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황석영의 바리데기

천마리학 2007. 10. 6. 06:45
 
 

                     

              바리데기는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황석영의 '바리데기'를 읽고


 

 


구전으로 내려오는 '바리데기'의 이야기를 얼개로 하여 현재의 역사, 세계의 정세를 투영시킨 작품이었다.

오래 전, 1980년대에 민속학을 공부하던 시절이 새롭다.

잊고 있던, 우리의 전통설화나 전통 한의학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우리의 것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면서 느꼈던 감흥들이 되살아났다. 물론 개괄적인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정도였지만 그때 민속학에 대한 전반적인 분야를 섭렵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내가 새롭게 눈 뜬것이라면 대략 이런 것이었다.

한의학이 중국의 한의학(漢醫學)이 아니라 우리의 한의학(韓醫學)이 존재한다는 것, 양의(洋醫)가 과학적이라는 하지만 한의학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과학이라는 것, 민간요법이 오늘날 새롭게 개발되는 약재나 처방의 기초가 되고 있음을 알았으며, 아직도 연구하고 개척해야할 부분이 많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전통 문화나 설화들이 새롭게 의미부여 해야 할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중 '바리데기'를 공부하면서 구전으로 이어지는 재미있는 이야기꺼리도 되지만 그 의미를 충분히 재해석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나,


그러던 나, 사는 동안 그냥 그러고만 것들, 게으름과 무식과 망각으로 그냥 넘기고만 것이 어디 한둘이었던가. 바리데기가 바로 그 하나이다.

물론 그 후 지금에 이르는 동안 새로 개발된 의학기술이나 약재들을 보면서 맞아, 그때 이 부분이 충분히 새로 개진되어야한다고 생각했었지 하기도 했었다. 민속설화 분야에 있어서 '바리데기'도 마찬가지다. 사실 언젠가 장차 새로운 의미부여를 한 글을 만들어보리라 생각하기도 했었으나, 그냥 그러다 만 것들 속에 포함되고 말았다.

그랬는데, 황석영의 '바리데기'를 읽으면서 한 생각, 그가 바로 그 작업을 해냈구나. 그래서 그는 작가구나.....

 

'바리데기'는 우리나라의 저승굿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지방에 따라 형식이 다른 여러 형태를 보이고 있으나 넋씻김의 과장인 '바리데기'가 저승굿 즉 황천무가(黃泉巫歌)의 핵심으로 '진오기' 또는 '오구'라고 하기도 한다.


설화 속 '바리데기'의 주인공 '바리데기'는 오구대왕의 칠공주 중의 막내인 일곱 번째 딸, 딸이 많아서 버려지고 버려졌다해서 '바리데기'이다. 오구대왕이 병들어 죽게 되자 온갖 영화를 누리던 다른 딸들은 외면하는데 버려진 공주 바리데기는 병든 아버지를 살리는 생명수를 구하기 위해서 혼백이나 간다는 저승길을 다녀온다. 아버지를 살리자 감복하여 나라를 주겠다고 하자 거절하고 저승길에서 보고 만난 온갖 한많은 귀신들을 극락으로 천도하겠다고 '쥘소방울'과  '쉰대부채'를 들고 저승으로 떠난다.

파란만장한 저승길을 엮어낸 이야기가 곧 '바리데기' 스토리이다.

이후 바리데기는 무당들의 조상인 무조신이 된다.

여기까지가 설화속의 바리데기이다.


소설로 들어가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버지만이 아니라 한 많고 원 많게 죽은 사람을 천도하기 위하여 그 험난한 저승길을 오가면서 한이 많아 저승으로 떠나가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는 귀신들의 한을 풀어주어 저승으로 갈 수 있도록 천도하는 것처럼 이 시대에서도 '바리데기'가 필요하다는 의미 아닐까?

아울러 누가 바리데기가 되어야 할까?도 묻고 있는 것 아닐까?


