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고-옛시절, 옛사람을 다시 만나는 감회

천마리학 2008. 3. 24. 11:12
 
 

옛시절, 옛사람을 다시 만나는 감회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고

 


고등학교 다닐 때였던가? 교과서에서 익히 들어 알고 있던 박지원의 열하일기.

그러나 사실 그 땐 '박지원의 열하일기'라는 시험대비용 단어로 외우기만 했지 내용이 무엇인지를 도통 모른 채였다. 이것은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학교교육의 문제였다.

교과서에 지은이 이름과 제목만 알았지 내용을 자세히 알지 못하거나 읽어보지 못했던 책이 어디 <열하일기> 뿐이던가. 그런 고전들을 언젠가 한번은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더러더러 했었다.


하여, 흰머리가 성긴 지금에사 그 중 하나인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토론토대학 동아시아도서관 한국학의 장서에서 찾아 읽었다.

1980년 12월에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발행한 5권짜리다.


말로만 들어오던 <허생전>이나 <호질>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알고 보면 별게 아니란 생각도 할 수 있으나 그러나 그 당시의 사회상과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하면서 음미해보는 좋은 시간이었다.

글 전체에서 그의 놀랍도록 꼼꼼함과 주도면밀함을 느낄 수 있음과 동시에 그가 합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철저한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했으며 예리한 관찰력과 이지적인 판단으로 개혁을 꾀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어느 시대이건 진실과 격이 갖추어진 글이라면 쓰인 시대가 언제이건 그 빛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록 시대가 변하여 사람살이의 환경이 바뀌어서 다소 차이를 보일 수는 있어도 글을 쓴 사람의 품격이나 글의 질을 유지할 수 있는 좋은 글이라면 시대가 지났다 해서 그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가 세계명작이니 고전이니 하는 글들은 오늘도 살아서우리들을 끊임없이 일깨워주고 있다.

이 시대, 저서가 넘치고 문인이 넘치는 이 시대. 나도 그 중 한 말석에서 세상을 어지럽히는 잡문이나 쓰며 되나마나 저서를 내는 허접한 인생일까 두렵고 부끄럽다.


허생전을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과연 그가 지은 단편 소설이라고 봐야할지는 좀 아리송하다. 윤영이라는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를 옮겼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박제가의 논평<次修評語>(朴齊家의 자-次修)에 "허생전은 대략 당 나라 두 광정(杜光庭)이 지은 규렴객전(규렴客傳)에다가 漢나라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史記의 화식열전(貨殖列傳)을 합친 것과 같은 내용으로 그 가운데는 중봉(重峰) 조헌(趙憲)이 중국에 사신갔다 와서 올린 글이나,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과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등에서 말하지 못했던 부분을 말한 것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소설의 한 형식으로 보면 또 그렇기도 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오자(誤字)와 탈자가 많은 점이다.

일반 오자나 탈자는 그래도 봐줄만하다 치더라도 중요한 부분의 오자가 문제다.

대표적인 것으로,

5권의 <흑정필담(鵠汀筆譚)>이 다른 자료에서는 곡정필담으로 되어있다.

한자옥편을 찾아보니 '鵠'자가 고니 곡자이므로 곡정필담이 맞지 않을까 생각된다.

또 3권의 표지에는 幻戱記(환희기)로 되어있고 내용은 경개록이다. 환희기는 5권에 있다.

그 외에도 한자가 다른 것이 눈에 띈다. 어려운 한자도 많고 잘 쓰이지 않는 한자가 많다. 그 당시, 중국 여행기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정확한 한자를 골라 써야하고 정확한 토를 달아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80년대 출판물이라 하지만 그래도 <민족문화추진위원회>라는 이름을 걸고 한 중요한 사업 아닌가.

  

 

 

 

 

 

 

 

 

굳이 독후감을 쓸 만한 생각은 들지 않아 위와 같이 내 생각을 정리하고, 참고가 될 만한 것들만 다음과 같이 정리해둔다.


대충 정리해보자면,


연암(燕巖)박지원(1737~1805)의 <열하일기(熱河日記)>는 1780년 正祖4년에 진하사(進賀使)로 북경에 가는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청나라의 러허(熱河)강까지 다녀오면서 보고 듣고 느낀 일들을 기록한 기행문이다.


