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광야교회와 야단법석

천마리학 2020. 9. 15. 04:25

광야교회와 야단법석 * 권 천 학

시인 • 국제 PEN 한국본부 이사

 

 

 

 

815광복절을 맞은 서울의 광화문광장이 전국에서 모여든 인파로 펄펄 끓었다고 한다. 비가 내렸다는데도 인근의 이면도로까지 가득가득 메운 보도를 접하면서 가슴이 아리다. 그야말로 야단법석이었다,

작년 6월경 민중집회가 시작되면서부터 광장은 뜨거웠다. 그러다가 10월부터 청와대 사랑채 옆에 천막을 친 ‘광야교회’가 등장했다. 일부 기독교도들이 주축이 되어 구국의 기도와 찬송을 하늘로 쏘아 올리는 예배는 영하의 추위를 무릎 쓴 채 계속되었다. 그러자 당국에선 집회중지, 계고장과 철거명령, 구속 등의 조처를 취했고, ‘순교하겠다...’는 맞대응으로 버티며 겨울을 났고 드디어 금년 2월, 코로나 바이러스의 습격으로 강제 철거되면서 멈추었다. 그 광장이 이번 815집회를 바이러스와 연결시킴으로서 또다시 분열의 불꽃으로 점화되었다.

찬반 여론이 빗발치고, 좌우의 대결을 상징하는 싸움으로 격화된 것도 사실이다. 광장에 나선 사람들은 일개 교인으로서가 아니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의 자각과 의식으로 참여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좌와 우의 대결양상이 언제 어떻게 끝이 날지 모를 일이다. 정치적 꼼수가 배재되지 않는 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가족 사이에도 자칫 불화와 균열을 만들 우려가 있는 정치이야기는 빼고 야단법석(野壇法席)과 ‘광야교회(廣野敎會)’의 어원(語原)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한다.

 

불교용어인 야단법석은 野壇法席 외에 惹端法席으로도 표기한다. 법당 안에서 치르는 법회를 야외에 임시법석을 만들어 법회를 본다는 의미이다. 실내에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없어 실외에 법석을 만든다는 뜻으로 野壇法席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니 시끌벅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惹端法席으로도 쓴다.

석가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파할 때도 야단법석(野壇法席)을 만들었고, 가르침을 얻고자 모여든 군중이 3백만이나 되었다하니 아마도 야단법석(惹端法席)이었을 것이다.

 

석가 이후, 그 야단법석의 연유가 된 것은 많이 알려진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元曉大師)이다. 유학길에 오른 의상과 원효가 어느 토굴에서 쉬어가게 된다. 목이 말라 두리번거리다가 마침 곁에 깨진 바가지에 담긴 물을 보고 너무나 달게 마셨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해골이었다. 그 순간,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깨달음, 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다. 그 깨달음을 얻고 보니 굳이 당나라까지 가서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으로 의상과 헤어져 도중에 돌아왔다는 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내용이다. 그러나 일본의 관련기록에 의하면, 긴 여행의 피로를 씻기 위해 쉬어가기로 하고 발견한 토굴에 들어가 하룻밤을 세웠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토굴이 아니라 반쯤 무너진 무덤이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더 보내는데 첫날밤은 무서움을 모르고 단잠을 잤지만 무덤이라는 것을 알게 된 둘째 날 밤은 도깨비가 나타나 우글거려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거기서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도(道)를 깨달게 된다.

이를 종합해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해골물 설화는 그 두 버전 즉 토굴이 무너진 무덤이었다는 것과 달게 마신 물이 해골에 담긴 물이었다는 것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덧붙이자면, 도중에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왔다고들 알고 있는데, 중국과 일본의 관련 기록들을 종합검토한 결과, 원효가 그 길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의상과 함께 당나라에 가서 단기간 머물며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奘)의 가르침을 받았고, 일본인 승려 가재를 제자로 두었다는 주장도 있음을 알아두면 좋을 듯하다. 어떻든,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불교대중화를 꾀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야외에서 법석을 만들어서 설법을 했고 그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야단법석의 주인공이 되었다.

 

광화문에서 시작된 천막교회가 빗대어 표현한 ‘광야교회(廣野敎會)’는 기독교용어이다. 모세가 이집트(애급)의 오랜 노예생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 시내산에 도착하고,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떠돌며 보낸 40년의 여정(B.C.1487~1447년)을 ‘광야시대’(출애급기)라고 하고 그동안 광야에서 드린 예배를 ‘광야교회’라고 한다. 지면의 제한으로 길게 쓸 수는 없지만 그 세월동안의 역경을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성경의 구절구절, 역사의 페이지에 끼어있는 이야기들은 그야말로 구구절절이다.

 

광화문 광장에 모여 해방과 건국을 기념하는 인파의 물결과 이스라엘민족이 겪은 고난의 세월을 오버랩 시켜본다. 썩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하지만,

종교가 나라를 걱정하고, 국민이 나라를 걱정하는 사태가 결코 편치 않다. 따라서 종교적 용어가 정치적으로 효용 되는 것 자체가 이 시대의 아픔을 비치는 거울이 아닌가 싶어 매우 안타깝다.♠

'권천학의 수필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마, 이제 고만 무르시오소서!  (0) 2020.12.04
빼앗긴 악수(握手)  (0) 2020.10.07
조금만 더 참아요  (0) 2020.09.05
예사롭지않다  (0) 2020.07.22
낙엽칙서  (0) 2020.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