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이문구의 <관촌수필>-충청도 농민의 삶을 문학으로 일구다

천마리학 2008. 2. 5. 03:04
 
 

      충청도 농민의 삶을 문학으로 일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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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구의 <관촌수필>을 읽고-
    

                                               


 

사족부터 먼저 거론하자면, 씨는 나와는 별반 현실적인 인연이 없고 다만 필명으로만 혹은 지면으로만 대하여 아는 정도. 그것도 나의 일방적인 쪽일뿐. 

한때 자료정리를 하다가 짐이 하도 무거워 웬만한 것들을 다 지워버리는 과정에서 왠지 씨의 사진을 지울까 말까 망서리다가 놓아둔 것이 있다. 몇 해 전 우연찮게 어떤 문인들의 행사에 뜻하지 않은 카메리 맨으로 참석한 일이 있었다.


흥사단에서 있었던 한국전자문학도서관의 사단법인화를 발표하던 행사였다. 그때 나는 한국전자문학도서관의 웹진인 <블루노트>를 월간으로 발행하고 있던 터였다. 사실 한국전자문학 도서관 형편으로는 일할 만한 사람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장비를 반반하게 갖춘 사람조차도 없는 지경이었다. 그나마 나는 전적으로 웹진에 매달렸던 터였고 도서관 설립자인 Y 교수는 여러 가지 도서관 일에 나를 기대고 있었다. 그 행사에 막상 사진 찍을 만한 제자 한 사람도 오롯하게 없어서 나에게 급하게 전화를 걸어왔고 또 어떤 제자를 통하여 전갈도 보내왔었다. 카메라를 가지고 나와 자료사진을 찍어달라고. 지금은 되나깨나 디지탈 카메라지만 그때만 해도 초기인데다 나는 그래도 꽤 쓸 만한 장비들을 갖추고 있었다. 웹진 발행을 하기 위해서였지만 어떤 일을 해도 턱없는 완벽주의에 쓸데없는 열정을 가지고 덤비는 나의 성격 때문이다.


하여튼 맘에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 행사에 나가서 주문대로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참석한 사람들을 거의 사진을 찍었다. 몇몇 아는 문인들이 있긴 했지만 대개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 중에 이문구씨가 S씨와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이 섞여 있었다. 내심 참석자들 중 가장 반가웠다. 물론 찍었다. 찍으면서 전에 사진으로 보았던 기억과 근래 심각한 병을 앓고있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는데 소문대로 병고에 시달려 홀쭉해진 모습이 전에 사진으로 보았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있음이 역력했다. 


후에 정리하면서 다른 사진들은 거의 없애버렸지만 이문구씨의 사진만은 없애지 않았다. 괜스레 마음이 가서였다. '괜스레'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은 그를 좋은 문인으로 점찍어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씨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진 못했지만 아직 읽지 못한 작품들에 대해서는 늘 읽어봐야지 하고 벼르고 있었다. 그의 <매월당 김시습>이 지금도 안양집의 서가에 읽지 못한 채로 간직하고 있다. 나는 막연하게나마 씨에 대하여 꼭 한 번 읽어둘만한 문학인으로서의 신뢰와 기대를 가지고 있었으면서 다만 시간에 �기다보니 늘 다음으로 미루어오고 있을 뿐이었다. 후에 S선생이 그 사진을 보내달라고 여러 번 부탁했지만 인화지로 뽑는 일은 나에게 매우 번거로운 터라 차일피일 미루다가 보내주지 못했다. 기실  나는 디지탈 카메라로 많은 사진을 찍긴 해도 다만 웹에 이용하거나 대부분 컴 안에 가두어 놓았을 뿐, 어쩌다 출판에 이용할 때 사진 외에는 내 사진도 단 한 번도 인화해 본 일이 없는 지경이었다.


