에는 박 회장의 귓불을 부러워하여 그런 모양으로 성형을 원하는 경우가 있다. 결혼을 앞둔 여성들도 귓불이 풍성하기를 원해서 수술로 모양을 고치기도 한다. 시술은 자가 지방이식을 채택하기도 하는데, 시술 후 치료기간이 긴 편이라 부담스럽다. 좀 더 빨리 효과를 보기 원하는 경우에는 히알루론산 필러로 시술 받기도 한다. 요즘은 아무래도 시술이 간단하고, 치료기간이 짧은 방법을 선택하려는 사람이 많아져서 필러로 시술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다.

자가지방이식을 하게 되면, 배꼽 근처에서 지방을 채취하고 (많은 양이 아니어서 간단히 끝난다). 생존율이 높은 지방세포를 골라내기 위해 생리식염수로 씻은 뒤 원심분리기로 걸러 농축시킨다. 그 뒤 1cc 지방이식용 주사기로 조금씩 조직 사이사이에 투입하여 이식한다. 이때 지방이 일부 흡수될 것을 감안하여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 15% 정도 더 많이 넣는 것이 좋다. 필러로 시술할 때는 과정은 좀 더 간단하지만 주의해야 한다. 피부의 너무 가까운 곳에 이식하지 말고 가능하면 작은 귓불이지만 깊은 곳에 이식한다는 마음으로 필러를 넣어야 귓불 자체의 모양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귓불의 모양만으로 해결이 안 되는 칼귀의 경우 귓불의 끝과 얼굴 사이의 각을 둥글게 만들어 주는 수술을 더해야 한다. 이런 귀는 귓불의 아랫부분을 Z자 모양으로 절개한 뒤 그에 따라 생기는 삼각형 모양의 피부 조각 두 개를 아래위를 바꿔 붙이는 시술을 한다. 그러면 시술 부위가 처음의 Z자를 뒤집어놓은 모양이 되면서 아래위 길이가 늘어난다. 그리고 나서 나중에 자가 지방 이식이나 히알루론산 필러 시술을 하면 귓불이 두툼해진다.

한편 박 회장의 나이 든 모습을 보면 피부는 탄력을 잃어 얼굴 피부가 처져 내려오기는 했지만, 주름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성형외과 의사가 보기에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나이가 들면 주름이 없기가 참으로 힘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박 회장의 피부가 두꺼운 덕분이다. 피부가 얇고 부드러운 사람들은 주름이 빨리 생기고 많이 드러난다. 하지만 두꺼운 사람들은 젊은 시절에는 피부가 부드럽고 곱다는 평을 듣지는 못하지만, 나이가 들면 얇고 부드러운 피부보다 주름이 훨씬 적고, 생기는 시기도 늦어지는 장점이 있다. 피부가 거칠고 두꺼워서 고민하는 젊은이들은 나이 들고 나면 두꺼운 피부를 고맙게 여길 날이 올 것이다.

그다지 크지 않은 체구였지만 국민들 마음에 ‘거인’으로 남은 고 박태준 회장. 젊은 시절부터 돌아가시기까지의 모습을 되새기면서 박 회장의 외모를 닮고자 하는 마음이 철강산업에 투신해 국가발전을 위해 희생한 생전의 그 깊고 높은 뜻까지 닮으려고 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제 그동안의 노고를 잊고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명복을 빈다.

 

 




 

배신하지 않으셔서 감사합니다.

-‘철의 사나이’로 불리던 남자 청암 박태준님께 바치는 헌사

 

 

 

 

 

 

 

 

 

 

 

 

막 자정을 넘긴 시간, 14일의 새벽, 간밤에 9시경에 잠이 들어 겨우 세 시간도 못 채우고 잠자리가 뒤숭숭해서 깨어나 컴퓨터 앞에 앉았다. 뉴스검색을 하다가 ‘포철 신화’ 를 만들어낸 장본인인 청암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향년 84세로 별세 소식이 눈길을 끌었다. 사인은 ‘급성 폐손상’이었다. 연세로 보면 크게 애닲은 연세는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100세 장수시대’가 상식으로 된 요즘 세상에 좀 더 사셔도 될 분이라서 마음이 서늘했다. 더구나 유난히 건강해보이신 분이었는데···

조용히 옷깃을 여몄다. 더욱 각별한 애도의 마음을 갖는 것은 내가 좋아하던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배신 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른다. 모를 뿐만 아니라 상관없이 그냥 살아온 평범한 무지랭이다.

