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나무의 죽음-보이는 세계와 보이지않는 세계

천마리학 2007. 9. 6. 11:12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차윤정의 <나무의 죽음>을 읽고

 

 

 

전제컨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나의 詩작업을 위해서 이 책 읽기를 선택했다. 오래전부터 시작된 나의 나무사랑은 계속되고 있음이다.

그리고 요즘 나무에 대한 또 다른 시 작업을 구상 중에 있다. 

오래 전 나의 '식물성의 詩'를 쓰는 작업의 연속선상이고 이미 발표한 나무 테마시집 <나는 아직 사과 씨 속에 있다>의 후속인 셈이다.


나는 우선 이 책을 단숨에 읽어 내리는 것을 사양했다.

나이 탓인지 게으름 탓인지 때때로 감각이 마른나무토막처럼 무디어진 것 같기도 하고, 기억 또한 나무의 그루터기처럼 단단해지는 느낌이다. 글을 읽으면서도 거듭 읽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다. 집중력 부족이겠지만 어쨌든 내 능력부족이라는 것을 자인하면서 한 가지 더, 이유를 대자면 이제 8개월 된 손자 '아리'를 돌보느라고 시간에 �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근래에 읽기를 마친 책들은 단숨에 읽어내지 못하고 짬나는 대로 토막토막 읽을 수밖에 없었다. 책에 집중하지 못했고 책으로부터 받는 감동 또한 줄어든 것이 사실이지만 어쩔 수 없다. '아리'가 책읽기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나무의 죽음>을 읽는 동안 짬짬이 끊어 읽는 것이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나무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터라서 어느 수준 정도의 나무에 대한 지식은 갖추고 있으므로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단원마다 끊어 읽음으로 해서 생각을 정리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끊어 읽는 독서도 책읽기의 괜찮은 방법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 책은 숲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생과 사(死)의 세계, 얽힘과 분리, 변화와 적응, 소멸과 진화 등의 관계를 쉽게, 초등학교 6학년 정도면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주고 있다.


시커먼 흙속에서 어찌 저리 고운 온갖 색깔들의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릴까?

시커먼 흙속에서 어찌 저리 새콤달콤 온갖 맛들이 생겨날까?


이것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궁금증이다. 궁금증이라기보다는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이다. 하여튼 이 궁금증을 풀어주려는 듯 토양에 대해서까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 그루 큰 나무의 죽음을 통해서 빚어지는 온갖 변화와, 그와  관계되는 온갖 생명들의 이동과 소멸 등 공생공존의 질서를 통하여 '생태계에서는 어느 종(種)도 결코 독립적일 수 없다는 사실은 규명해보이고, 그 규명을 통하여 현재의 나의 위치와 역할, 기능에 대해서 돌아보게 했다.

또한 환경과 주변의 어울림을 통하여 미생물에서부터 시작해서 덩치 큰 짐승들에 이르기까지 또 이끼로부터 시작해서 큰 나무에 이르기까지 많은 동식물의 이름들이 거론되고, 그들이 어떻게 공생 공존하며, 누가 누구를 먹고 먹히고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 지의 순환 고리를 자세히 보여줌으로써 과학의 세계, 지식의 세계를 넓혀준다.

이는 생태의 과정을 통한 보이는 세계와, 분해되고 변화하며 다른 물질이 되거나, 다른 생명을 키우는 먹이가 되는 보이지 않는 세계가 함께 있음을 알게 한다. 따라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그 두 세계 너머에 있는 사고(思考)의 세계까지 유도해주고 있다.

나무가 쓰러진 자리에 남아있는 불그레한 목제조각들, 무심하게 누워있는 붉은 기운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프다는 저자의 말을 충분히 공감한다. 참 오래된 일이지만 어느 초가을 시장입구의 과일가게 좌판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새빨간 햇사과를 보는 순간 울컥, 나도 모르게 목이 메었다. 내 손에 쥔 반들반들 윤기 나는 새빨간 사과 한 알, 그렇게 되기까지 칠흑의 어둠과 따가운 햇볕, 새벽 찬이슬과 비바람 속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살아내었을까,

'알면 보인다'고 했다.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니까 마음이 아플 수 밖에. 