얼마 후에 씨가 별세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뜻하지 않게 한국문학 도서관의 웹진 주간의 입장으로 조문을 하게 되었다. 물론 나야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 가지의 존재였지만 그래도 나름으로는 조의를 표했고, 꽃으로 둘러싸인 빈소의 사진도 찍어 웹진의 소식난에 실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지금, 2008년이 되어서야 그것도 카나다의 토론토에서 우연히 그분의 저서를 접하게 되어 계획에 없이 읽게 되었다.


그 우연히는,

며칠 전 토론토 시의 공공 도서관에 돌쟁이 손자 아리의 책을 빌리러 갔다.

'아리'의 책 몇 권을 빌린 다음 간 김에 2층으로 올라 갔다. 그 도서관에 유일하게 한국 서가가 있다는 말을 이미 들었기 때문이다.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 공공 도서관의 위 아래 층에는 중국이나 홍콩 그리고 일본의 서가들이 꽉 차 있었는데 한국의 서가는 2층의 많은 책장 중의, 딱 한 책장, 그 책장의 책꽂이 선반 너댓간을 겨우 메우고 있을 정도의 아주 초라한 서가였다. 내보기엔 책의 분량 뿐만이 아니라 거기 꽂힌 책들이 그다지 무게 있는 책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들을 기증이라도 해야할 것 같은 생각을 하면서 훑어보았다. 그 속에서 어울리지 않게 눈에 띄는 책이 한권 있었다. 읽은만 한 딱 한 권의 책. <관촌수필>이었다. 어울리지 않는다 함은 네임 벨류로나 거기 담긴 글의 내용으로나 두툼한 책의 부피로나 책의 만듦새로나를 말한다. 그나마 내가 읽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단 한 권의 책이 있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으며, 그리고 그동안 벼르기만 했던 씨의 작품을 만나 나의 게으름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라싶어 빌렸다.


여기까지가 사족, 다음부터는 책을 읽은 소감이다.

내가 읽을만 하다고 생각한 단 한권의 책, <관촌수필>은 나남출판사에서 발행한 584페이지에 '소리 나는 쪽으로 돌아보다' '長川里 소태나무' 長洞里 싸리나무' '유자소전' '우리 동네 柳씨' 우리동네 鄭씨' '우리 동네 黃씨' '해벽' 공산토월' '녹수청산' '일락서산' '암소' '장난감 풍선' 이렇게 13편의 중 단편이 실려있다. 

다보니 전에 내가 이미 읽은 작품들도 있었다.

제목이 '관촌수필'이라고 되어있어서 수필로 짐작했다면 오산이다. 모두가 중 단편에 속하는 소설이다. 물론 부제로 '관촌수필 5' '관촌수필 1'... 이런식으로 달려있긴 하지만 읽어보면 모두가 충청도의 시골 마을, 그의 고향마을에서 일어났던 실화들을 바탕으로 소설처럼 엮어놓은 이야기들로 보였다.


그를 간단히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그는 뛰어난 문장가이며, 그는 대단한 이야기꾼이며, 그는 꼼꼼한 기록가이며, 그는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 충청도의 시골인 관촌을 문학으로 살려놓았고, 그는 나아가서는 충청도의 문학을 세워놓았다.

그런 점들을 조목조목 따져보자면,


*그의 소설들은 크라이막스가 없다.  

깜짝 놀랄만한 사건의 전개라던지, 앞서 벌어져나가던 이야기들이 가슴을 찡하게, 혹은 가슴을 뭉클하게 돌려세운다던지 후련하게 쓸어내리거나 무릎을 치게 하는 극적인 맛은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사실들을, 일어난 그대로 혹은 들은 그대로를 병렬식으로 옮겨 담아놓고 있다.  계속되는 삶의 한 토막을 끊어 보여준다.  소설이라고는 했지만 내가 보기에 그의 소설들은 한 줄거리를 집중해서 펼쳐가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배경과 상황들 혹은 관련된 일들을 때로는 관련 없는 일들까지 잡다할만큼 끄집어 내어 앞 뒤 없이 삽입해가며 구체적으로, 지루할만큼 자세하게 그리고 있어서  읽어나가면서 머리 속으로 지도를 보는 느낌이 들고 마지막엔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새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있었던 일들을 다듬어냈기 때문이다.