1권;압록강을 건너 북경까지

2권;북경에서 열하까지

3권;幻戱記(환희기)-내용은 경개록이다. 환희기는 5권에 있다.

3권;경개록(傾蓋錄) 심세편(審勢編) 망양록(忘羊錄) 혹(?)곡(?)정필담(鵠汀筆譚) 찰십륜포(札什倫布) 반선시말(班禪始末)


4권;黃敎問答(황교문답) 避暑錄(피서록) 楊梅詩話(양매시화) 銅蘭涉筆(동란섭필)

5권;玉匣夜話(옥갑야화-여관에서의 얘기) 行在雜錄(행재잡록-행재소 잡록) 金蓼(여뀌요)少침약(금요소침-약방문) 幻戱記(환희기) 山莊雜錄(산장잡록-열하에서 보고들은 일) 口外異聞(구외에서 들은 얘기들) 黃圖紀略(황도기략-북경의 전도) 謁聖退述(알성퇴술-공자의 사당을 배알하고) 鴦葉記(앙엽기-사찰을 관람하고) 

로 되어있다.


경개록- <史記>에 이른바 '늙도록 사귀어도 서로 알아주지 못하면 새로 만난 것과 같고, 금방 만난 사이라도 마음이 서로 통하면 옛 친구와 같다.(白頭如新傾蓋如故)'에 의거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내용은 곧 연암 선생이 열하의 太學에서 묵고 있던 6일 동안 그곳 학자들과 주고받은 대화를 기록한 것.


심세편-우리 조선 사람들의 五妄과 중국 사람들의 삼난(三難)을 역설한 내용으로 이는 당시 대의명분만을 주창하며 臣服(신복)하면 서도 현실을 부정하는 이율배반적인 망상을 떨쳐 버려야한다고 양반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한 것. 즉 우리나라 사람들은 海東의 소국에 편재하여 모든 문물이 중국에 영원을 두고 있으면서도 걸핏하면 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중국인을 얕보아 그 문장을 폄(貶)하고 그 기개 없음을 나무라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겉으로는 신복하면서도 내심 그들을 멸시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데 이것들이 모두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좁은 소견에서 나온 허망이라는 것. 그리고 중국의 삼난은 중국 사람들이 처세함에는 세 가지 어려움이 있다는 것으로 중국선비들은 행세하려면 經史는 물론 백가구류(百家九流)에 박통해야하며 겸손하면서도 대국의 체모를 잃지 않아야하고 법을 존중하여 정치가 안정됨으로써 四民이 각기 업에 충실하게 되니 이 세 가지가 어려운 것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을 도리어 멸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의 장점은 될지언정 결코 멸시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 모든 것들이 연암의 北學에 대한 절실한 이론이다 할 수 있다.


망양록-그곳 학자인 윤가전(尹嘉銓) 王民호 등과 함께 음악에 대한 견해를 교환한 것으로 그 가운데는 음악으로 하여금 역대제왕들의 흥망성쇠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었다.


흑정필담-역시 윤 가전, 왕민호 등과 함깨 나눈 이야기로 月世界, 지전설(地轉說), 역법(歷法), 천주(天主) 등에 대한 논평이다.

박지원과 중국의 '윤가전'과 '왕민호'가 주고받은 필담을 기록했다는 곡정필담(鵠汀筆譚)에서, 박지원에 대한 참고자료를 보면 '곡정필담'으로 되어있으나 본서에서는 '혹정필담'으로 되어있다. '곡정'인지 '혹정'인지 어느 것이 맞는지 알지 못하겠다. 글에서 '윤공'과 '곡정'으로 되어있으니, '윤공'은 '윤가전'일 것이고 '곡정'은 왕민호의 호일 것으로 추측할 뿐, 옛사람인데다 중국사람이어서 더욱 알 리가 없다. 그래서 한자사전을 찾아봤더니 곡(鵠-고니'곡')으로 되어있었다. 그렇다면 '곡정'이 맞지 않을까? 아니면 鵠자는 중국식 발음이 혹일까? 아무런 설명이 없었으니 답답한 추측만 할 뿐이다. 글을 읽으면서 오자가 심심찮게 눈에 띄어 씁쓸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잘못을 치자면 바로 '혹정'이라는 표기이고, 또 3권의 표지가 <幻戱記(환희기)>로 되어있으나 본 페이지의 내용은 <경개록>이다. 환희기는 5권에 있다. 이런 실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서문에 밝힌 것을 보면 우리의 고전을 찾아 펴내는 일에 대한 민족문화추진회의 긍지가 대단하던데.....

