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칼럼-아름다운 말의 어원이 되자 * 권 천 학

천마리학 2011. 5. 10. 10:30

 

 

아름다운 말의 어원이 되자 * 권 천 학

 

-어쩜 그렇게 무바라크 할까?

시대의 환경에 따라 새로운 말과 말의 새로운 표현이 생기는 법. 어원을 따라가 보면 그 말의 배경과 그 말이 생긴 시대의 양상을 대충 알 수가 있다. 고사성어의 어원들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말은 곧 생각이며 행동의 근거이므로 시작이며 결론이기도 하다.

‘너 참 무바라크 하구나!’

눈치 없이 구는 사람이나 분위기 파악 못하는 사람, 비켜나야 하는데 비켜나지 않는 사람, 눈치 없이 들러붙어있는 사람을 빗대어 사용되는 새로운 말이다. 장기집권의 부패와 억압에서 벗어나 민주화를 이루고자하는 염원으로 들끓는 이집트 국민들의 봉기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권좌에서 물러나지 않으려고 18일 동안 전전긍긍 시일을 끄는 무바라크 대통령의 모습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끝내 손을 들고 말았지만. 결국 무바라크 대통령은 ‘무바라크 하다’는 곱지 않은 말의 어원이 되고 말았다.

 

 

 

 

 

 

2008년, 미국의 한 TV시사프로 진행자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버락 오바마를 오레오(Oreo-겉은 검고, 속은 하얀 쿠키의 한 종류)로 비유하여 논란이 일기도 했었다. ‘외모는 흑인인데 의식구조는 백인’인 사람을 비꼬아 표현한 말이었다. 미국식 사고방식을 가진 동양인을 ‘바나나’라고 낮춰 부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 후에 미국인들 사이에 ‘You (are) so Obama! (오바마 스럽다)’는 표현이 유행하면서 UCLA가 발행하는 여섯 번째의 속어 사전에 등재되기까지 했다.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와 비교하면 ‘무바라크 하다’는 30년의 호사가 빚은 ‘가문의 치욕’이자 ‘삶의 치욕’이 되고 말았다.

두 해 전, 나는 나의 블러그에 한국의 정치현실에 대한 에세이 몇 편을 발표한 일이 있었다. 평소 정치에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문외한이기도 한 내가 그 무렵에는 팽배해가는 정치적 불만과 부조리에 대하여 듣게 되고, 느끼게 되어 쓴 것들이었다. PD수첩 사건에 대한 내용, 사대강 사업과 대운하사업 그리고 강남에 세워질 뉴 롯데빌딩에 대한 글들이었다. 그 중에 ‘명박스럽다’라는 말이 생길 수 있도록 바라는 내용의 글도 포함되어 있었다. 주로 일반적인 내용의 에세이만을 써오다가 정치에 관련된 에세이를 연달아 쓰게 된 것은 모두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서였고, 현실적으로 그럴 만 한 단순한 우연이기도 했다. 특별한 의도나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생각을 썼을 뿐이니까.

 

 

 

 

 

그러던 8월 초 어느 날, 하루 평균 삼천 명 내외의 방문자가 드나들던 나의 블로그가 갑자기, 열 명 이하로 뚝 떨어졌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사이트의 관리자에게 알아봐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주변에서 ‘센서(검열)’를 직감하며 염려했지만 나는 설마 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내 글 속에서 염려했던 것처럼 정말 독재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더욱 증가시켰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조처를 취하거나 그럴 의도도 전혀 없었다. 오히려 내 블러그가 검열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그냥 영문 모르게 겪으면서 앞뒤상황을 살펴보고, 여기저기 알아본 결과 주변사람들의 짐작대로 검열에 걸린 것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그러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금은 하루 오십 명 내외의 방문자들이 드나들고 있다.

내가 쓴 에세이들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 나라에 대한 희망사항을 이야기한 것이었는데, 유포되어서는 안 될 가시라고 여겨진 모양이었다. 국민으로서 당연히 불평도 할 만하고, 건의도 할 만한 일 아닌가. 다소 쓴 소리 일망정 그것은 개인의 기본 권리이며 국민으로서 최소한의 발언권을 구사한 것이었다는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결국 독재가 되고, ‘당나귀 귀’가 되고 말 것이다. 말을 못하게 막을 것이 아니라 좋지 않은 말이 나오지 않도록 신뢰를 이룩하는 것이 먼저다.

 

 

 

 

 

 

어찌됐던 말이 가진 의미가 중요하다는 것은 생각 있는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국가든 개인이든 간에 말에 예민하다. 그것이 곧 말 무서운 줄 안다는 뜻도 된다. 행동도 말과 같아야 신뢰가 생기는 법. 당연하고 또 당연하다. 쇠귀에 경 읽기가 되어서도 안 될 것이며, 또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가 되어서도, ‘무바라크’ 해서도 안 되겠다. 이형기 시인의 시처럼 ‘떠날 때를 알아서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지금 우리의 주변에도 분명 ‘무바라크 한 사람’이 있다. 다시 한 번 입목건신(立木建信)의 고사를 떠올리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신뢰를 위하여서, 아름다운 뒷모습을 위해서, 그리하여 아름다운 말의 기원이 되기 위하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