크라이막스가 없음에도 감칠맛나고 재미있다.

 


*그는 지독한 입담꾼이며 뛰어난 문장가이다. 

크라이막스가 없음에도 그의 글이 살아있는 것은 그의 누구 못지 않은 입담 때문이다. 읽는 내내 직접 그 속에서 파고 살지 않았으면 모를 이야기들, 그리고 표현들, 정말 눈길을 휘어잡았다.

내가 소설을 읽으면서 이렇게 박장대소하며 읽기는 처음이다. 

글 속에 재현되는 충청도 시골사람들의 이야기가 뱃살이 꼿꼿하게 아파올만큼 웃음을 참지 못했다. 책을 읽는 중에도 웃었지만 잠자리에 들어서도 문득 웃음이 나왔고 식탁에 앉았을 때도 불쑥 웃음이 나와 식구들이 으아해 하면서 이유를 물을 정도였다. 그 재미있는 대화내용을 식구들에게 말하지 않으면 입이 간지러워서 견딜 수 없는 속내이기도 했다. 그래서 결국은 몇 군데의 이야기를 내 입으로 말해주거나 그 대목을 짚어 읽어주기까지 했다. 어떤 코미디보다 더 살가운 코미디. 그 웃음  속에는 슬픔과 고단함이 배어있어서 웃음이 더욱 쏠쏠하다. 

물론 그 모든 것들이 실제의 일들이긴 하겠으나 그래도 글로 그렇게 옮길 수 있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 터, 그의 뛰어난 문장의 힘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대단한 입담 없이는 이루어 낼 수 없는 일이다.


*충청도 방언과 속담과 우리말의 전시장이다.

60년 70년대의 가난한 삶, 어찌 견뎌냈을까 싶은 그 속에 배어있는 흐벅진 사투리와 잊혀져가는 우리말들과 비속어들이 삶의 고단함과 가난의 비애를 씻어주는 역할도 하지만 촌철의 예지와 지혜도 들어있다. 무지랭이, 농투사니...등으로 힘없고 무식한 사람들로 오해하기 쉬운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그들이 뱉어내는 사투리는 풍자, 해학, 카다르시스 그리고 한풀이의 다름 아니었다. 그들이 적나라하게 늘어놓는 능청스러움 속에서 그들의 지혜로움과 끈질김과 강인한 생명력을 실감하게 했다.걸쭉한 사투리와 맛갈스럽고 재기가 가득한 문장, 대화마다 끼어있는 속담들이 넘쳐나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이렇게 뛰어난 문장으로 엮어내는 그는 뛰어난 문장가이긴 하지만, 그 뛰어난 문장력은 단지 타고난 능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후천적인 공부가 없으면 그리고 그 고장에서 살지 않았으면 절대로 표현 못해낼 문장이다. 글을 읽다보면 그의 후천적인 공부, 그것도 매우 깊은 공부가 아니면 안 되는 경지였으며 또한 그가 많이 알아 겸손했을 사람이었을 거라는 것. 많이 안다고 대가리 뻣뻣하게 치장하는 사람들과는 전혀 딴판인 사람이라는 것이 은연 중에 감지되었다. 따라서 그의 고향사랑이 깊었음 또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진한 애향심이 아니면, 우리 역사의 아픔과 함께 하는 고향 사람들의 아픔을 보아내지 못했을 것이며 담아내지 않았을 것이다. 


*몇 개의 강을 건너는 다리가 있다.

흐르는 시간이 만들어내는 역사, 역사의 물결이 짓는 무늬, 그것이 곧 우리들의 삶이라면 씨의 소설 속 공간에는 우리가 건너야 하는 몇 개의 다리가 있다.