탈오자를 비롯하여 없어야할 실수는 무식함과 무성의함들 드러내보였다.

 

찰십륜포-서번어(西番語)로 '대승(大僧)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뜻인데 여기에는 반선(班禪-西藏 라마교의 둘째 가는 法主)에 대한 내용을 기록하였고.


반선시말-청(淸)나라 황제의 반선에 대한 정책을 논하였고 반선의 오만함과 아울러 청나라 황제의 반선에 대해 당치않은 융숭한 예우의 옳지 못함을 논평하였다.

 


<열하일기 2권>

*호질 [ 虎叱 ] 한문 단편 소설. 호랑이를 통하여 도학자의 위선을 신랄하게 꾸짖는 내용으로, 《열하일기》2권에 실려 있다. 학문이 높은 선비인 북곽선생(北郭先生)과 수절과부로 절개가 높음을 칭송하여 나라에서 동리과부지려(東里寡婦之閭)하는 정표(旌表)까지한 과부 동리자(東里子)가 성이 다른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북곽선생과 정을 통하자 망신을 주고자하는 아들들의 계략에 넘어가 도망치다가 똥통에 빠져 호랑이를 만나 목숨을 구걸하는 이야기로 호랑이를 통하여 인간의 위선과 비겁함을 통렬하게 비꼬고 있다. 우암 송시열을 풍자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열하일기 4권>

황교문답(黃敎問答)에서 라마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교주인 판첸라마(Pan-chen bla-ma)가 避暑란 명목으로 열하에서 한여름을 보내는데 이에 대한 연암은 '이들은 스승이란 명목으로 대접하지만 실상은 전각 속에 가두고 하루라도 세상이 무사하도록 하기 위한 원대한 책략'이라고 갈파하고 있다. 중국이 평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몽고나 서번(西蕃-서쪽의 여진)을 견제해야 하는 상황이었음을 꿰뚫어 본 것이다.

시장에서 벼루 한 개의 값이 2 백 냥을 넘지 않는 것이 없음에 대해서도 슬프다. 천하에 일이 있으면 朱玉이 굴러다녀도 거두어 들이지 않지만 海內(나라)가 태평한 때는 기왓장이나 벽돌이 땅에 묻혀 있어도 반드시 캐 내는 법이다.....'  '한 조각 돌로 족히 천하의 대세를 알아맞힐 수 있는 것이어든 하물며 천하의 괴로운 심정이 돌보다 더 큼 바가 있음에랴. 했다.  

*<푸른 입술>

太平廣記에 실린 글로,

어떤 이가 이웃집 사내가 그 아내가 불부는 것을 구경하고 있는 것을 보고 아래와 같은 시를 읊었다.

吸火朱脣動(흡화주순동-불 부는 예쁜 입술 오물오물)

添薪玉腕斜(참신옥완사-장작을 때느나 하얀 팔뚝 드러났네)

遙看烟裏面(요간연이면-멀리서 보아하니 연기 가린 저 얼굴이)

恰似霧中花(흡사무중화-마치 안개 속에 핀 꽃과 같아)


어떤이의 아내가 남편에게 당신은 어찌 시를 따라 읊지 못하느냐?고 하자 남편이 당신이 다시 불을 불면 내 응당 본떠서 시를 짓겠다고 하고 읊기를

吸火靑脣動(흡화청순동-불 부는 님의 양은 푸른 입술 벌렁벌렁)

添薪墨腕斜(참신묵완사-장작을 때느라 검정 팔뚝 드러났네)

遙看烟裏面(요간연이면-멀리서 보아하니 연기 가린 그 상판은)

恰似霧鳩槃茶(흡사구반다-무엇에 비손할꼬 구반다(추악한 귀신의 이름)가 이 아니냐)

이글은 원래 왕벽지(王闢之)의 민수연담록(삼수변에 龜(구)에서 윗부분 없는것, 水燕談錄)임.



