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노부모 재력에 따라 달라지는 하이웨이 풍경

천마리학 2010. 3. 17. 14:16

 

 

 

 

<시사칼럼>

 

 

노부모 재력에 따라 달라지는 하이웨이 풍경 * 권 천 학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흩어진 부모님을 비롯하여 형제자매들이 모이는 시간이 된다고 한다. 마치 우리나라의 추석쯤으로 혹은 우리나라의 5월에 있는 ‘어버이날’이나 ‘가정의 날’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어버이날’이나 ‘가정의 날’보다는 가을의 ‘추석’에 온가족이 더 잘 모이는 것과 같이, 미국도 5월과 6월에 각각 ‘어머니의 날’과 ‘아버지의 날’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가족이 모두 모이는 것은 11월의 ‘추수감사절’이라고 한다.

이때가 되면 뉴욕과 플로리다를 잇는 95번 하이웨이는 부모를 찾아 내려오는 자녀들의 자동차행렬로 트래픽은 이룬다고 한다. 추석에 우리나라의 서울에서 부산이나 광주 등 지방 도시로 이어지는 고속도로가 꽉 막혀 평소의 2, 3배의 시간을 소비해야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요즘 세태가 잘 드러나는 기사 한 편을 보았다.

가족총회가 열리는 추수감사절에 부모가 재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자녀들이 부모의 집을 찾느냐? 아니면 부모가 자녀의 집을 찾느냐? 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뉴욕과 플로리다를 잇는 95번 하이웨이나 우리나라의 서울에서 부산이나 광주 등 지방 도시로 이어지는 고속도로의 붐비는 정도 혹은 상행선과 하행선의 통행량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미 체감하고 있는 일이긴 하지만 만감이 교차하는 고개 짓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 부모가 재력이 있는 경우는 자녀들이 부모의 집을 찾는다고 한다. 말하자면 미래에 있을 재산의 상속문제에서 괘씸죄(?)에 걸려 하자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열심히 효도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부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자녀들 간에 보이지 않는 효도전쟁을 벌이기도 하고 부모는 큰소리치면서 손자들을 만나게 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부모가 재산이 없어 자녀의 부양을 받는 경우에는 반대로 부모가 자녀의 집을 방문하게 된다고 한다. 명분은 가족총회로부터 ‘부모님 고생을 시키지 않는다’는 것으로 자녀가 보내준 비행기 표를 이용하여 부모가 뉴욕이나 워싱턴에 있는 자녀의 집을 방문해야 하는 것이다. 생활비를 지원받기 때문에 가족회의를 자녀들이 리드하고 자녀의 눈치를 보면서 손자들과 놀다오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와 다를 바 없다.

우리의 경우, 전에는 전통적으로 제사를 지내고 부모님을 찾아뵙고 가족과 만나기 위해서 부모님이 계시는 지방으로 자녀들이 내려가는 것이 정해진 순서였지만 언제부턴가 이 순서가 바뀌기 시작했다. 서울이나 대도시에서 사는 자식들이 바쁜 관계로, 자식들에게 폐가 덜 되기 위해서, 음식준비나 가족모임에 대한 신경을 덜 쓰게 하기 위하여 등 그럴 듯한 명분이 뒤따른다. 이 명분들이 당연하지 않은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리고 마음에 흡족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손톱만큼이라도 자식에게 도움 되게 하려는 부모마음으로, 자식에게 눈꼽만큼이라도 짐이 되지 않으려고, 물려줄 재산이 없어 자식의 눈치를 보아야하는 늙은 부모의 입장으로 그 바뀐 순서에 기꺼운 척 응하는 것이다. 명절만 되면 며느리의 시집살이가 들먹여지지만 사실 근래에 와서는 ‘시어머니의 며느리살이’가 더 맞는 표현이 되고 있다. 그 미묘한 찬바람을 뉘라서 막을 것인가.

 

 

 

 

 

 

 

요즘세대에 간혹 기특하게도 부모를 모시고 사는 자녀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경제상황이 나쁘다보니 오히려 부모와 함께 사는 자녀가정이 늘어났다. 그러나 면밀히 관찰해보면 부모를 모시고 사는 것이 아니라 데리고 사는 경우가 많다. 또 부모를 모시는 이유도 부모를 생각해서라기보다 자신의 자녀들을 생각해서인 경우가 많다. 겉으로는 부모를 모시고 살면서 내용상으로는 집안일을 거들거나 손자들을 돌보는 일이 부모에게 짐으로 주어진다. 집안일을 거드는 것도 부모가 자발적으로 거드는 것과는 다르다. 집지킴이 개처럼, 아기 봐주는 내니처럼, 부모를 고용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만약 부모가 재력이 튼튼하다면 자식들의 태도가 다르다. 부모의 눈치 살피면서 부모의 눈밖에 벗어나지 않으려고 효도경쟁을 벌인다.

이런 일들이 미국이라고 다를까?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똑 같다.

일찍 혼자가 된 한 친구가 한 달이면 두세 번씩 손자를 보러 가는데, 갈 때 마다 과분한 선물을 준비하는 것을 보면서 못마땅해 하곤 했다. 더구나 외아들을 둔 입장에서 생활비도 근근이 다른 곳에서 지원받아 사는 처지인데 함께 살지 않는 것부터 못마땅하다. 물론 손자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쁜 것도, 뭐든 다 해주고 싶은 마음도 안다. 그러나 형편이 여의치 않다. 외아들이므로 기를 때 금자동아 옥자동아 유난을 떨어가며 길렀었다. 그 시절엔 드문 유학 보내어 영어연수도 시켰고, 신문에 나는 고액과외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렇게 기른 외아들이건만 지금은 혼자된 어머니를 모시고 살지 않는다. 따로 살면서 손자가 보고 싶어 찾아갈 때 마다 과대지출을 해가며 눈치살펴가며 방문해야하는 친구의 일이

은근히 화가 나서 남의 일만 같지가 않다. 퉁박을 주면서도 그 친구의 마음이 얼마나 허전할까 싶어 속상하다. 씁쓸하고 쓸쓸하다.

 

 

<2009년 11월 28일 토, 토론토에서//14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