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문예가족 14집-세월의 깊이만큼.....

천마리학 2007. 1. 24. 08:32


 
세월의 깊이만큼 더 깊어지기를!
                            -문예가족14집을 읽고-

                                              權       千      鶴


이곳 토론토까지 날아온 문예가족 14집을 반가운 마음으로 일독했다.
제일 먼저 느껴지는 것이 세월의 깊이였다.
 이상하게도 가족들의 글 중에서 같은 단어나 같은 의미의 말들이 많다는 점이었는데 이는 새로 입회한 젊은 가족들이 아니라 오래된 식구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현상이었다. 그래서 세월의 깊이, 세월을 의식하는 가족들의 의식을 공감하며 읽었다.
 세월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것은 정년퇴임하는 가족이 있다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잘 늙을 것 같지 않던 동안(童顔)의 하근이성이 벌써 정년퇴임이라니. 어벙해 보일만큼 순진함이 묻어나던 동안의 얼굴로 약지 못하게 굴던, 하기사 지금도 성은 약지 못하지만^*^, 하여튼 그런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 새 그 동안(童顔)의 얼굴에 잔주름이 그어지고 서리 같은 안개가 잔자부름하게 내려앉아 있음이 느껴진다.
흰머리가 사뭇 편안해 보이는 용찬이성의 모습에서도, 또 멋을 부린 편집기술 때문인지 모르지만 정선이성의 성성한 머리에서도 세월이 묻어나고 있었다. 다른 성들도 모두 기세 등등, 한 가락씩 하던 옛모습 다 어디로 가고 이젠 모난 곳 적당히 주물러진 항아리 같은 얼굴들이니.... 하기사 망내인 나도 흰머리 성성하니 더 말해 뭐할까.

그 다음 세월을 느끼게 하는 것은 가족들이 사용하는 글에서였다.
우연의 일치이지만 같은 단어 혹은 같은 내용의 말을 쓰고 있음이 눈에 띄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
그 중에서 먼저 '하릴없이'라는 단어였다.
“.....그러다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상황이 되어 하릴없이 ’시인‘이라는 이름에서 멀어질 만큼 개점휴업 상태일 때도 있었다. 한동안 시가 써지지 않아 하릴없이 ’시인‘이란 이름에서 멀어진다고 느껴졌을 때도, 내가 하릴없이 시와 멀어진다 한들 음풍영월하면서 ’시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초조한 마음을 달래곤 했다.” 라고 내가 나의 특집 시작노트에 썼다. 그런데 초포성님도 그의 시작노트에서 '하릴없이'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내 풍신난 육신 속에는 엄동설한에도 찌이-하고 우는 놈과 맴맴 우는 두 녀석 매미가 이명으로 살아 하릴없이 두견화 피는 언덕을 눈감아 볼 수 밖에” 라고 쓰고 있었다.
 
물론 누구나 같은 단어를 사용할 수는 있다. 다만 우연의 일치로 동시에 쓰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뭔가 비슷한 느낌들을 가지고 있다는 뜻도 될 수 있어 하는 말이다.

그 다음으로는 '부끄럽다'는 말이었다.
이 말은 나이 이만큼쯤 먹고 보니 그동안을 허송세월로 보냈다는, 그래서 부끄럽다는 의미다. 어찌 보면 누구나 나이 들면서 똑같이 느끼는 감정이기도 하고 누구나 다 나이 들면서 하는 말이기도 하다. 허나 문예가족 14집에서 성들이 다 같이 공감을 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띄어서 하는 말이다.
 
하그니 성님이 '...훈장을 받기에 부끄럽기도 하지만, 거절하기도 부끄러운 일이라....'라고 했고,
 
재규니 성님 역시 '....세상살이에 그렇게 깊은 눈을 가진 것도 아닌 사람이 인생을 꽤나 아는 것처럼 때죽거리고 있다는 것도 여간 부끄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쓰면서 은근히 누구 뒷대 누르는 소릴 하셨고, (재규니성은 지금도 우체국장보다 경찰서장이 높다고 생각허시지요? 알고보면 그게그건디^*^)
 
정서니 성님은 '옛 어른들의 글을 읽고 있으면 독서가 부족한 부끄러움을 버릴 수 없다'라고 했으니 그래도 다른 성님들 부끄러운 것보다 눈꼽재기만큼 다른 의미로 부끄러운 것이었는데 거기다 더하여 '...이제도 좋은 글들을 만나면 밤을 새우는 욕심을 부리게 되니 그래저래 부끄럽기만 하다.'고 하니 이건 회초리 들이대는 소리 아닌가.