*중국의 과친왕(果親王) 윤례(允禮)의 시

栢葉從來常自苦(백엽종래상자고-잣나무는 항상 고생살이요)

梅花終古不爲娥(매화종고불위아-매화꽃은 종래 고운 체 하지 않네)


*선비화(仙飛花)

퇴계의 시-영주군 순흥에 있는 신라고찰 부석사의 선비화수(仙飛花樹-향나무)를 읊은 시.

玉亭亭寺門(취옥정정시사문) 옥인 양 높이 솟아 절 문 앞에 섰는데

僧言錫杖化靈根(승언석장화영근) 중들은 석장의 화생이라 말하누나

枝頭自有曹溪水(지두자유조계수) 그 가지에는 자연 조계의 물 들어있어

不借乾坤雨露恩(부차건곤우로은) 천지의 우로 은택 빌리지 않았어라.


의상(義湘)이 西域으로 떠날 때 그가 기거하던 방문 앞 처마밑에 석장을 꽂으면서

"내가 떠난 뒤 이 지팡이에 반드시 가지와 잎이 돋을 것이고 또 이 나무가 마르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았음을 알아라." 하였다.

의상이 떠난 뒤 중들은 그의 방 앞에 소상을 모셨고 그 지팡이는 곧 가지와 잎이 돋아 비록 일월의 광명이 내리쪼이고 雨露의 은택을 받지 않아도 겨우 처마에 닿을 만한 한길 남짓한 길이로 1천년동안 한결 같았다.

光海君 때 慶尙監司 鄭造(정조)가 이 나무를 보고 妖樹라 하여 톱으로 베게 하여 절의 중이 죽음으로 막았으나 정조는

"仙人이 짚었던 지팡이를 나도 짚고 싶다" 하여 베어가버렸다. 그러나 이 나무에서는 곧 두줄기가 뻗어나서 전날것과 다름이 없었다. 계해년(1723년) 仁趙反正  때 정조는 大逆으로 죽음을 당했으나 이 나무는 잎이 피었다 떨어졌다 하지도 않고 꽃도 보지 못했지만 선비화라 불렸다.

박지원의 일가인 朴弘儁(박홍준)은 어릴때 이 절에서 놀다가 장난으로 그 한 줄기를 끊었으나 나무는 다시금 피어나서 전과 다름없었는데, 홍준은 수십 년 전에 곤장에 맞아 죽었으므로 우연히 이를 기록하여 부박한 청년들에게 경계하려 한다.

  


*공후가-동란섭필(銅蘭涉筆)에 실림

公無渡河 (공무도하-임에게 제발 말렸건만)

公終渡河 (공종도하-임은 끝내 건너려다)

公괴而死 (공*이사-임은 빠져 숨졌으니)

當奈公河 (당나공하-임이시여 이를 어찌 할꼬)

 (태평어람(太平御覽)에

'한(漢나라때 조선사람인 곽리 자고(곽-눈설자 밑에 佳, 里 子高)가 새벽에 일어나 배를 젓다보니 한 늙은 狂夫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술병을 찬 대 물을 건너려 하므로 그 아내가 말렸으나 이미 물에 빠져 죽자, 그 아내가 공후(초두 아래 空자, 초두 아래 侯자)를 뜯으며 노래했다. 그 소리가 매우 애처로웠고 그 곡조가 끝난 뒤에 역시 물속에 몸을 던져 죽었다. 자고가 집에 돌아와 아내 여옥(麗玉)에게 그 곡조를 말하자 여옥이 매우 슬러하면서 공후를 자겨와 그 곡조를 본떠 노래를 불렀는데 이것을 공후인(공후引)이라 한다'


*龍에 대하여-양용수(明의 양신(楊愼)의 아들)의 단연록(丹鉛錄)

