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남아선호 사상에 대한 만감

천마리학 2010. 2. 8. 11:33

 

 

 

 

 

남아선호 사상에 대한 만감 * 권 천 학

 

 

 

 

‘남아선호사상이 무너지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읽었다. 뒤늦은 감이 있는 기사이기도 하다. 이미 남아선호사상이 흔들린 지 오래고 여러 방면에서 딸들이 아들들을 앞지르는 일이 많아져서 딸들이 아들보다 낫다는 말을 듣는 일도 낯설지 않고, ‘아들 가진 부모는 자동차 타고 국내여행하고, 딸 가진 부모는 비행기 타고 해외여행 한다.’는 유머 역시 구식이 된지 오래이니까말이다.

딸 하나 기른 나에게 ‘안됐다, 아들 하나 더 낳지 그랬니?’ 하던 친구들이 이제는 ‘잘 했어, 아들 낳은 것보다 열 번 낫다’로 바뀌었고, 나 역시 딸 가진 덕을 톡톡히 보고 있으니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는 중이다. 뭐 쾌재랄 것까지 있겠느냐고 누군가는 말할지 모 염려의 르지만, 난 분명 쾌재다. 왜냐하면 나도 남아선호사상의 피해자이기도 하니까.

딸 하나만을 기르고 있는 나를 측은하게 생각하는 주변사람들이 많았었다. 나의 부모님들이나 형제들까지도 노골적으로 말은 안 해도 그런빛을 보인 것이 사실이었다. 부모님들은 나중에 너 늙으면 몸을 의탁할 아들이 없어서 어찌 할거나? 하는 염려였고,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안됐구나 하는 것이었다.

형제들 중에는 아들만 있는 형제도 있고, 아들과 딸을 둔 형제도 있는데, 아들과 딸을 고루 둔 형제들이야 뭐 말할 것 없이 이렇게 되나 그렇게 되나 별상관 없겠지만 아들만 둔 형제는 딸 하나만 기르는 나에게  ‘형님, 딸 하나여서 나중에 쓸쓸해지면 어떡해요?’하는 염려였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내가 아들만 둔 형제에게 ‘딸이 없어서 무슨 재미니? 이제 나이 들면 더 심심해질 텐데…’하고 말하면 ‘그러게 말예요.’하고 그 말에 맞장구를 치는 것을 보면 그도 역시 딸이 그리운 모양이고 또 아들보다 딸이 더 좋다는 것이 실감되는 현실임이 분명하다.

시대가 바뀌어서 늙으면 몸을 의탁할 아들이 없음을 걱정하신 부모님의 염려 또한 기우가 되어버렸다. 지금은 늙어서 자식들에게 신세 진다는 생각보다는 스스로 노후를 책임진다는 의식이 훨씬 많이 퍼져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딸과 함께 살고 있지만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기사의 설문조사 내용을 보면 ‘아들이건 딸이건 상관없다’, ‘아들을 원한다’, ‘딸을 원한다’의 세 항목이 물론 약간씩의 차이는 있지만 고루 30% 전후의 비율로 조사되었다. 의식이 많이 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들보다 더 딸을 원하는 쪽은 어머니보다 오히려 아버지인 것으로 나타났으니 이는 남성이 여성보다 사회변화현상을 빨리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며, ‘대를 잇는 것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으로 풀이 되고 있다. 남아선호 사상의 근원적인 원인은 대를 잇는다는 것이었으니 맞는 말인 것 같다. 그래서 그 동안 페미니스트들은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남녀평등 차원에서 장자나 아들로 규정되어있는 호주상속제도를 바꾸느라고 목청을 높이지 않았던가.

 

 

 

 

 

 

 

조사내용에서는 남아선호사상이 무너지고 있는 원인 중에 딸이 아들보다 기르기 쉽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작용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맞다. 양육하고 교육시키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딸보다 아들에게 들어가는 것을 이유로 분석하고 있지만, 내 생각은 다른 데 있다. 옛말에도 ‘첫딸은 살림밑천’이라 했다. 물론 이 말은 아들을 낳지 못한 서운함을 간접적으로 위로하는 의미가 포함되어있긴 하지만, 실제로 가사를 돕거나 부모의 양육을 돕는 일도 아들보다는 딸이 훨씬 낫다는 의미이다. 그런가 하면 가난하던 시절, 일찍 돈 벌러 도회로 나가 공순이가 되어 가난한 가정경제를 일으켜 세우는 몫을 해낸 것도 대개는 딸이었다. 사실 이 부분도 딸이 그렇게 길러졌기 때문이지 어디 아들이라고 가사나 부모의 힘든 일에 무심할까. 어려운 상황에서도 아들은 일단 아껴두고 딸을 먼저생활의 일선으로 내모는 소위 '남아선호사상'의 일면이기도 하다.  

어떻튼, 만일 내가 딸 대신 아들 하나를 길렀다면 지금 내가 편안할까? 생각해본다.

딸과 함께 산다고 해서 매사 모두 편할 수는 없다. 아들과 살아도 마찬가지다. 살다 보면 가족 간에 트러블이 생길 수도 있는 일이고, 또 가족에 따라서는 의견이 맞지 않아 일어나는 트러블로 인하여 심각해지는 경우도 종종 있으므로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나는 아들과 함께 직접 살아보지 않았으므로 뭐라 단정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여러 가지로 미루어 짐작해 볼 뿐이다.

