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법정스님과 오이지 그리고 찻주전자

천마리학 2010. 3. 13. 00:48

 

 

 

아, 가시다니!

 

바로 어제저녁에 법정스님의 이야기를 썼습니다.

<무소유에 대하여>!

청탁 받은 월간불교에 보낼 원고였습니다.

그 글 속에 지금 제가 겪고 있는 일과 스님의 무소유에 대한 이야기를 섞어 썼습니다.

그러면서 스님의 쾌유를 비는 기원으로 글을 마감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스님의 입적소식을 듣고 망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시 펜을 잡았습니다.

<법정스님과 오이지 그리고 찻 주전자>, 오래 전 스님과 얽힌 저의 추억 한 점입니다.

많은 대중들의 가슴속에 맑은 모습으로 오래 기억될 스님!

그 곳에 가셔서도 맑디 맑게 계실 스님!

성불하십시오!

 

  

   

법정스님과 오이지 그리고 찻주전자 * 권 천 학

 

 

 

 

 

어제 저녁, 청탁받은 ‘월간 불교’로 보낼 이십 매 짜리 에세이를 썼다. 제목이 <무소유에 대하여>다. 그 글 속에 요즘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과 함께 법정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섞었다. 그리고 위중하신 지금, 부디 쾌차하시기를 바란다는 말로 끝맺음을 했다.

그런데 오늘, 법정스님께서 길상사에서 입적하셨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한 동안 멍해졌고, 잠시 가다듬어 스님의 명복을 빌었다.

 

나는 법정스님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아는 게 없다. <무소유>라는 책을 비롯해서 일반대중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어오셨고, 대중 세상에 떠도는 뉴스에서 건지는 정보정도, 그러니까 어느 면에서는 상식적인 내용들이기도 하다. 나는 법정스님의 유명한 저서들을 한 번도 읽지 않았다.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좋은 말씀이라는 것도 물론 알고 있다. 책을 소개하거나 선전하는 문귀들을 통하여 언듯언듯 좋은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읽어보지 않은 나 나름의 이유가 있다. 세상에 떠도는 글들만 통해서 들어도 벌써 스님의 책을 거의 읽은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스님의 사상도 마찬가지였다. 성인들이나 현인들, 어느 경지에 이른 사람들의 훌륭한 경지에 이른 분들에게서 공통으로 느끼는 말씀이나 글들에서 흔히 얻게 되는 정신적 지침, 그것들과 진배없다는 생각, 그리고 그 백분의 일쯤은 나도 스님의 사상에 동조하며 존경하며 느끼고 있기 때문에 읽지 않았다. 행여 그분이 글을 흉내 내거나 복사판이 되지 않기 위해서다. 순수하게 나의 생각으로 나의 글을 쓰고 싶어서였다.

교만하게 들릴지 모르나, 스님의 생각들을 대개는 다 이해할 수 있었다. 경지의 단계는 낮으나, 혹은 가는 길은 다르나 비슷한 생각으로 세상을 생각하고, 비슷한 눈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스님의 생각을 흉내 내거나 이용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기 쉬움을 우려해서다. 솔직히 말하면 현실에 얽매어 못할 뿐이지 나도 스님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다. 나 외에도 그런 사람 많을 거다. 어떤 땐 스님이 전생의 도반 같은 생각을 할 때도 있고, 또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우리는 다 도반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스님을 직접 만나 뵌 일이 딱 한 번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만난 것이 아니라 우연히 스치게 된 경우이다. 80년대 중반 쯤. 여주에 있는 ‘김기철 요’에 도자기를 배우러 매주 한 번씩 다닐 때였다. 어느 날, 여름이었던 것 같다. 그날 김기철 선생님과 차를 마시며 도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스님이 방문하셨다. 깡마른 체구에 밀짚모자에 조그만 바랑을 걸치고 계셨다. 지나는 길에 잠깐 들렸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이십년도 더 된 이야기이니까 그 때의 스님모습은 훨씬 젊었을텐데, 어쩌다 인터넷이나 신문 같은데서 뵙게 되면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이 내 느낌이었다.