'용은 한 차례에 아홉 마리의 새끼를 낳는데 이중에서 용이 못되는 놈은 첫째 비희(贔屭)로서 모양이 거북같이 생겨 무거운 짐을 잘 짊어지므로 지금 비석의 받침돌을 거북모양으로 만든 것이요. 둘빼 치문(氏자 밑에 一자 쓰고 오른쪽에 鳥자, 吻)으로 성질이 바라보기를 좋아하므로 지금 지붕 모퉁이에 짐승 모양으로 만들어 세운 것이요. 셋째 포뇌(蒲牢)로 울기를 잘 하므로 지금 종을 매는 끈의 모양이 이것이요, 넷째 폐간(狴-들개폐, 犭干(개사슴변에 간)으로서 모양이 범과 비슷하므로 지금 옥문 앞에 세워진 모양이 이것이요, 다섯째 도철(饕餮-재물이나 음식을 몹시 탐냄 또는 그런 사람)로서 성질이 먹기를 잘 하므로 지금 솥뚜껑에 붙여진 모양이 이것이요, 여섯째 패하(虫八 虫夏)로서 성질이 물을 좋아하므로 지금 다리의 기둥위에 세워진 모양이요 일곱째 애자(睚 眦)로서 성질이 죽이는 것을 좋아하므로 지금 칼자루에 새겨진 모양이요, 여덟째 금예(金 虫兌)로서 모양이 사자 같고 성질이 연기와 불을 좋아하므로 지금 향로에 세워진 모양이요. 아홉째 초도(椒圖)로서 모양이 소라 같고 성질이 닫는(閉) 것을 좋아하므로 지금 문간에 세워진 모양이 이것이다.'

대류총귀(對類總龜)에는,

'용은 새끼 아홉 마리를 낳는데, 하나는 조풍(嘲風)으로서 모험을 좋아하므로 전각 귀퉁이에 세우고 하나는 치문(蚩吻)으로서 삼키기를 좋아하므로 전각 용마루에 세운다'

또,

용의 아홉 마리 새끼 중에 하나는 패하(覇夏)로서 무거운 것을 짊어지기 좋아하므로 비석의 받침돌로 새기고 비희는 글을 좋아하므로 비석 양쪽에 새긴다.'

박물지일편(博物志逸篇)에는,

'이문(虫에** 吻)은 모양이 짐승 같은데 바라보기를 좋아하므로 전각위에 세우고 만전(虫蠻 虫全)은 용과 비슷한데 성질이 풍우를 좋아하므로 지붕 용마루에 세운다'

또,

'비희(贔屭)는 성질이 무거운 것을 짊어지기 좋아하므로 비석을 짊어지게 하였고, 이호(이虎)는 모양이 용같이 생기고 성질이 문채를 좋아하므로 비석 위에 세운다'



<열하일기 5권>

'허생전'은 옥갑이라는 여관에서 밤늦도록 비장들과 둘러앉아 나눈 이야기들 중의 하나로, <옥갑야화(玉匣夜話)>라고 묶은 단원에 나오는 몇 가지 이야기 중의 하나다.