첫째는  시대의 강을 건너는 다리

구식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조선시대의 유교적 사상이  신식의 사고방식으로 바뀌어가는 시대의 강을 건너는 다리이다. 그것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사이. 아버지와 '나'의 사이, 그리고  할아버지와 '나'로 표현되는 화자 사이에서 생기는 변화와 괴리이다. 공산토월(空山土月 -관촌수필 5)와 일락서산(日落西山 -관촌수필 1)에서 잘 나타나지만 그 외 유교적 사상을 지닌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떼고 동몽선습을 교육받은 '나'의 의식이 작품 전편을 관통하고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상반된 성격과 사상 또한 시대를 건너는 변천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개인적인 변화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변화해가느라 진통을 겪어내는 이야기들이다. 


둘째는 전쟁의 강을 건너온 다리가 있다.

6,25 전쟁을 겪으며 가난을 함께 겪으며 모진 삶을 살아낸 60년 70년대의 삶을 건너온 농민들이 힘겹게 건넌 다리. 그것은 전쟁으로 짓밟힌 이 땅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치욕적인 변화를 감내할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어설픈 자본주의의 바람도 동행하게 된다. 특히 해벽(海壁)에서는 미군에게 철저하게 짓밟히는 우리의 과거를 일깨우는 끔찍한 사건이 드러난다. 단돈 30달러에 훈련된 세퍼트와 우리의 젊은 위안부가 성적교미를 하게하고 그 장면을 촬영하는, 치욕적인 사건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들은 소문으로 그리고 있다. 이는 확인되지 않은 사건이라는 의미이면서 또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우리의 과거라는 의미도 포함된다고 본다. <장천리 소태나무>의 이송학은 낚시꾼으로부터 명의이전의 부탁을 받아 자신의 명의를 빌려주고 농사를 짓게 되는데 은근히 그 땅이 자신의 것으로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물론 인간의 욕심이라고는 하지만 순박했던 농촌사람이 돈의 위력을 맛보면서 자본주의화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쟁으로 인하여 박살이 난 '나'의 집안의 내력 또한 개인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겪으며 당했던 일이다.


세 째는 근대와 현대 사이의 강을 건너는 다리.

이는 농촌의 도시화와 맞물려 있다. 전쟁과 가난, 그리고 이어서 자본주의가 도입되고 근대화의 물결이 정치 경제와 생활을 물들이면서 차차 현대화로 가게 되는 과정 또한 지나칠 수 없다. 그 사이에서 넘어져 상처 받고 깨지면서도 변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딱히 <우리동네 류씨(柳氏)>나 <우리 동네 정씨(鄭氏)> <장난감 풍선> <암소> 만이 아니라도 곳곳에 섞여 있다. 토지개혁, 고리채 정리, 농촌의 평준화... 이 건너가는 사이에 TV, 이쁜이 수술, 야쿠르트, 복부인...이런 단어들도 낯설지 않다. 그렇게 도시와는 거리가 멀었던, 그래서 '현대'와는 동떨어진 느낌이 드는 시골벽촌이 현대화의 물결로 변화되어가는 모습, 그 변화의 물결 속에서 놀라며 부대끼며 거부하며 적응하며 때로는 저항의 몸짓까지 보이면서도 결국은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그 재현은 바로 기록이며 역사가 되었다.


네 째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강을 건너는 다리.

유재필 대인의 이야기를 쓴 <유자소전(柳子小傳)>, <공산토월(空山土月 -관촌수필 5)>의 석공이나 <녹수청산(綠水靑山 -관촌수필 1)>의 대복이는 '나'의 생애에서 특별한 존재로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 중에서도 대복이는 남들로부터 추앙받는 인물이 아니다. 추앙은커녕 막난이 취급을 받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나'의 어린 시절을 즐겁고 그리운 시절로 만들뿐만 아니라 삶의 저물녘이 된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 인물들이다. 