저승인 서천의 끝까지 가서 생명수를 가져오는 바리데기. 오늘 날 지구촌 여기저기 전쟁과 테러와 납치와 파괴, 가난과 굶주림, 피울음과 질병들이 난무하는 비극적 현실을 누가 책임지고 누가 구원한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 바리 역시 북한의 청진에서 진,선,미,정,숙,현에 이어 일곱째 딸로 태어나 버려졌다가 살아나 붙여진 이름 '바리'다.

가난과 감시로 뿔뿔이 헤어지고 혼자가 된 '바리'는 살기 위하여 두만강을 도강하여 중국으로 건너가고 다시 화물선의 컨테이너에 실려 밀항 영국으로 가는 과정과 곳곳에서 겪어야했던 고초와 삶의 고된 역정은 바로 바리데기가 저승길은 가는 과정과 같다.


선천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바리'는 자신의 일만이 아니라 주변의, 낯선 타국의 사람들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참혹한 현실을 보게 된다.

  

지옥과 같은 현실, 곳곳에서 가난과 굶주림으로 죽어가는가 하면 한편에선 배부른 자본주의가 판을 치고,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이 뒷전에서 자신들의 이익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벌이는 꼼수놀음에 의하여 일어나는 전쟁과 이데올로기에 희생되어가는 제 3세계의 지옥 같은 이야기. 


우리의 오래된 버려진 공주의 이야기에 현재 지구촌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담아낸 이 글을 읽으면서 황석영은 정말 입담 좋은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겪은 특이한 체험들이 모두 이 글의 작업이었음도 알게 되었다.


이 소설에서 '바리'가 저승의 문지기 장승에게 생명수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 생명수는 없다. 네가 마시고 세수한 그 물이 바로 생명수라고 대답한다. 지옥이 저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승에 있다는 것.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지옥과 천당이 있고 생명수가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이 글의 결론이라고 생각한다.

 

제 3세계 사람들의 희생도 결국은 자본주의의 기득권자들이 가지고 있는 힘과 권력 지키면서 나누지 않고 독식하려는 생각이 바로 지구촌 곳곳의 비극을 만들어내는 것이며, 개인적으로도 욕심과 욕망 때문에 스스로 지옥을 만들고 있다는 것. 이 소설은 우리 모두가 평등한 세계시민으로 살기 위하여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물으면서 대답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나 과연 이 시대의 생명수가 찾아질까? 이 시대의 바리데기가 누굴까? 있기나 할까? 이 시대에 바리데기가 존재할 수 있을까?


나의 대답은 아니다다.

인간에게서, 그리고 기득권자들에게서 욕망이라는 물건을 절대로 없앨 수 없을 테니까. 누구 한 사람이 바리데기로 나서서 될 일이 아닐 테니까.

나만이 아니라 작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모두가 욕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바리데기여야 한다. 그러나 그 일은 이상론일 뿐 실현가능성이 없다. 그렇다고 그냥 있을 수는 없는 일. 그렇기 때문에 작가도 일침을 가하는 정도의 행위를 보이는 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서 새로운 형식 두 가지를 보았다.

한 가지는 판타지기법을 차용한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 주인공 '바리'를 무당으로 설정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는 따옴표를 비롯한 일체의 문장부호를 사용하지 않은 점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나도 매우 잘 한일이라고 생각한다. 따옴표만이 아니라 글에 붙은 여러 가지 부호나 장치들이 맞춤법에 맞추려면 지켜져야 하겠지만 글을 쓰는 작업에서는 걸리적거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터라서.^*^

   

소설의 끝에 붙은 한겨레신문사와의 인터뷰 글 중에서,

'우리는 언제나 서구 세계의 표피만 보면서 심지어는 그 잣대로 자신을 재고 그에 맞추려하고 있다. 세계가 공유하는 문예사조' 따위는 없다. 자신과 한반도의 현재의 삶을 세계 사람들과 공유하려는 것이 작가가 국경이나 국적 따위에 구애받지 않는 '세계시민'이 되는 길이다, 세계문단이 한국문학에 바라는 것이 바로 그 점이다. 자신들과 비슷하게 흉내 낸 것은 그 누구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내용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2007년 10월 1일 토론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