  

이 책을 읽어 얻은 것을 3단계로 정리해보자면,

첫째, 상식과 지식의 확장이다. 지렁이의 배설물이 온대지역의 풀밭에서 10년간 4cm의 높이로 이는 경운기로 땅을 갈아엎는 것과 맞먹는 양이라든지, 쓰러진 나무의 통상적인 수분함량이 157%에 이른다든지, 딱정벌레의 종수가 29만종으로 가장 많은 종수라든지..... 하는 식의 사실. 평소에 대충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더 정확하게 확장시켜 알게 해주는 지식충전, 나는 지식충전만으로도 재미있다.


두 번째 단계로는 자연과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이다. 자연이란 절대강자를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인식의 전환을 하게하고, 죽은 나무와 짐승의 사체 등 숲에서의 죽음이 다른 생물들의 먹이가 되어 아무리 생물수가 늘어나도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에서는 질량불변의 법칙을 떠올려주었고, 나무가 죽어 분해되기까지의 시간이 살아있는 시간보다 더 길고 다시 나무로 태어날 수 있도록 하는 원자 혹은 이온상태의 화합물(미네랄)이 되는 재순환의 시간이 150년 이상이 걸린다는 것 등을 통하여 숲이 빚어내는 생명드라마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세 번째 단계이다.

죽음은 곧 끝이 아니라는 것, 소멸이 결코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사방으로 보이게, 보이지 않게 얽혀있는 자연의 그물망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결고리로 순환된다는 것. 고로 나무의 죽음은 슬픈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귀중한 자연의 유산이라는 것,

고로 나로 하여금 남아있는 삶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와 죽음에 대한 재인식을 촉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죽음 또한 살아있음 못지않게 아름답다는 인식이다. 그러나,


그러나 나는 아직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말로는 아름답다거나 의미 있는 삶의 한 부분이라거나 하는 등의 관조의 세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어느 정도 인식 접근은 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 아직은 거기까지 닿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완전소멸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지극히 원론적인 생각을 하면서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고 있다. 아직은 죽음은 나에게 두려운 현실이다.^*^

다만 이 책에서 보여준 나무의 죽음을 통하여 한 뼘쯤 더 가까워질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시커먼 흙속에서 어찌 저리 고운 온갖 색깔들의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릴까?

시커먼 흙속에서 어찌 저리 새콤달콤 온갖 맛들이 생겨날까?


하는 의문들을 간직할 것이다. 아직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간직하듯,

나의 보다 뜨거운 詩를 위하여.

그리고 나의 보다 겸손한 삶을 위하여.


<2007년 8월 31일 토론토에서>

 


                                            

 

 

 

<메모>

*지렁이의 배설물은 온대지방의 풀밭에서 10년간 4cm의 높이로 쌓일 정도인데 이는 경운기로 땅을 갈아엎는 것과 맞먹는 작업량이다.

*나무는 비가오면 몸무게의 6배에 해당하는 물을 저장, 일반적으로 토양의 수분함량이 6~7% 내외. 쓰러진 나무의 통상적 수분함량은 157%까지. 건조한 곳에서도 죽은 나무가 있는 자리에서만 풀이 돋는 이유.

*식물과 균의 동맹관계가 없었다면 비에 씻겨 황폐해지는 4억 5천만 년 전의 지구토양환경에서 식물은 건조한 육지를 점령할 수 없었을 것.

*생물은 결국 물질의 순환을 이끄는 장치. 단순한 물질이 특정생물의 몸으로 거듭나면서 고유한 생명력을 갖는 것은 경이로운 현상.

*곤충이 142만종으로 지구상 생물종의 50%, 석탄기 말기(3억년 전)부터 지구장악. 가장 많은 수가 딱정벌레(애벌레, 번데기, 성충의 시기를 거치는 완전변태)로 29만종.

*흰개미(벌무리)는 늦여름에 일시에 날아오르며 짝짓기 비행 후 스스로 날개를 먹어치움. 썩은 나무둥치에서 점령의 역사 시작.

*이끼는 ha당 5만 리터의 물을 함유하고 있다.

*말총벌, 기생벌은 긴 산란관으로 나무구멍속의 하늘소 애벌레에 산란한다. 곤충세계의 기생은 가장 강력한 조절장치.

*개미붙이-나무좀의 페르몬에 이끌려 구멍 속 애벌레 사냥.

*나무의 살아있는 조직이 수피 가까이 있어 나무의 속이 없어지더라도 전체적인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한모금의 흙보다 한모금의 수액이 훨씬 영양가가 높다.

*자연이란 절대강자를 허용하는 곳이 아니다. 모든 정보는 항상 공개되고 공유되고 변형된다.

*큰 바다를 키우는 것은 고래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플랑크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