그런 내가 그분을 좋아했다. 존경이라는 말과 다르다. 처음엔 막연히 좋아했고, 포항제철의 중요성과 포항제철에 대한 그분의 포부와 의지를 알게 되면서 차차 존경하게 됐다.

 

 

 

 

 

 

 

 

내가 맨 처음 그분을 알게 된 것은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포항제철 창업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분에 대한 어느 기사에 곁들여진 사진, 짧은 머리와 동글동글 하면서도 뚜렷한 이목구비, 호랑이 눈썹, 기사의 내용보다 더욱 마음을 끌었던 그분의 용모는 당시에 인기 있었던 배우 율 브린너를 떠올리게 했다. 부리부리하면서도 힘이 있고, 입가에 서린 미소와 함께 꿰뚫어보는 듯 날카로운 눈빛, 강인한 남자의 느낌을 받았었다. 특히 눈빛이었다. 이글거리면서도 정겨움이 담겨있는 눈빛. 참 맑았다. 그래서 좋았다.

그분의 강렬한 눈빛에서 우리나라에 철강산업에 대한 의지와 국가를 받쳐주는 뜨거운 쇠기둥의 든든함도 보았고, 용광로의 끓는 쇳물의 정열도 보았다. 그는 지금의 포스코가 된 포항제철의 창업자로 ‘철의 사나이’ 또는 ‘한국의 철강왕’이라는 별명이 당연했다.

그런 그가 정치에 뛰어들 때 왠지 맞지 않는 옷을 입고 길을 잘 못 드는 것 같아 심정이 얄궂었다. 단지 인상만으로 좋아하게 된 단순한 호감이었고, 호감 때문에 갖게 된 막연한 신뢰였지만, 정치판으로 바꾼 행보가 그 자신의 삶에 오점을 남기게 되거나 내가 갖고 있는 일방적인 신뢰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지나 않을까 하는, 아쉬움 반, 염려 반의 심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치판을 모르고 세상 돌아가는 꼼수를 모르는 나로선 그저 그렇구나 하는 생각일 뿐, 정치판의 파란을 겪는 동안에도 가끔 접하게 되는 화면이나 신문에서 그의 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한 가닥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어쩌다 미디어를 통해서 보이는 그분의 모습에 때로는 반가움을, 때로는 중후함을 보기도 했었다.

 

 

 

 

 

 

 

 

김영삼 대통령과의 불화로 포철 명예회장직을 박탈당하고 4년간 일본망명생활을 할 때는 마치 내가 당한 일이기나 한 것처럼 허망한 권력 세계의 그늘을 실감하기도 하였다.

다시 국무총리까지 되었을 때도 여전히 맞지 않는 옷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으나 한편으론 가슴에 품은 의지를 세우기 위해서 쇳물을 끓이고 있으리란 추측으로 염려를 덮으면서, 오직 역사서를 쓰기 위해 굴욕을 참아냈던 사마천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힘 빠진 호랑이가 아닐까 하는 안타까움이 동반되는 짐작이었다. 결국 2000년, 이런저런 불협화음에 실려 총리직을 떠나는 모습까지 지켜보았다.

그 후 낙향한 선비처럼 살고 계시지나 않나,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짐작만 할 뿐, 권력으로부터 박탈당한 자존심을 아파하는 상처 입은 호랑이를 상상하기도 했다. 그것 역시 안타까운 일이었다. 간간이 포스코에 대한 열정을 이어가고 있음을 풍문으로 들으면서 중간에 길을 잘못 바꿔 뜻을 이루지 못한 불운한 정력가에 대한 아쉬움을 버릴 수가 없었다. 어쩌면 중간에 길을 바꾼 것도 자신의 철강에 대한 뜻을 이루기 위한 발걸음이었듯이 여전히 보이지 않게 쇳물을 끓이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아쉬움을 희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저 그뿐. 그의 소식은 세상으로부터 끊겼고, 나의 추억도 희미해져갔다.

그러다가 오늘, 별세소식을 접한 것이다.

