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회 제3부 벚꽃나무 아래서 (3)
다음날 교무실은 어젯밤 지서 방화 사건으로 어수선하였다.
“누가 겁도 없이 그런 짓을 했을까?”
“한밤중인데....”
후꾸고는 출석부를 들고 교실로 들어갔다. 아이들이 후다닥 자리로 가서 앉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조용히, 출석 불러요.”
그 때 뒷문을 열고 칠복이가 고개를 숙이며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칠복이 너 이마에 웬 혹이냐? 어제 또 싸웠냐?”
후꾸고는 고개만 푹 숙이는 칠복이에게 웃으며 말을 하였다.
“....”
“자자.... 첫 시간이 미술 시간이죠. 도화지 다 가져왔어요?”
“예.”
하지만 가져오지 못한 아이들이 더 많았다. 후꾸고는 출석부 사이에 넣어온 도화지를 빈 책상 위에 놓으며 창 밖으로 보이는 자운영 밭과 그네를 그리라고 말하였다.
재현이는 그림을 잘 그렸고 색칠도 깔끔하게 하였지만 칠복이는 크레용으로 도화지 전체를 지저분하게 만들어 놓았다.
유월의 들판은 녹색이 바다였고 하늘에는 하얀 뭉게구름이 떠 있었다.
토요일 오후 퇴근하고 돌아온 동혁은 동수가 논에 물꼬를 대는 것을 돕기 위해 나갔다.
“형님, 수고가 많습니다.”
동혁의 목소리에 얼굴을 드는 그의 얼굴이 땀에 번들거렸다. 목에 둘러진 무명수건으로 땀을 씻어내었다.
“왔능가? 동상.”
“예.”
“올해는 물이 충분치 않네 그랴.”
“물은 다 대었습니까?”
“대충은 했제.”
동수는 논둑길로 나와서 당배를 꺼내 물며 불을 붙였다. 글의 담배 연기가 바람에 흩날려 사라지고 있었다.
“해군에 간 동철은 아적도 제대할 날이 오지 않았능가?”
“편지가 없어서 궁금하시죠?”
“응. 그리고 이 전쟁도 끝나지 않으니께 말이시.”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고 다 타들어간 담배를 부벼 껐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랑가이.”
“....”
“농사를 져도 재미가 있어야제. 공출이다 뭐다 해서 가을걷이 때면 빼앗기니 말이시.”
동수의 어깨가 더욱더 무거워 보여 동혁은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 무슨 일을 할 겁니까?”
“글씨.... 물은 다 댔고 오늘은 고만할라네. 자네랑 막걸리나 한 잔 허야겄구만이.”
동수는 일어나 베잠방이를 추스르며 앞장을 서자 그도 따라갔다.
집에서 막걸리는 마시는 두 아들을 보며 어머니는 신바람이 나 채마밭에서 금방 따온 호박과 고추로 지짐을 만들어 내 놓았다.
“뜨거울 때 먹거라. 아범아, 늬 처는 아적도 몸을 풀지 않았는갑제?”
“그랬는가 보구만이요.”
“아버님은 어딜 가셨습니까?”
“임실장에서 송아지도 한 마리 사온다고 갔구만이. 아마 해가 지울쩍에야 오것제이. 어여 식기 전에 먹더라고.”
어머니는 열린 부엌문으로 들어갔고 마루 밑에 누웠던 누렁이도 냄새를 맡았는지 코를 킁킁거리며 마당으로 걸어나왔다.
“자 동상은 왜 별로 생각이 없능가? 늦게 사발을 비우능구만이.”
“배가 불러서요.”
동수가 막거릴를 따라주자 두 손으로 받아 상 위에 놓는다. 동혁은 우물가에 있는 앵두나무에 가 시선이 멎었다. 빨간 앵두가 녹색으로 잎 사이에 수천 개를 매달고 유혹하고 있었다.
“형님, 우리 앵두 따 먹읍시다. 소년시절에는 어서 익기를 바랐는데 어른이 되어서 그런가요? 빨갛게 다 익었는데도 손 하나 건드리지 않으니까, 저절도 떨어지겠어요.”
“그람 동네 아이덜 보고 와서 따 먹으라고 하제.”
“그럴까요. 어머니. 내일은 아이들더라 와서 앵두 따먹으라고 하세요.”
동혁이 어머니에게 큰소리로 말하자 부엌에서 나오며 말했다.
“늬그덜이 먹어야제이. 인자는 커서 맛이 없당가?”
“그게 아니고요. 저 많은 걸 누가 더 먹어요. 누나도 남원에서 살고 막내도 인자는 컸는지 본둥만둥 하드만요이.”
“그렇기도 혀. 서로 먹겄다고 싸우던 때가 있었는디....”
어머니는 말끝을 흐리며 부엌으로 다시 들어갔다. 어머니의 등뒤로 동혁의 어린 날이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었다.
막내는 냇가에서 옷을 빨아오는지 세숫대야를 허리께에 끼고 들어섰다.
“오빠, 대사리가 많아 잡아왔구만이.”
“우리 막내가 시원한 대사리 국물에 밥 말아 먹으라고 잡아왔구만.”
동수가 얼른 칭찬해 주자 막내 입이 함박만큼 커지며 환히 웃었다.
막내는 물이 뚝뚝 흐르는 빨래를 널고 바지랑대를 높이 들어올렸다.