부끄럽다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뿐, 부끄러움을 내보이긴 용차니 성님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변명이나 이유가 여기에 있겠는가. 내놓을 만한 자랑스러움은 더더욱 없다.'고 부끄러움의 반대말을 했고, 모규니성 역시 '....하여 꽤 많은 기행시를 남겼지만 번번이 흡족하지 않아, 이번엔 처음부터 산문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이 작업도 만만치 않은 고역이요 흡족하지 않긴 마찬가지다.'라고 이실직고 하고 있었다.

말이 나온 김에 더하자면 용차니성과 하그니성은 부끄러움을 어기차게 핑계까지 대고 있었다. 하그니성은 '뭐 나만 별스런 사람이 아니지 않는가., '나라고 뭐 뾰족한 수가 없지 않겠는가'하면서 부끄러움을 지워나간다고 했고 용차니성은 '누구는 별거간디? 괜한 억지를 써본다'고 털어놓고 있었다.
      

부끄러움이 왜 나라고 없겠는가. 성님들의 그 심정이 충분히 이해되고 공감하고 있는 것으로도 이미 나도 하그니성 표현대로 낫살이나 먹었다는 증거가 아니고 뭐겠는가.

결론적으로 한 말씀 하자면 초포성은 맴맴 찌~ 하고 우는 두 녀석, 잘만 기르면 싸가지가 있을 듯 하니 끝끝내 열심히 기르시고, 모규니성은 재미나게 읽었으면 좋겠다고 허셨는디 유익헐진 몰라도 재미는 모르겄습디다. 가다가 한 번 씩 '믿거나 말거나'라는 말을 넣어서 정말 해깔리게 만들더라구요. 여하간 재미나게 써야 재미나게 읽을턴디.... 성 말마따나 만만찮은 산문, 다음엔 재미나게 좀 쓰쇼. 산문이 욕허겄소.(썩을 것! 허고 욕하는 소리 귀에 잼잼).
 
그리고 나뭇잎 그냥 그렇게 진다는 하그니성(참, 하그니 성, 이제사 성이 말한 <만월>을 여기 와서야 다 읽었습니다. 읽는 동안 정신을 몽땅 팔렸었고, 왜 읽어보라고 했는지도 알겄습디다. 행복한 시간이었어요.)이나, 속보이고 억지스러운 잔재주는 역시 잔재주일 수밖에 더도 덜도 아니라는 용차니성, 뒷짐 지고 세상 보는 버릇, 지발 그 도 튼 듯 한  티 좀 내지마쇼. 모두들 친정식구 같아서 맘놓고 수다도 떨고 아는 체도 해보는 것이지. 누구는 그럴 줄 모르간디요?^*^ (여기까지가 왕년의 망내로서 성님들께 망내짓 한번 해봤쑤)

세 번 째로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 것은 새로운 가족들이 많이 생긴 것이다. 젊고 싱싱한 새 가족들의 글들이 늙어가는 문예가족의 윤활유 노릇을 하고 있어서 반가웠다. 앞으로도 새 가족들의 역량으로 줄기차게 이어나가면서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기를 기대하며 바랄 뿐이다.
 
호병탁 아우(가족의 호칭법에 따라 이렇게 불러도 괜찮지요?)의 평론 <판소리 예술의 미학적 구성>은 개인적으로 잊혀져가는 판소리에 대한 지식을 다시금 일깨워주어서 관심있게 읽었다.
언제, 새 식구들과 오두 함께 어울려 차 한잔 나누는, 더 뜨거워지면 술이라도 몇 순배 돌리는 시간이 있기를 기대해본다.
   
쨌거나 간에 우리 정서니성님, 잔소리에 애교까지 섞어가며 없는 정신에 건망증까지 심한 모양인데, -글쎄 나에게 보내주는 책에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싸인이 들어있는 것만 봐도 대충 알겄습디다.^*^ 여기가 토론토만 아니었어도 당장 들고 쫒아가 바꾸것등만^*^- 하여튼 그렇게 요란분주 떨어가면서 귀한 시간 쪼개고 쪼개어 문예가족 14집 마무리 지으신 정서니 성님에게 우리 모두 박수나 한번 심차게 보내줍시다.
 
아울러 성님들의 만수무강과 함께 문예가족의 무궁무진한 발전을 위하여 보라보!

 (2007년 1일 17일 토론토에서) -20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