 

 

 

 

 

 

 

 

 

보도내용에 의하면 총리직을 끝으로 정계 재계에서 은퇴하고 평범한 일상으로 살면서 변변한 집 한 칸도 남은 게 없어 서울 남산 인근의 큰딸 집에서 주로 생활해왔다고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특별하사금을 받아 구입한 서울 아현동 자택을 총리직 사퇴와 함께 사회에 환원해버렸고, ‘본인의 명의로 된 집이나 차, 주식 등 개인재산이 전혀 없다고 하며 병원비도 감당하지 못해 자녀들이 지불했다’고 밝히고 있다.

2002년, 포스코는 창업자에 대한 예우로 그가 포스코에서 물러난 지 10년만에 ‘포스코 명예회장직’을 다시 맡겼고, 그의 호(청암.靑岩)를 딴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에 추대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포스코가 더 크게 성장해 세계 최고가 되길 바란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분은 권력의 강인하고 차가운 속성 속에서 자신을 연마해가며 철강에 대한 뜨거운 꿈을 평생 접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분의 가슴속에 끓고 있었을 용광로는 권력의 허무한 강인함을 이기는 철강의 뜨거운 강인함이었을 것이다. 그분 답다. 그런데,

변변한 집 한 채 없다는 말, 병원비 부담도 자녀들이 해야 할 정도였다는 그 말 때문에 울컥, 이 글을 쓴다. 그리고,

배신당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마지막 헌사를 바치기 위해서 이 글을 쓴다.

 

 

 

 

 

 

 

 

 

신기하다. 그만한 위치, 그만한 권력을 쥐었던 사람이라면, 아무리 권력의 끝이 더러운 것이라고들 말은 해도 우리 사회에서 어디 그게 그렇던가. 변변한 집 한 채 없다니, 그러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정치판에서 한 가닥 한 사람치고, 경제계에서 한 가닥 한 사람치고 알게 모르게 축재 안 한 사람 드물고, 지면에서 전하는 소식으로는 막장 같은 인생이면서 나중에 드러나는 개인적인 삶은 룰루랄라 아닌 사람 없었다.

그런 일들로 하여 우리는 얼마나 많은 배신을 당했던가. 우리 손으로 뽑은 국회의원, 내로라하는 공약을 내세우던 정치인, 심지어 대통령까지도 우리를 배신했었다. 그래서 우리는 감옥살이를 하고도 아직도 과태료를 물지 않고 사는 부끄러운 전직 대통령을 두 명이나 가진 부끄러운 국민이 아닌가.

경제인들도 마찬가지. 과연 이익의 사회 환원이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는지, 또 얼마나 그럴듯한 말로 오용 또는 남용되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안다. 그런 인식이 당연한 것처럼 상식화 되어있는 세상에 정계 재계를 두루 섭렵한 그분이 ‘변변한 집 한 채 없이’ 살았다니 얼마나 신기한 소식인지 모르겠다. 요즘처럼 혼탁한 정치판이나 권력자 지도층의 세계에서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혹시 꼼수놀음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나는 여전히 정치는 물론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잘 모른다. 그러면서도 모르는 사이에 흔하게 당했던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에는 상당히 익숙하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배신을 당하고 있는 중이다.

 

 

 

 

 

 

 

 

 

돌이켜보면 그가 포철에서 물러나고 정치에 입문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은근히 ‘그는 부정한 짓을 저지르는 정치인은 안 될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졌었고, 부디 여느 정치인들처럼 부정한 짓으로 물러나는 뒷모습, 앞과 뒤가 다른 모습을 보이지 말았으면 하는 나 나름의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 기대를 어긋나지 않게 해주셔서 오히려 가슴이 훈훈하다.

변변한 집 한 채도 없이 살면서도 역시 철강왕 답게 ‘포스코가 더 크게 성장해 세계최고가 되길 바란다’는 유언을 남기셨다니, 과연 그분은 눈빛만큼 맑게 사셨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멀리서나마 믿고 있던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그분이 얼마나 감사한지. 떠나보내는 아쉬움과 함께 배신당하지 않은 신선함으로 더욱 숙연해지는 새벽.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진솔한 마음으로 드리는 이 한 마디가 단 한 번도 만나 뵌 일 없이 믿었던 분에게, 그리고 ‘포항제철’을 아는 대한민국의 한 사람으로서 바치는 마지막 헌사이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2011년 12월 14일. 새벽1시에. 토론토에서><20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