“어메여. 대사리 잡아왔당게.”
부엌으로 들어가면 막내는 신이 나 떠들었다.
“다 큰 처녀가 떠든당가이.”
“어여 삶아서 오빠들이랑 대사리 먹게 해돌랑께.”
“급허기도 혀.”
그들의 잔이 아직도 오고 갈 때에 막내는 대사리를 가지고 왔다.
“아이고 시원하겠다.”
동수는 시퍼런 국물을 들이켜며 좋아하였고, 그런 오빠들을 보며 막내는 탱자나무 울타리로 뛰어갔다.
“오빠 이걸로 알갱이를 빼먹더라고이.”
오랜만에 두 오빠와 대사리를 까먹는 막내의 기분이 너무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마에 상처를 입은 민형사가 지서로 한 사내아이를 끌고 오며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이놈아. 내가 누군 줄 알고 돌로 이마를 맞춰 이놈아. 밝은 데서 늬 놈 얼굴이나 똑똑히 보자 이놈아.”
“지가 사람을 잘 못 봤다고 허잖여요.”
새총을 쥔 사내아이가 볼빛에 얼굴을 드러냈는데 칠복이었다.
“아니. 넌 아랫동네 칠복이 아녀?”
놀란 얼굴로 민형사가 말했다.
“맞당께요. 지가 사람을 잘 못 봤당께요.”
“뭣여? 그 골목은 막다른 곳이여.이놈아. 날 멍청이로 아는 것여? 시방.”
“아니.... 저 그란게 아니고요이.”
“이놈이 누구헌티 거짓말을 헐라고 그란디여? 소학교로 알려야겠구만이. 너 담임 선상님 이름이 뭣여.”
“지바 후꾸고 선상님인디요이.... 나 혼날 틴디.”
“너 같은 놈은 혼나야 혀.”
전화를 들고 손잡이를 돌리는 그가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소학교 좀 대. 여보세요. 여그 지선디요. 칠복이가 잡혀왔는디요. 담임 선상님이 지바 선상님이라는디.... 뭣요? 뭘 잘 못 혔냐구요이? 나 민형산디 글씨 날 새총으로 쐈다니께요이. 싸게 선상님이 오던지 칠복이 어머니가 오던지 혀서 일 처리하라고 혀요이.”
민형사는 씩씩거리며 전화기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칠복이와 마주 대하고 민형사는 윽박지르고 있었다.
“며칠 전에 우리 영선이헌티 쥐를 던진 것도 바로 너쟈?”
칠복이가 깜짝 놀라며 고래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가 아녀. 인마. 늬 얼굴에 씌었구만.”
“난 안 그랬다니께요. 정말이구만요이.”
“거짓말 하지 마. 이놈아.”
그 때에 후꾸고와 칠복이 어머니가 지서 문을 밀치며 뛰어들어 왔다. 두 사람의 숨이 턱에 차 있었다. 아들이 민형사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을 본 어머니는 다짜고짜 칠복이의 뺨을 후려쳤다.
“이놈이 허라는 공부는 뒷전여이. 새총 가지고 이 밤중에 싸돌아 댕기고 그려. 니가 그런 것여?”
“아니랑께. 내가 왜 그런 짓을 한당가이. 난 정말로 아니랑께.”
칠복이가 뺨을 손으로 쓸며 악을 썼다.
“민 형사님. 제가 지바 선생입니다. 칠복이 담임입니다.”
“예. 이 밤중에 놀라셨겠습니다.”
“아닙니다. 칠복이가 지서까지 왔다는 게 더 놀라운 일이죠. 하지만 제가 칠복이에 대해선 잘 압니다. 그럴 애가 아닙니다. 또래에 비해서 나이가 많지만 정의감도 있고 성실합니다.”
지바는 칠복이가 다칠까봐 열심히 민형사에게 고개를 숙이며 미안해하였다. 칠복이와 어머니는 아무 말도 못하고 민 형사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마지못해 민형사가 거드름을 피우며 칠복이에게 말했다.
“너 지바 선생님 보고 이번만 용서하는 것여. 며칠 전에 시서에 불지른 놈도 못 잡아서 지금 다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데.... 내 이마에 불이 번쩍 나니께. 다신 그런 장난허면 그 땐 용서없다이. 알았냐?”
“예.”
“아이고. 민 형사님. 고맙구만이라우.”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살펴 가십시오.“
지바는 칠복이에게 인사를 하라며 등을 두드렸지만 고개만 꾸벅하고 재빨리 지서문을 열고 나갔다.
“수고하세요.”
지바는 깊숙이 인사를 하고 칠복이 어머니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저만치 칠복이가 땅을 툭툭 차며 서 있었다.
“선상님, 밤중에 죄송허구만이요이.”
“어머님이 놀라셨죠? 칠복이가 기다리네요. 어서 가 보세요.”
“그람 가 보겄써라우.”
칠복이가 저만치서 “안녕히 가세요.”라며 말하고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잘 가거라. 내일 늦지 말고.”
“예.”
칠복이와 그의 어머니가 달빛이 환한 골목길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지바는 그들이 사라지자 다리를 건너며 혹시 지서의 방화범도 칠복이가 아닐까 생각을 하고 자신도 화들짝 놀랐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어둠을 헤치며 들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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