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역사를 보는 눈이 미래를 결정한다

천마리학 2007. 10. 31. 12:30

 

 

     

    역사를 보는 눈이 미래를 결정한다

                                       - 이영훈의 <대한민국 이야기>를 읽고

 

 

 

   

 

 

참 유익한 책을 읽었다. 그리고 참 중요한 이야기를 들었다.

무심했던 우리나라의 근 현대사에 대하여.

역사를 바라보는 눈과 새로운 인식, 그 두 가지를 이 책에서 얻었기 때문이다.

무심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몰랐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속이 후련하다.


이 책은 경제학을 전공한 저자가 2006년에 출판된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에 실린 논문과 자신의 강연내용을 중심으로 한 부연설명을 통하여 그 앞서 출판된 <해방 전후사의 인식>의 오류를 하나하나 반박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역사의 바른 인식을 하도록 자기의 견해를 말하고 있다.

 

역사란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이라는 것, 그리고 역사가는 '역사와 투쟁하는 지식인' 그리고 선진 사회란 역사가들이 사료를 뒤져서 찾아낸 발언을 경청하고, 그것을 토대로 성찰하는 사회, 즉 역사가와 대중의 분업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가 진정한 의미의 선진사회라는 것을 전재로 하고 있다. 당연한 말이다.


현재 우리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역사의 단위를 민족주의의 역사관으로 보는 반면 저자는 역사의 단위를 개인, 자유로운 개인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공감한다.


민족적 역사관으로 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우리의 근 현대의 130년 동안의 역사를 오욕의 역사로 가르치고 있으며, 아직도 대한민국이 과거의 역사로 인한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한다. 잘못된 역사관으로 인하여 앓지 않아도 될 몸살이라는 것이다. 친일문제나 정신대문제, 일제의 수탈문제, 이승만에 대한 평가라든가 일제의 배경에 대한 분석 등이 왜 잘못되었는가를 해당논문들을 들추어가며 조목조목 알아듣기 쉽게 분석하고 설명하고 있어서 이해도 쉽다. 감사하다.


일제 수탈설에 대한 새로운 시각, 정신대와 위안부 문제가 서로 다른 문제라는 인식, 이승만에 대한 정치적 배경과 그에 따른 공과 과. 독립운동의 실체, 우리 민족의 정신적 토양과 문화에 대한 감각의 수준 등 적나라하게 분석하고 파헤치고 있다.

마치 재판정에서 피고를 변호하는 변호사처럼 잘못된 역사관으로 현혹당한 대중들을 돕기 위하여 전후사정을 펼쳐가면서 열변을 토하고 있다.   

아직도 우리는 민족사관에 의하여 역사가 잘못 인식되어진 채 후세들을 가르치고 있음을 걱정하면서, 그릇된 역사관으로 인하여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과거의 역사, 죽은 자들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시급하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공감한다.


그가 이야기한 우리 민족의 문화적 정서수준이 낮은, 역사유물에 대한 낮은 인식 수준에 대하여 말한 부분에서 내가 경험한 몇 가지 허탈함을 떠올리며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 한 가지 미륵사지에 관한 것.


지금의 미륵사지가 복원되기 전의 일이다. 80년대 중반쯤의 기억이다. 미륵사지 답사를 갔었다. 그 당시 나는 백제시를 쓴다고 열을 올리고 있기도 했다. 모두 사라지고 남아있는 서탑 마저 반 이상 무너진 상태였다. 인솔자가 미륵사지에 대한 여러 가지를 설명 하는 중에 탑에 대한 설명을 했다. 무너진 부분에 일정 때 일본사람이 시멘트로 땜질을 했다는 것이다. 무너진 부분만이 아니라 지하에까지 무지막지하게 시멘트를 들어부어서 다시 복원하려면 시멘트를 제거해야하는데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일본사람을 원망하면서 나쁘게 말했다. 남의 문화제라서 함부로 했다는 것. 그런데 나는 그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나마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있는 일본인이었기에 시멘트로나마 봉함을 해서 서 있게 한 것 아닌가? 그렇게라도 했기 때문에 그나마 그 모습으로 서있고 그로 인해 다른 부분의 복원까지 추측케 하는 중요한 존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도 그 주변에 사는 주민들은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문화재인가조차 생각지도 못했고, 사지의 주추나 조각들을 주어다 필요한대로 가져다 자기 집 댓돌로 쓰고, 질퍽거리는 마당 을 돋우는 돌로 쓰기도 하고, 가축우리 혹은 담장 축대나 토방의 받침돌로 이용하고 하고 있었다. 탑의 주변을 물론 지하의 구덩이는 거지들의 잠자리였고 농민들이 지나다 급하면 똥을 누고 개똥소똥 어우러져 더럽기 짝이 없다. 그렇게 방치되어 있는데 일본인 탓을 할 게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면서 우리들 자신이 반성해야 할 일 아닌가?  


