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또 하나의 여름이 가고 가을이 깊을 무렵, 권천학 시인의 열한 번 째 시집 ‘노숙(露宿)’은 낯설게 와 닿았다. 토론토의 여름이 빛나던 어느 날, 시인의 이름을 닮은 커다란 학 한 마리는 온타리오 호수에 날개를, 어찌 어찌 내리지 못하고 태평양 연안으로 날아 긴다. 그리곤 다시 ‘두 도시’(밴쿠버와 토론토)를 오가며....우체국 소인이 다닥다닥 까맣게 찍힌다. ‘노숙’인의 흔한 옷차림처럼. 그런 사연의 시집 ‘노숙’을 맞는 순간, Dramatic Entry(박근혜의 실족사고) 아닌, Dramatic Arrival이라는, 꽤 감동적인 만남이었다.

 

권천학 시인의 시어(詩語)는 단아하다. 말 두 마디 대신 한 마디를 고르며 다듬는 시어에는 두 개, 세 개의 의미가 담긴다. 시 속 풍경을 오가며 언어의 실험을 대하는 듯 낯설기도 하다. 그려지는 풍경의 울림은 아득하다.

 (...) 시인은 곡비(哭婢)다. 곡비여야 한다./ 하여, 나는, / 한 시대를 함께 건너는 사람들의 충실한 곡비가 되고 (...) 나는 시(詩)의 자손이다. (...) 여전히 바람이 분다.

시인은 머리말(序文)에서 함축성 있는 시어를 풀어 놓는다. “곡비여야 한다”는 시구는 가슴을 둔탁하게 울린다. 그건 시인의 숨결이자 살결처럼 다가온다. ‘상주(喪主)’ 대신 울어주는 노비(奴婢)가 곡비다. 어린 시절 시인은 집안에 곡비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듣는다. 남의 슬픔을 대신 울어준다는 신기한 모순...더욱이 신기했던 건, 울음의 리듬이 달라야했다는, 망자(亡者)가 된 상주의 가족관계에 따라 달랐고, 남녀를 구별하며 다양한 울음소리를 내야한다는 것.

시인의 ‘시작(詩作)활동의 화두는 곡비’ 였다.

 

시를 위한 곡비, 시인은 곡비의 먼 길을 떠난다.


꽃자루의 행랑채 / 씨앗의 숨소리가 들리는 / 이슬의 집에서 / 하룻밤//어둠 깊은 씨방에서도/ 하룻밤//태풍의 눈 / 기막힌 고요 속 절벽에서도 / 하룻밤 //월식(月蝕)의 일그러진 / 비탈 // 비좁은 들창 너머 / 종점 없는 바람의 길로 / 흘러들어가는 /풍찬노숙(風餐露宿)의 / 목숨 한나절// ‘노숙’ 전문


 해서 시인은 스스로 노숙인이 된다. 곡비가 되고자 다양한 파편들을 추슬러낸다. 바람과 이슬을 무릅쓰고 한데서 기식하는(風餐露宿) 모진 삶은 ‘이슬의 집에서/하룻밤/’의 곡비가 되고 ‘씨방에서도/하룻밤/’을 새우며 또 다른 풍경을 펼친다. ‘기막힌 고요 속 절벽에서도/’ 하룻밤을 지새며 스스로를 자학하는 시인은 곡비의 절창인 저마다 달라야하는, 색다른 리듬, 그 울음의 짙은 색깔을 시에 담는 험로를 걷는다. 스스로를 학대하는 풍경을 그려내는 울음의 공간은 넓다.


차라리 다 주어 보낼 걸 / 있는 대로 다 놓아 버릴 걸 / 더는 나아가지 못할 이곳에서야 / 목숨마저 떼어 보낼 걸// 온 날 온 밤을 / 붉은 몸살로 지새워도 / 핏빛 그 한 마디 주어 보낼 걸// 언약의 말씀에 배어 있는 찬바람도 함께 / 씻어 보내 버릴 걸// ‘서운사 동백’ 전문


 쉽고 투명한 언어를 부리는 이 시의 울림은 아득하다. ‘곡비’의 시인은 서정시인이기를 갈망하든, 어떻든, 내면세계에는 시인적 서정성이 짙게 깃들여 있음이 엿보인다. 이런 유의 시일수록 허망하게 읽히거나 관념적인 언어의 유희, 또는 고급 시의 본질에서 멀어지기 일쑤다. 이 시에서 눈물을 본다.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눈물이...그러나 눈물은 없다. 시인은 울지 않는다. 다만 영혼으로 울고 있을 뿐.

 

이 시는 “비어있음”의 시심(詩心)이 담긴 아련한 풍경이다.

시집 ‘노숙’이 펴낸 66편의 시를 탐독하면서, 시인이 “사과의 슬픔”이나 “꽃 가루주의보 시리즈” 등에서처럼 풍경에 대해 말 할 때 풍경은 선명했고, 내면면면을 노래할 때 역시 풍경은 환히 떠오른다. 둘 사이에 연결고리는 없지만 읽고 난 한 참 뒤, 풍경들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게 권천학 시집 ‘노숙’의 시편들이었다. 칼럼니스트


발행일 : 2014.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