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수필-죽음, 당하기와 맞이하기 * 권 천 학

천마리학 2011. 5. 6. 15:19

 

 

 

죽음, 당하기와 맞이하기 * 권 천 학

 

 

 

요즘 일본에서 ‘행복한 돌연사’를 바라는 여행상품이 인기라고 한다. 아사히신문이 전한다는 이 기사에 의하면, 노인들이 유명사찰을 돌며 갑자기 죽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여행상품이 화제가 되고 있으며 여행상품에 포함된 장소 중 가장 유명한 곳은 나가노현(縣)의 핀코로 지장보살이라고 한다. ‘핀코로’는 일본어로 원기가 넘치는 모양을 가리키는 뜻이라니까 우리말로 바꾸자면 ‘팽팽하다’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여기에 갑자기 죽는다는 의미의 코로리를 합쳐서 ‘건강하다가 갑자기 죽는다’는 의미의 신조어가 된다. 말하자면 ‘노인의 돌연사’인 셈이다.

돌연사 여행상품이라니. 웃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정작으로는 웃을 수가 없다. 누구도 건너지 못할 강, 죽음까지 미끼로 한 여행사의 상술과, 보장이 없음을 알면서도 매달리는 인간의 나약함을 생각하며 웃음이 나오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가장 심각한 명제인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웃을 수가 없다.

우리 주변에도 ‘구구 팔팔 이삼사’라는 속어가 노인들의 건배사로 떠돌고 있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일 앓다 쉽게 죽기’. 그것 역시 죽음에 대한 비장함을 우스개로 희석시킨 말임에 분명하다.

노년이 되면 누구에게나 가장 큰 공포로 다가서는 죽음, 누구도 말릴 수도 거역할 수도 없고, 해결하지 못한 근원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지만, 알기 때문에 웃으면서도 웃을 수만은 없다.

죽음!

더 말할 것도 없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인간의 운명이다. 인간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생명에게 다 해당되는 화두이다. 민족도 나라도 필요 없다.

 

죽음!

그 실체는 두려움과 절망이다. 살아 움직이던 생명활동을 그쳐야한다는 두려움과 차지하고 있던 공간이 사라지는 것, 즉 내 존재를 지우며 한 세상을 마감해야 한다는 절망. 살면서 느껴왔던 수없이 많은 두려움과 수없이 겪었던 절망과는 또 다른 두려움과 절망이다. 다시는 되 돌이킬 수도, 고쳐 살아볼 수도 없고, 다음이라는 보장 또한 없다. 거부할 수 없이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것. 그래서 의학에 매달리고 종교에 매달리고… 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그야말로 준엄한 자연의 순리에 따를 수밖에. 막막하다. 그래서 돌연사여행상품도 호응을 받게 되고, ‘99 88 234’도 유행할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흔히 말하고, 이미 생각한 그 문제를 또 다시 생각해본다. 어차피 받아들여야한다면 조금이라도 마음 편하게, 조금이라도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장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죽음을 기왕 받아들여야 한다면 당하기보다 맞이하는 게 최선 아닐까? 얼핏 비슷하게 생각될지 모르나 사실은 엄연히 차이가 있다. 크다.

당하는 것이 ‘닥쳐오는 일을 순서에 의하듯 겪어야 하는 것’이라면, 맞이하는 것은 ‘뜻을 이루고 난 후 홀가분하게 순서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할까. 거기에는 ‘싫지만 내 의사와는 달리 어쩔 수 없이’와 ‘할 일을 다 하고 난 후의 가뿐함으로’라는 차이가 있다. 죽음에 대한 준비 없이 망연히 살다가 때 되어 닥쳐서 치룰 일이 아니라 죽음에 앞서 미리 삶을 경영하면서 후회가 적도록 준비하는 것, 즉 ‘준비된 죽음’이다.

말이야 쉽지만 어려운 일이고, 나 또한 그럴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다. 그래서 처음부터 차근차근, 최소한의 경우부터 생각하면 어떨까. 예를 들면 누구에게나 두려운 죽음을 어떤 사람은 젊어서 죽고, 어떤 사람은 사고로도 죽는데 타고난 인간 평균의 수명을 누린 후 노년에 이르러서 죽는 것은 행운 아닌가, 거기에 잘 보낸 노년기까지 있다면 죽음을 조금은 기쁘게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잘 보낸 노년이야말로 가장 큰 축복일 것이다.

 

 

잘 보낸 노년.

비록 쇠퇴기에 접어들었지만 몸과 마음을 바로 쓰고, 자신과 남을 위하여 쪼개어 쓰는 일. 자신을 위한 일과 남을 위한 일을 병행할 수 있다면 잘 보낸 노년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깨달음을 얻는 여행이나 해보고 싶었던 일, 다소 사치스러워보일지라도 해보면서 그 동안의 삶을 돌아보고, 정리해나간다.

공적으로는 젊음을 거치는 동안 쌓아진 지혜와 마음의 여유로 주변을 밝히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내면에 깊이 스며있는 욕심에서 벗어나는 일이 가장 우선이다. 갈등과 초조함으로 아파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그 마음을 쓰다듬어 주고, 용기를 내라고 등을 다둑여주는 손이 돌연사를 바라며 합장하는 손보다는 훨씬 덜 초라하리라. 아니, 아름다우리라.

 

<2011, 2, 16, 수, 새벽 3시, 토론토>(12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