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낭비를 막기 위한 무거움의 역설적 표현
-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읽고
어차피 우리의 삶이 일회성 아니던가?
살아가면서 가끔 우리가 내재되어있는 욕망과 부딪칠 때마다, 혹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로 고민할 때 떠올리는 생각이다.
'영원한 재귀'라고 단정한 니체의 사상에 밀란 쿤데라가 이의를 재기하고 있다. 끝없이 반복된다는 '영원한 재귀' 그러나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고 거스르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만약 우리의 삶이 수없이 반복된다면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듯이 영원히 못 박히는 꼴이 되는 무서운 생각이라고 딴지를 걸면서 '영원한 재귀'의 세계에서는 모든 행동에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짐이 지워져 있는데 비해서 일회성의 삶은 가벼운 것이 된다는 것이다.
'영원한 재귀'의 삶의 모든 동작에 지워지는 무게, 그것은 곧 책임일 것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내가 살아오는 동안 품었던 삶의 관점을 다시 한번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현생의 삶을 끝내는 마감점이 다음 생의 시작점이 된다고 가정했었다. 현재의 삶을 어떻게 사는가, 얼마큼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의 높이로 끌어올리는가에 따라 다음 생의 출발점이 결정된다. 말하자면 현생에서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 과연 나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하는 고민에 빠진다. 계속 노력해야하는가? 아니면 어차피 이르지 못할 바엔 현생을 가볍게 즐기며 편하게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딜래머에 빠진다. 그럴 때 나는 결심한다. 지금 생의 목표점이 다음 생에서도 목표점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생을 열심히 살면서 목표를 향해 가다가 다다르지 못한다하더라도 지금 생이 이룬 만큼의 지점에서 다음 생이 시작될 것이고 그렇다면 다음 생에서는 목표점에 이르기가 수월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나는 지금 생이 힘든다 해도 힘껏 살아야겠다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생각은 지금의 삶이 힘들 때 나 자신을 부추켜 세우느라고 그리고 내 삶의 좌표를 흐트리지 않으려고 스스로 북돋우는 방편이다. 동시에 생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전제가 된다.
나는 지금도 삶이 과연 영원히 반복될 것인지 아니면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인지 모른다.
이런 나에게 밀란 쿤데라가 내 앞에 놓인 삶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고 무자년(戊子年) 정초(正初)에 토론을 제의해 온 셈이다.
자기 분수대로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성현들은 누누이 귀띰해주지만 주어진 삶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 어디 그리 많을까? 비록 주어진 삶에 만족하며 살자고 결심하고나서 만족해하면서 살기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결심을 하는 것도 나이가 많아진 후에 다시 말해서 삶을 어느 정도 소비한 후에 얻어진 깨달음의 하나일 것이다. 주어진 삶에 만족하며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깨달음.
<체코인들의 역사가 반복될 수 있다면 번번이 다른 가능성을 시도해 보고서 두 가지 결과를 비교한다면 확실히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실험을 하지 않고서는 모든 숙고들은 가정의 유희에 불과하다. 한 번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보헤미아의 역사는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럽의 역사도 그렇다. 보헤미아의 역사와 유럽의 역사는 불행하게도 인류의 무경험에 의해 그려진 두 개의 스케치다. 역사란 개별적인 인간의 삶과 똑같이 가벼운 존재다. 그것은 참을 수없이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휘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이 대목이 그의 주장을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며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바람둥이 외과의사 토마스와 순진하고 시골처녀로 시작해서 의심 많은 불행한 여인이 된 테레사, 그리고 삶의 열정과 외로움을 그림 그리는 일로 달래며 독신으로 살면서 남자를 즐기는 사비나와의 얽힌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서로 다른 취향으로 엇갈리기도 하고 서로 다르게 가야하는 삶의 방향을 보여주긴 하지만, 이야기로 봐서는 흔하디흔한 남녀 간의 시시콜콜한 사랑 이야기다. 그러나 여기에 끼어든 역사의 소용돌이와 지문이나 나레이션으로 깔리는 지은이의 철학적 의견이 소설의 格을 높여주고 있다.