다시 책으로 돌아가,

그가 설명하고 파헤친 역사적 사실이나 배경 설명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점도 좋았지만 그의 논리 전개하는 방법에도 찬성하는 바이고 그가 제시하는 역사관이나 객관성에 대하여도 신뢰가 갔다.


또 한 가지, 새롭게 인식한 것이 있다.

'민족주의'에 대해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존중되어져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이다. 개인의 삶이 좋아야 민족이니 국가니 하는 여유도 생길 것이다. 아니 국가나 민족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민족보다는 민족주의라는 정치적 어떤 기류에 의해서 기획된 사상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늘 주변에서 우리들 스스로가 단일민족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도 어딘가 모르게 켕기는 기분이었다. 다른 나라 사람들과의 대화 혹은 그들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경우, 아니 그저 나 혼자의 생각으로도 그랬다. 그리고 내 삶이 혹은 주변의 내 친구들의 삶이 과연 민족주의이거나 민족주의와 관련 있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삶을 살면서 내가 언제 민족을 생각하며 결정하고 행동했던가? 그리고 나의 삶이 힘들 때 민족이 생각났는가? 민족이 도움을 주었는가? 내 삶이 즐거울 때 민족이 즐거웠나? 내가 슬플 때 민족이 슬퍼해줬나? 아니다. 아니었다.

나의 삶 자체가 좀 더 만족스럽게, 좀 더 가치 있게, 좀 더 보람 있게 살고자 나 자신이 노력할 뿐이다. 내가 편안해야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그렇다고 민족을 배반하는 삶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민족'보다는 '민족주의'라는 개념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다.


더구나 요즘 글로벌 시대가 되고 보니 나에겐 '민족'이란 개념조차도 굳이 내세울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어 '민족주의' 개념은 더더욱 애매해졌다. '민족'을 따져가며 '민족주의'를 부르짖은들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 전 세계가 글로벌이라는 한 개의 사회가 되고, 한 개의 마을이 되어 모두를 개개인으로 존중하고 인정하는 개인주의 세상인데. 따지고 보면 민족주의는 약한 자들이 힘을 과시하거나, 모아 붙들어 매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단체심에 지나지 않을까 한다.


역사의 단위를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개인에게 두어야한다는 이 책의 저자의 주장과 논리가  내가 갖었던 의구심을 풀어주면서 딱 맞아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맞어 바로 그거였어.

나는 많이 알지 못하고 많이 배우지 못해서 표현 못하고 이름붙이지 못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가려운 데를 긁힌 것 같이 속이 후련하게 느껴진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깨우쳐준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다.


저자가 제시하는 각종 논문이나 역사적인 증거자료, 증언 등을 보면서 얼마나 그가 꼼꼼하고 책임 있게 조사했는가를 알 수 있고, 따라서 그가 제시하는 거의 모든 부분의 맹점들이 손에 잡히듯 들어왔다. 그가 앞으로 기회가 닿는다면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함께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역사의 뒤를 잇는 4,19와 5,16에 대해서도 <개발시대의 재인식>이라는 책으로 편집하고 싶다고 밝힌 마지막 말에 벌써부터 그 책이 기다려진다.


기우 혹은 사족(蛇足))일지모르지만 반박의 대상인 논문저자들에 대해서도 염려가 되었다. 논문을 쓸 당시 정말 진정한 마음으로 썼는가? 하는 것을 자성하고 있을까? 혹시 그 후 시각이 달라져서 반성이나 후회를 하지나 않았을까? 아니면 아직도 그때의 생각으로 확고한 소신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것이 궁금하기도 했다.

지금 이 후에 그 사람들의 새로 쓴 논문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땐 그렇게 생각해서 그렇게 썼는데 그 후로 여러 가지 사료를 조사하여 얻은 결과, 그때의 안목에 잘못이 있어서 다시 쓴다는, 솔직하고 통쾌한 논문말이다. 따라서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논문사기사건, 논문 조작 사건, 학력 위조 사건 등을 떠올리면서 정말 논문은 진지하게 자신의 생명을 다루듯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7년 10월 30일 토론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