배신한 통역관의 비참한 말로-30년 전 북경에서 우리나라의 한 통역관(通譯官)이 빈손으로 북경에 가서 단골집 주인에게 눈물을 흘리자 이유를 묻는다. 압록강을 건너 올 때 남의 銀을 숨겨 오다가 밀수품으로 적발돼 제 것까지 몽땅 官에 뺏겨 빈털터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고 하자 주인이 만 냥을 빌려주면서 밑천삼아 돈을 벌어서 본전만 갚으라고 했다. 그는 그 돈으로 오는 길에 물건을 사와서 굴려 5년 만에 큰돈을 벌었으나 빌린 돈 만 냥을 갚지 않으려고 북경으로 가는 친구에게 부탁하여 자기는 집안이 몹쓸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게 한다. 그 말을 들은 단골주인은 슬퍼하면서 친구에게 백 냥을 주며 50냥으로 제사지내주고 50냥은 제(齊)를 지내주라고 한다. 친구가 돌아와 보니 정말 그 통역관의 집안은 전염병에 걸려 이미 몰사한 후였다. 그 친구는 단골주인의 뜻대로 제사와 제를 다 올려주고도 부끄러워 두 번 다시 북경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당성군(唐城君) 홍순언(洪純彦)의 이야기(선조대왕 때의 유명한 통역관),- 북경의 어느 기생집에 갔다가 놀이채가 천금이나 되는 기생이 있다하여 그를 청한다. 남경의 한 호부시랑의 딸인 16세의 그 기생은 아버지가 장오죄(臟汚罪)에 걸려 추징금은 내기위해 기생집에 몸값 2 천 냥에 팔렸다고 한다. 천금에 기생을 살만한 대장부가 흔치 않을 것이므로 일단 싸구려는 안 될 것이고, 또 그만한 능력이 있는 남자를 만나기 위해서 값을 천 냥으로 내걸었다고 했다. 홍순언이 2 천 냥을 주자 그를 은부(恩夫)라고 하며 고마워했다. 그 일을 까맣게 잊은 후, 홍순언이 다시 북경에 가게 된다. 영문을 모른 채 병부상서 석노야(石老爺)로부터 초대를 받게 되었는데 '장인(丈人)'이라고 부르며 극진한 대접을 받게 된다. 알고 보니 그 기생은 석노야의 후처로 들어가 영화를 누리게 되었는데 그 은혜를 못 잊어 늘 기다렸다는 것이다. 그 부인은 손수 비단을 짰고 '報恩'이라고 수를 놓았다. 홍순언이 귀국할 때 보은단(報恩緞)과 금은 등 많은 물건을 넣어 보냈고 임진왜란 때 석성이 병부상서로서 우리나라에 구원병을 파견할 것을 극력 주장했다고 한다.


북경 부자인 정세태(鄭世泰)의 이야기도 나오는데 그 이야기 중에 나오는 변승업이라고 하는 부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박지원도 윤영(尹映)이라는 사람에게 들은 바 있다고 하면서 적어놓은 것이 허생에 관한 이야기이다.


허생전(許生傳)-허생은 남산 아래 묵적동(墨積洞)에 사는 선비로 글만 읽고 돈벌생각을 하지 않아 부인의 원망이 높다. 아내의 성화에 못이겨 10년동안 글을 읽으려고 했던 계획을 바꿔 7년만에 그만 두고 운종가(雲從街-지금의 종로)로 나가 물어서 변씨(卞氏-변승업의 조부)라는 부자를 찾아가 만냥을 빌린다. 그 돈으로 경기와 호남의 교차점인 안성으로 가서 온갖 과실을 몽땅 사뒀다가 비싸게 팔아 이문을 남긴 다음 다시 칼 호미 베 명주 등을 사가지고 제주도로 건너가 말총을 몽땅 산다. 망건을 만들 말총 값이 열배로 껑충 뛴다. 그 돈을 가지고 사문도(沙門島)와 장기도(長崎島-일본) 사이의 무인도로 간다. 30만냥을 가지고 마침 전라도지방에 들끓는 천명의 도둑떼를 찾아가 나눠주면서 1년 후에 아내를 얻어 돌아오라고 한다. 돌아온 2천명의 식구들을 데리고 무인도로 들어가 농사지으며 살게 하는데 땅이 기름져 수확이 좋았다. 3년 먹을 식량만 비축하라고 하고 나머지는 장기도에 가서 팔게 한다. 이렇게 잘 살게 되자 허생은 그들에게 아이들을 낳으면 오른 손으로 숟가락을 잡도록 하고 하루만 먼저 태어났어도 음식을 먼저 들도록 가르치라는 말을 남기고 외부와의 접촉을 막기 위해 그들이 타고 온 배들은 불사르고 남은 돈 50만냥을 바다에 처넣는다. 백만 냥을 가지고 섬을 나와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며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도 10만 냥이 남았다. 변부자에게 빌린 돈 만 냥을 갚으려고 찾아간다. 행색이 초라해서 실패한 줄 알았던 그가 10만 냥을 내놓고 돌아가자 이상하게 생각해서 그의 뒤를 밟는다. 남산 밑의 가난한 초가의 허생원을 보고 그의 사람됨에 놀라 10만 냥을 다시 주자 거절, 사는 동안 식량이나 생활비나 대달라고 하며 다시 책읽기를 시작한다.  