그 짐작으로, 물론 딸이건 아들이건 간에 그 상황 따라 다르겠지만 딸과 함께 사는 것이 아들과 함께 사는 것보다는 좀 더 편안할 것 같다.

가정해 본다.

만약 아들과 함께 산다면 나는 사위 대신 며느리와 함께 살게 될 것이다. 며느리와 사위는 뭐가 다를까? 어차피 사위와 며느리는 내 피가 섞이지 않은 인륜에 의해 맺어진 관계다. 며느리와 사위 나름이라고 해야 정답이겠지만 짐작으로는 며느리보다는 사위와 함께 사는 편이 더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딸과 어머니는 같은 여자이므로 공감대 형성이 좀 더 넓고 또 내가 기른 딸이므로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도 많고 따라서 커뮤니케이션이 잘 이뤄질 수 있다. 그러나 며느리는 남의 집에서 데려온 사람이므로 속내를 속속들이 알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공유한 시간 공유한 추억들이 없다 보니 아무래도 공감대가 딸만 못할 것은 뻔한 일이고 게다가 지금까지 나만의 아들이었던 사람을 며느리의 남편으로 이양해야 하는 섭섭한 마음도 심리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런 이유로 딸이나 며느리가 다 같은 여자이긴 하지만 딸은 공범이 되고 며느리는 적군이 되기 십상이다. 고로 딸과 함께 사는 것이 더 편할 것이다. 물론 그 점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깨놓고 말하자면 이유는 더 현실적인 데 있다.

 

 

 

 

 

 

 

 

그것은 바로 집안의 실세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요즘 가정의 일반적인 추세로는 집안의 실권은 아내이다. 그 아내가 바로 내 딸이라는 점이다. 가부장적인 옛날과는 달리 요즘 세상은 아내의 발언권이나 영향력이 강해진 데 반해서 남편들의 위력은 낮아졌음은 자타가, 그리고 쌍방이 다  인정하는 바가 되었다. 남편이 아내의 비위를 맞춘다든지 아내의 의견을 존중한다든지 하는 인격 내지는 권리규정에서도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아기의 기저귀를 갈아주거나 세탁기를 돌리거나 설거지를 하는 일 등 과거에는 상상도 못했던 자잘구레한 가사도 지금은 남편들이 하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만일 남자가 밖의 일만 하거나, 또 그 일을 우선으로 친다면 ‘겁 없는 간 큰 남자’가 되어 집안에서의 발언권은커녕, 쫒겨 날 판이다. 그러니 자연 집에 돌아와서 가사를 돕거나 아내의 눈치를 살펴가며 가정의 주변인으로 물러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 모든 것이 민주화 내지는 남녀평등의 이름으로 여성의 인격이 존중되어지고 있다는 증거다. 권력앞에서는 아들 아니라 남편인들 별 수 없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아하, 깨소금!

그 가정권력의 중심이 바로 아내가 바로 나의 딸이므로 따라서 나는 권력의 측근이기 때문에 며느리와 사는 것 보다는 사위와 사는 것이 좀 더 편할 것이다. 며느리와 산다면 가정권력의 중심은 며느리이고 나는 주변인으로 전락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남편에게 딸린 또 한 개의 짐이다. 그러니 자연 이 눈치 저 눈치, 며느리눈치에 아들눈치까지 봐야 할 입장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나는 나의 어머니가 며느리 앞에서 조심하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누구의 어머니라고해서 다를 것인가.  아무리 며느리 칭찬이 잦고, 며느리가 딸 같다고 말은 하나 속내를 보면 결국 며느리와는 자존심 대결도 있고, 자신의 입지를 위해서 며느리의 눈치도 보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안좋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당연한 현상이기 때문에. 어찌됐건 며느리 칭찬마저도 사실 따지고 보면 며느리에 대한 자기 방어의 작전이지 깊은 융화로 이루어지는 일은 드물다. 그런 세태의 반응으로 ‘며느님, 시뉘년’이라는 말도 생겼다. 모시지 못하는 어머니의 평안을 위해서 더러는 억울한 누명도 쓰고, 본의 아니게 기도 죽어가며 ‘시뉘년’이 되어줘야 했다. 눈물겨운 원조(援助)였다.

어찌됐건 남아선호의 사상이 사라지고있는 시대의 변화가 한눈에 보이고 실제 체감으로도 확실하게 알 수 있음이 사실이다. 새로울 것도 없는 당연한 사실을 다룬 구닥다리 기사의 대해서 만감이 교차하는 것은 나 어릴 때만해도 남아선호사상은 절대 바뀔 수 없는 철칙이었고, 나 또한 남아선호사상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딸이라는 이유로 모든 일의 우선순위에서 수없이 밀려났을 뿐만 아니라 기회도 혜택도 제외되거나 생략되었었다. 철칙은 철칙으로 자연스럽게 교육되어 그러려니 하며 살아왔다. 살아오면서도 늘 불만스럽고 외로웠으나 누구도 그 사실을 외면할 뿐이었다. 그게 사람 사는 법이다 하고. 그런 남아선호사상이 무너졌다니 달라진 세태를 실감하는 일에 더불어서 진즉 그랬어야지! 하며 쾌재를 부르게 된다.

 

<2010년 1월 12일, 토론토에서/ 20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