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시마을

꽃의 자서전

천마리학 2009. 10. 21. 12:44

   

 

 <시>

        

                     꽃의 자서전

                                      -맨드라미


                                        권     천     학(시인)



                              열 서너 살 쯤엔

                              레이스 달린 드레스가 입고 싶었어요


                              스무 서너 살 땐

                              흑진주가 박힌 관을 쓰고 싶었구요


                              서른 서너 살 무렵엔

                              활활 타오르고 싶더군요

 

                              그러다 마흔 서너 살이 되니까

                              빨간 인주의 낙관이 갖고 싶어졌어요

 

                              쉰 서너 살 쯤엔

                              서리에도 지워지지 않는 시 한 편 갖고 싶어요

 

                              그리고나서

                              또 다시 긴 꿈을 꾸며

                              당신의 꽃밭에서 목숨 곱게 용수 내리고 싶어요

 

 

 

 

 

 

 

<메모>

우리는 어떤 꽃이 될까?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을 믿었던 어린 시절,

밤마다 별을 헤며 쓸쓸해졌던 한 때가 있었다.

별이 되어 서로서로 비추어주자고 약속하고 다짐했던 그 시절,

세상은 참으로 꽃밭이었다.


몸이 약해서 늘 그늘에 주저앉아있던 거미 같은 손가락의 용덕이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걸핏하면 계집애들의 고무줄을 면도날로 잘라놓고 도망치며 매롱~ 하던 개구쟁이 철남이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코찔찔이 태순이는? 울보 영순이는? 말썽쟁이 기태는?

그리고 또…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 그 애는?

누구더라?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그 애는?

또, 또, 또…

이제는 모두가 별과 같은 존재들이다.

그 시절의 얼굴들을 떠올려보지만 너무나 멀리 와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릿하다.


어느 사이 우리는 너무나 멀리 와 있다. 소꿉놀이하던 그 시절로부터.

꿈을 꾸었고, 별이 되고 싶었던 그 시절로부터.

어쩌면 용덕이는 이미 별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철남이는 배불뚝이 모습으로 돈다발 세는 사장이 되어있는지 모른다.

건강한 근육을 자랑하며 산을 오르고 있을 지도 모를 코찔찔이 태순이,

우는 아이를 얼싸안고 울지 말라고 달래는 할머니가 되어있을지도 모를 울보 영순이,

밤낮으로 옳고 그름을 가리느라고 땀 젖은 법복을 입고 있을지도 모를 말썽쟁이 기태,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 그 누구누구들, 신문에 혹시 실려도 모르고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그 누구누구들, 혹시 전철 안에서 마주쳤어도 서로 알아보지 못하고 스쳐갔을지도.

너무나 멀리 와 있다. 별이 될 꿈을 꾸었던 그 시절에서.


모두가 모두로부터, 모두가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와 있지만

무엇인가가 되기 위하여 지금도 꿈을 놓지 않고 모두가 세월을 건너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건너 꿈 가까이 가면서.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이름들과, 따뜻해 질 수 있는 마음들과 마주 잡을 수 있는 손들…

삶의 꽃밭에 뜨는 별들에게 시 한 편 바치고 싶다.

 

 

 

 

                       <KOREAN> 여름호 <권천학의 시가 있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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