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토정비결 보며 여유롭던 설날 * 권 천 학

천마리학 2010. 2. 19. 02:53

 

 

 

토정비결 보며 여유롭던 설날 * 권 천 학

 

 

‘그러고 보니 내일이 언니 생일이네? 멀리서나마 생일 축하해’

한국에 있는 막내 동생으로부터 받은 메일이다. 사실 며칠 전 양력생일 날짜에 맞춰 이곳에서 가족끼리 조촐한 생일축하를 이미 받은 터였다. 한국사람이면 대개는 양력과 음력 날짜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 생일로 정했을 것이다. 나의 경우, 양력생일은 대외용, 음력생일은 대내용으로 사용해 왔다. 처음에 친구들에게 알릴 때 양력 생일로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음력생일을 쳐주기 때문에 결국 나는 두 번의 생일상을 받게 되다가 이곳 토론토에 와서는 모두가 양력날짜를 이용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양력생일을 쇠게 되었다. 양력과 음력, 부모님 세대에는 주로 음력을 사용하여 왔고, 요즘 세대인 자식들은 주로 양력을 사용하고 있어서 나는 연기(年紀) 사용에 있어서도 양력과 음력이 병행된 낀 세대인 셈이다.

며칠 전에도 음력날짜가 궁금한 일이 있었다. 신문기사에서 ‘설 연휴를 앞두고…’ 하는 제목의 기사를 읽으면서 벌써 설날인가? 언제지? 하고 스치는 생각으로만 지나가고 말았다. 그러다가 음력생일을 기억하는 동생의 메일을 받고 나서 ‘날짜가 어떻게 되지?’ 하고 다시 음력이 생각되어 헤아려보려 했지만 수월치가 않다. 한국에서 가져온 음력까지 표기되어있는 작년도 달력이 이제 유효기간이 경과된 구력(舊曆)이 되었기 때문이다. 작년 달력의 곳곳에 가족의 생일, 제삿날, 친구의 생일, 기념일 등을 표시해두어 챙겼었다. 이제 연말이 지나 새해달력을 사용하게 되었으나 음력표시가 되어있는 금년도 달력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아무리 생활이 양식화(洋式化) 되었다 해도 이처럼 아직도 곳곳에 스며있는 음력. ‘음력’ 하면 ‘설’이 떠오르고 ‘설’하면 떠오르는 설 풍경 중의 하나가 ‘토정비결’이다. 따라서 ‘토정비결’ 하면 떠오르는 것이 한국에서 보낸 어릴 때의 설날 풍경이다. 한국도 요즘이야 많이 달라졌지만 그 시절에는 토정비결 보는 것이 유행이었다.

해마다 정초가 되면 어른들께서 토정비결 책을 펼쳐놓고 돌아가며 가족들의 생년월일에 맞춰서 온 가족의 일 년 운세를 보아주셨다. 온 가족이 모두 방안에 모여 앉아 떡이며 식혜며 설음식을 먹어가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정담을 주고받던 그 시절, 구성지게 율(律궤)을 넣어가며 궤(軌)를 읽어주시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나오는 궤에 따라 가끔씩 함박웃음도 터트리고 염려도 하고 머리 맞대고 풀이도 한다. 좋지 않은 궤에 대해서는 그 일 년 동안 조심할 행동강령에 대한 설명과 조언을 해주시기도 했다. 요즘처럼 개개인의 운세가 철저히 개인적으로 비밀보장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일 년 운세가 온 가족 모두에게 알려지고 함께 즐겁고 함께 걱정해주는 열려있는 가족문화공간이었다. 동쪽으로 가면 귀인을 만난다느니, 칠팔월이면 물을 조심하라느니…… 지금 생각하면 고리타분하기도 하고, 황당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해석불가한 궤도 있지만 그땐 그 말들을 믿었다. 내가 중학교에 특대생으로 합격했을 때 부모님께서 그 해 나의 토정비결이 ‘화살 한 발로 남산 호랑이의 네 다리를 다 꿰어 맞추는 운’이라고 말씀하셨던 기억도 난다. 시골 초등학교에서 큰 도시에 있는 중학교에 그것도 특대생으로 합격한 일이 그때는 대단한 경사로 쳤던 모양이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서 사주나 운세 보는 것도 진화하여 인터넷을 이용하긴 하지만 옛날 온 가족이 둘러앉아 공공연하게 토정비결을 보는 것이 연례행사처럼 되어있던 그 시절이 아련하다. 비록 들어맞지 않는다 해도 큰 문제 될 것 없고 나쁜 궤가 나오면 주의를 다짐하면서 온 가족이 웃으면 보내던 훈훈한 시간,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은 단순히 추억이서가 아니라 과학과 속도에 지쳐서일 것이다.

 

 

 

 

 

 

 

 

과학적인 것이 좋고 합리적인 것이 좋긴 하지만 너무나 과학과 합리만을 쫒는 생활을 하다보면 때로 더 피곤해지기도 한다. 휴대폰으로 세배하고, 문자 날려 안부전하고, 인터넷으로 점을 보는 요즘의 생활이 메말라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때로 비과학적인 생활이 여유로움을 주고 비합리적인 방법이 편안하게 해주기도 한다. 자로 잰 듯 반듯반듯한 네모는 네 개의 모서리가 있고 그 모서리가 우리를 넘어지게 한다. 때로 두루뭉실 뭉툭함이 우리에게 너그러움을 주고 휴식을 준다. 간편 위주 속도위주의 생활방식 역시 각박해서 매마를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간편 찾다가 사람과 사람 사이 정이 멀어지고 속도 쫒다가 사고 나기 십상이다.

다들 바쁘고, 늘 바쁜 현대인들에게 빈틈없는 생활에서 잠시 빠져 나와 설날만이라도 토정비결도 보고 옛날식 음식도 맛나게 나누어 먹던 어릴 때처럼 어른들 모시고 느긋하게, 아이들 재잘거림 들으며 즐겁게 보내는 시간을 보내는 것도 누적된 피로를 풀고 새날을 약속하는 약(藥)이 되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2010년 1월 25일 월, 토론토에서/13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