후에 이완(李浣)이 초야에 묻힌 인물을 찾자 변부자가 허생을 추천한다. 허생은 조건을 내세워 거절한다. 첫 번째는 제갈량 같은 사람을 천거할 테니 임금에게 그를 찾아가 세 번 머리를 조아리게 하라는 것, 두 번째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우러 온 명나라 장사의 후손들이 청나라에서 망명하여 우리나라에 와 홀아비들로 떠돌고 있는데 그들에게 종실의 딸들을 시집보내고 권세가들의 집을 빼앗아 살림을 차리게 하라는 것. 세 번째는 청나라의 자제들을 학관에 입학시켜주고 우리나라에서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여 머리 깎고 되놈의 옷을 입혀서 서로 섞이게 하고 평민은 장사치로 꾸며 강남을 드나들게 하여 허실을 염탐하는 한편 호걸들과 사귀게 하며 천하를 도모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대부들이 누가 머리 깎고 되놈의 옷을 입으려하겠느냐면서 거절하자 허생은 그를 향해 중신이 그 모양이냐면서 칼을 빼어들자 줄행랑치고 만다.

다음날 다시 허생의 집을 찾아갔으나 텅 비어있는 빈집뿐이었다.

"흰 저고리에 흰바지를 입었으니 상복이나 다름없고 머리털을 한데 묶어 만든 상투는 남만 오랑캐의 방망이에 다름없다. 뭐가 예법이란 말이냐? 옛날 번오기(樊於期)는 사사로운 원수를 갚기 위해 진시황을 죽이러가는 형가(荊哥)에게 선뜻 머리를 내놨으며, 무령왕(武靈王)은 군사력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군사들에게 소매가 짧은 되놈의 옷을 입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하물며 너희들은 명나라를 위해 원수를 갚겠다면서 상투 하나 자르기를 아까와 하고 전쟁을 해야 할 처지인데도 폭넓은 소매를 고치지 않고 있다. 이러고도 예법을 말할 수 있겠느냐?" 고 한 것은 실리적이지 못한 명분에 매달린 사대부들을 향한 신랄한 비판이다. 과연 북학파의 거두로 청나라의 문물을 들여와야 한다고 주장한 그의 뜻을 알 수 있다.


<참고>

연암집 [ 燕巖集 ]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박지원의 시문집. 시문, 서간과 〈열하일기〉 따위가 수록되어 있으며, 광무 5년(1901)에 김택영이 간행하였다. 9권 3책.

지전설 [ 地轉說 ]

지구가 돈다는 학설. 조선 시대의 실학자 홍대용이 주창한 것으로,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실려 있는 〈곡정필담(鵠汀筆談)〉에 전한다.

삼환설 [ 三丸說 ]

해, 달, 지구가 둥글다는 학설. 조선 시대의 학자 김석문이 주장하였고,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연행록 [ 燕行錄 ]

조선 시대에, 사신이나 그 수행원이 중국을 다녀와서 보고 느낀 것을 쓴 기행문. 박지원의 《열하일기》, 홍대용의 《을병연행록》 따위가 있다.

성호사설(星湖僿說)

조선 후기의 학자 이익이 쓴 책. 星湖는 이익의 호, 사설(僿說)은 세쇄(細碎-잘게 부순)한 논설이라는 뜻으로 저자가 겸사(謙辭)로 붙인 서명(署名)임.

저자가 41세 전후부터 책을 읽다가 느낀 점이 있거나 흥미 있는 사실이 있으면 그때 그때 기록해 둔 것과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한 내용을 기록해 둔 것들을 그의 나이 80에 이르렀을 때에 집안 조카들이 정리한 책이다. 성호사설은 천지문(天地門), (만물문(萬物門), 인사문(人事門), 경사문(經史門), 시문문(詩文門)의 다섯 가지 문으로 크게 분류되며, 총 3,007편의 항목에 관한 글이 실려 있다. 이 책은 서양의 새로운 지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며, 사물과 당시의 세태 및 학문의 태도를 개방적인 자세로 파악하고 있다.

 

(2008년 2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