인간관계란 주위의 평판이나 상황과는 별개로 특별한 자기만의 주관이나 계기가 주어지기도 하고 그로 인하여 자기의 삶을 지배하기도 한다.   


다섯 째 '나'를 건너는 다리.

지나간 과거 한때 벌쭉했던 집안의 자손으로, 어린 시절 시골 마을에서 떵떵거리며 도련님 소리를 들으며 살았던 '나'는 전쟁과 현대화 등으로 달라지는 민심과 주변 환경으로부터 밀려나 서울로 이주하게 되고 열한 평짜리 아파트에서 살게 되는 과정, 지나온 시절의 모든 것들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이지만 잊히지는 않는 그리운 시절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무력함과 무능함을 느끼는 나 자신의 회의, 지난 세월들을 돌아보면 누군들 그러지 않을까만 수산고등학교를 세우고 어협조합장을 지내면서 어촌을 일으켜 세워보려고 했던 모든 것들을 실패한  <해벽(海壁)>의 조등만, 새로운 시대적 물결에 대한 그의 거부의 몸짓이 수포로 돌아가고 생의 절망 앞에 서서 끝내 그리워하는 파도소리, <장동리(長洞里) 싸리나무>의 '그'가 낙향하여 그간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느끼는 회의,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는 부부의 모습을 환상으로 보기도 하고, 달빛이 빚어내는 묵란도(墨蘭圖)에 망연자실, 아니 살아온 생애에 대하여 눈뜨는 장면이 인상 깊다. 


서문으로 대신한 맨 앞의 <소리 나는 쪽으로 보다>에서도 역시 자신의 이름, 즉 명예에 대해서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써의 성찰을 참으로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참 문학인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문인행세하며 문인답지 않은 일들을 해오는 문단의 세태. 크게든 작게든 모였다하면 단체 만들고 나눠 먹기식으로 감투 욕심이나 내면서 속물냄세 풀풀 풍기는 어쭙잖은 무리들 속에 자신의 이름을 끼워 넣지 않으려고 자숙하며 근신하며 정진한 모습이 많은 귀감이 되었다.    


*역사가 되는 기록이다.

한 시절, 우리 곁을 예사롭잖게 지나간 일들이 수두룩하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곧잘 잊고 산다. 때로는 잊고 사는 것이 약이기도 하지만 너무 잊어버려 병이 되는 수도 많다. 씨의 글은 우리가 잊어버리기 쉬운 과거, 건망증이 심한 우리들의 건방지고 미련한 책상 위에 농민들의 삶을 재현해 놓은 역사이며 기록이다.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변해가는 인심, 미군들의 이주로 황폐해지는 시골마을, 그로 인해 우리 민족이 겪어야했던 인간이하의 취급을 받아야 했던 그 슬픈 이야기들, 현대화라는 미명으로 속도전을 벌이며 망가지는 환경과 여러 가지 주위 상황에 따라 민심에 얽힌 이야기들까지 속속들이 기록해 놓아서 역사가 되었다.  훗날,  세상이 바뀌면 바뀐 대로 그땐 그랬구나, 변하지 않으면 변하지 않은 대로 그때도 그랬구나. 흘러가버린 뒤에 그때 그 사람들이 있어서 오늘로 이어졌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역사의 기록.


지금도 벌써 그렇다. 작품들이 대개는 70년대에 발표된 것들이고 90년대에 발표한 작품이라 해도 내용은 그 시절의 이야기다. 2000 년대에 들어서도 벌써 8년이나 지난 지금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거의 잊고 있던, 잊혀져가던 시절을 되짚어보게 되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우연한 자리에서 찍었던 그분의 사진을 일껏 찾아내었다. 다시 한 번 우리 문학사에 참 귀중한 분이구나 새삼 늦터진 나 자신을 책망하며 그분의 명복을 비는 마음과 함께 감사와 존경을 보낸다.

 

<2008년 1월 16일 수, 토론토에서> 44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