생을 가벼운 것으로 생각하는 토마스, 끊임없이 빚어지는 뒤틀림 속에서도 끝내 함께 살아가는 테레사와의 매끄럽지 못한 삶. 서로 다른 이념이나 사상 때문에 일어난 전쟁으로 시달림을 받아야하는 힘든 삶을 통하여 무거움과 가벼움을 어떻게 규정해야하는가를 반문하고 있다.
그는 어디까지나 역사 가볍게 지나가는 스케치일 뿐 완성된 그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만약 완성된 그림이라면 무거운 것이 되며 그것을 증명하려면 불행한 역사가 재현되어야 하는데 불행한 역사가 재현되지도 않는 현실에서 '영원한 재귀'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있지 않은 가정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우주에 모든 인간이 다시 한번 태어나는 혹성이 하나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모든 인간은 지상에서의 그들 삶을 회상하고 그들이 지상에서 했던 모든 경험들을 의식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또 다른 어떤 혹성이 있어서 우리 모두가 앞서 산 두 삶의 경험을 가지고 세 번 째로 태어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뿐만 아니라 인류가 계속 한 단계(한 삶) 더 성숙하여 새로이 태어나는 더 많은 혹성이 있을지 모른다.>
바로 내가 생각하며 나의 삶을 달래고 부추켰던 부분을 정확하게 밀란 쿤데라는 꼬집고 있었다.
그의 주장은 결국 개인의 삶이나 역사에서 생긴 일들의 명분을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것,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행동들에 대해서 가졌던 확신들이 상황이 바뀌면 해석도 달라진다는 것, 그러므로 '영원한 재귀'로 인한 무거움으로 확정될 수 없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주장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진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것을 알았는가 아니면 알지 못했는가?>가 아니고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은 죄가 없는가? 왕좌에 앉은 바보가 바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책임에서 면제되는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관주의와 낙관주의에 대해서도 그는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이러한 유토피아적 이상향의 시각에서만 낙천주의와 비관주의라는 두 개념을 의미 있게 적용할 수가 있다. 낙천주의자는 제5혹성 상에서 인류의 역사는 보다 적게 피비린내난다고 믿는 사람이요. 비관주의자는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물론 나 역시 나 자신을 낙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오고 있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늘 허우적대면서도 쓰러지지 않았고, 비록 뜻한 바 다 이루어내진 못했으나 쓰러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쓰러지고 싶지 않기 때문에 희망을 버리지 않으려는 나 자신의 삶의 경영방법이기도 하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다음 생의 출발점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지금 생을 열심히 살아야한다고 나 자신에게 스스로 내려치는 채찍.
사실 그것은 내가 다음 생을 믿건 안 믿건 간에 결론은 지금 생을 열심히 살아내고자 하는 나의 열망이다.
개인의 삶뿐만이 아니라 역사 또한 반복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밀란 쿤데라의 이면에는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 깔려있지 않나 생각된다. 더 잘 살고 싶은 욕망, 불행하지 않게 살고 싶은 욕망, 희망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음에 대한 역설적 표현이 아닌가 한다.
'유토피아'니 '영원한 재귀'니 '비관주의'와 '낙관주의'...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참을 수 없게 하는 모든 것은 결국 우리들의 삶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나는 이 소설에서 자칫 가볍게 생각되기 쉬운 '가벼움'이란 말이 사실은 '무거움'으로 쓰여지고 있다는 것과, 이 소설의 의도를 생의 낭비를 막기 위하여 우리의 삶이 연속적인 삶이 아니라 단 한번으로 사라지는 가벼운 삶이라는 것을 깨우쳐주려는 무거운 경고로 받아들였다.
오래 된 작품이지만 올 해 들어 읽은 첫 작품으로 다시 읽으면서 서로의 삶의 방법에 대한 생각에 대해서 토론하자고 손을 뻗어온 밀란 쿤데라에 대하여 감사한다.
단 읽는 내내, 번역의 기능에 대해서 또 다시 불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전에 번역된 탓이거니 이해해가면서 읽었지만 소설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더 어렵게 만든 번역, 세련되지 못한 번역의 불편함을 또 다시 절감했다.
<2008년 1월 9일 토론토에서> 23매.
<불어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