 

김선생님이 나를 소개하셔서 스님과 나는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누면서 차를 마셨다. 나야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 대면이었지만 김기철선생님과는 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임을 알 수 있었다.

스님은 그때도 매우 맑으셨다. 그때쯤이 아마 이미 무소유로 유명해졌을 때가 아닌가싶다. 차를 마시며 도자기들을 둘러보시고 만져도 보시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나야 그저 두 분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고 어쩌다가 스님께서 말을 걸어오시면 간단히 답하는 정도였다. 그때 들은 이야기로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다. 그때 나는 연잎을 빚어 촛대를 만들고 사발과 찻잔 종류를 연습하는 초보과정이었는데 내가 빚은 사발들을 보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 사발에 시원한 냉수 한 그릇 마시면 좋지요.”

“아 그렇구말구요, 컵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김선생님이 내 대신 맞장구를 쳐주셨다.

“여름에 이렇게 사발에 시원한 샘물 그득 붓고 밥 한 술 말아서 소금절이 오이지 한쪽 얹으면 그만이지요. 난 그걸 좋아합니다. 더위도 싹 가시고 속까지 시원해집니다.”

그때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어릴 적 시골에 살 때 농사철이 되면 이웃 아저씨들이 막사발에 꽁보리밥, 물 말아서 생된장에 꾹꾹 고추 찍어 먹던 일이 생각났고, 그 이야기를 조심조심 섞었던 것 같다.

“지난 번에 말씀하셨던 그 물건 스님 드리려고 가져다 놨습니다”

김선생님의 말씀으로 유추해보면 이미 그 전에 어느 전시회에서 도자기 한 점을 스님에게 드리기로 낙점을 해 놓으셨던 모양이었다. 도자기로 빚은 찻주전자였다.

“어, 그래요?”

하시더니 김선생님이 가져오신 도자기 찻주전자를 이리저리 살펴보셨다. 키가 20센티 정도의 몸집이 통통한, 내 눈엔 별로 특출나 보이지 않는 도자기 찻주전자였다.

“좋~습니다”

하시고는 그 도자기를 제자리에 도로 갖다 놓으셨다. 그리고 두어 시간쯤 머무르셨을까?

“그거 잘 보관해두세요.”

하시고는 후여후여 소맷자락으로 바람 날리며 여름날 햇볕사이로 걸어나가셨다.

 

 

 

 

 

 

 

나는 그날 돌아와서 처음으로 소금절이 오이지를 담갔다. 그것이 내가 담근 첫 오이지였고 그 때부터 나는 오이지를 좋아했다. 그 오이지가 익자 가끔 사발에 물 말아서 오이지 한쪽씩 얹어먹기도 했다. 스님 말씀대로 다른 반찬 필요 없다. 역시 그 맛은 먹어본 사람만이 안다. 스님은 일찌기 그 맛을 알고 즐기셨구나 하면서 그때 나는 스님의 청빈낙도를 실감하게 되었다.

 

스님께서 원하시던 도자기를 잘 보관하세요 하며 두고 가셨을 그 당시에는 두 분이 잘 아시는 사이이니까 다음에 오셔서 가져가시겠거니 하고 무심히 흘렸다. 그러나 후에 생각해보니 그것도 무소유의 실천이 아니었을까?

주는 선물을 받기는 하되 가져가지는 않으시고 그 자리에 남겨 두시는 것. 마음만 받아가는 것. 바로 그 청빈의 의지 아니셨을까 싶다.

 

이제 스님께서 가셨다. 여전히 무소유의 모습으로.

머리맡에 즐겨 읽던 책이 몇 권 남는다면 아침 저녁으로 신문이오 하고 신문을 배달하던 꼬마에게 주고 싶다고, 헌옷이 된 육신을 벗은 후에 훨훨 날아서 가고 싶은 곳이 어린왕자가 사는 별나라 같은 곳이라는 맑디 맑은 유언을 남기시고.

 

스님, 그곳에 가셔서도 찬물에 밥 말아서 오이지 한쪽 얹으시겠지요?

부디 해탈하십시오.

 

<2010년 3월 11일, 토론토에서/ 16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