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게시판

시집노숙 독후감-나운택님의 곡비의 노래

천마리학 2014. 10. 3. 22:18

 

 

 

 

 


곡비의 노래

-권천학 시집 [노숙(露宿][을 읽고

 

나운택(칼럼니스트)

 

 

한 때 같은 매체에 칼럼을 쓴 인연으로 알게 된 권천학 시인이 어느 가을날 불쑥 시집을 보내왔다. 학창시절이후 시집을 손에 잡아본 기억이 별로 없는 나는 얼떨결에 받아든 시집을 조심스레 펼치고 예전 한 때 소월, 청마, 미당, 박목월같은 시인들의 시들에 감동하여 읽고 또 읽어 외우려고 애쓰던 그 시절의 감성으로 잠시 돌아가 약간은 설레는 마음으로 시들을 하나씩 읽어 나갔다.

 

평소 다른 글들은 탐독하지만 시라면 막연히 너무 어렵고 멀게만 느껴졌었다. 특히 요즘 나오는 대부분의 소위 현대시들은 나에겐 그저 언어의 유희이거나 관념의 장난정도로만 비쳐져 더욱 그랬다. 그런데, 권천학 시인의 시들을 한 수, 한 수 차례로 읽어 나가다 보니 신기하게도 그 동안 어렵게만 느껴졌던 시들 속에서 어렴풋이 뭔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거기엔 놀랍게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문득 만나게 되는 풍경과 생각과 고민과 아픔과 분노가 단아한 모습으로 정돈되어 있었다.

 

 

 

……상략……

 

박자 정확한 숨소리

냉동된 언어가 덜그럭거리는 모눈종이위에

말갛게 떠 있는

증류수같은 시보다

엇박자로 한숨도 토해내고

다소 비틀거리더라도 사람냄새가 나는

그래서 눈물이 배어나오는

그런 시가 맛이 난다

땀내 배어 있는 삶의 행간에서

비누거품을 일으키는 시

시론보다 인생론에 맞는

그런 시가 나는 좋다

 

-‘사람냄새 나는 시가 좋다에서

 

 

 

아하! 그랬구나. 그제서야 시인은 곡비(哭婢). 곡비여야 한다.”라고 했던 시인의 머릿말이 새삼 떠올랐다. 그랬다. 시인은 인적 없는 깊은 산중에 우뚝 솟은 어느 봉우리에 걸쳐있는 뭉개구름 옆을 고고하게 날아가는 한 마리 학이기를 거부하고, '천 마리 학'의 날개 짓으로 온 누리를 감싸 안아 이 땅에서 함께 숨을 나눠 쉬며 살아가는 모든이들을 위해 대신 울어주는 곡비가 되고자 했다. 그래서, 시인은 세상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가는 일상사들을 세상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다정한 언어로 정제하여 때로는 나직히, 때로는 처절하게, 때로는 감칠맛 나게 저들을 대신하여 그렇게 곡()하고 있었다.

 

 

……상략……

 

손가락을 가시에 찔리는 일은 사소하다

남의 염통이 곪는 것 보다 가시에 찔린 내 손가락은 사소하지 않다

그보다 더 사소하지 않은 것은

가시에서 꽃을 피워낸다는 것을 깨닫는 일

고단함을 깨닫는 일이 더 고단하고

외로움을 깨닫는 일이

외로움보다 더 외롭다는 것을 깨닫는 일만큼이나

사소하지 않다

그리하여 가시밭길을 살면서

성공의 꽃을 피워내는 일은 더욱 사소하지가 않다

 

……하략……

 

-‘사소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중에서.

 

무심히 지나가는 나그네의 눈에는 마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그저 통속하고 사소한 일일 뿐이다. 심지어 사랑하는 이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이 세상에 남은 자들의 애절한 통곡소리마저도 그저 무덤덤하게 다가오는 일상의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따뜻한 애정을 담아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에는 그저 사소하고, 하찮은 일은 없는 듯 하다. ‘한 시대를 함께 건너는 사람들의 충실한 곡비가 되고자 한 시인의 눈에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보통 사람들에겐 사소해 보이는 것들 조 차도 놀랍고, 신기하고, 고맙고, 안타깝고,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모양이다. 시인은 가시 찔린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이 아파 소리 내어 대신 울고 있었다.

 

 

이름이 똥쉬파리라고 더럽게 생각하지 마라

깨끗함의 착각이 더러움이고

미추 가리는 분별심이 잘 난 체일 뿐,

목숨은 다 같고. 낳고 죽는 운명도 다 같다

더러움을 만드는 놈이 더 더러운 법이니

이름만으로 단정하지 마라

 

……하략……

 

-‘똥쉬파리중에서.

 

누구에게나 멸시받고 하찮아 보이는 똥쉬파리들의 억울한 하소연마저도 시인의 귀엔 크게 들리나 보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서도 기꺼이 곡비가 되어 이렇게 준엄하게 곡하고 있다.

 

 

폭설주의보가 내리면

도무지 걸려올 리 없는 전화가 기다려진다

결코 당도하지 못 하리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간첩질이라도 하듯 이메일을 열어본다

 

……중략……

 

그러나 지금

눈이 내리니까, 비가 오니까, 꽃이 피었으니까, 바람 불어 좋으니까

한 잔 하자며 뭉치곤 하던 전화도

마음 부비는 일도 뜸해져 가는 요즈음에랴

아직도 덜 삭은 그리움이 있었던가

안스러워라

아직도 내 몸안에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다니

참 하염없어라

 

……중략……

 

아직도 발령중인 폭설주의보

도무지 걸려올 리 없는 전화벨 소리를 기다리는

어쩔 수 없는 내가 가엾어서

저 밑바닥에서 애닯아 두근거리는 소리를

아직도 멈추지 못 하는 내가 어이없어서

내가 나 때문에

식어빠진 커피를 독약으로 마신다

 

-‘독약을 마신다중에서.

 

 

폭풍같이 몰아치던 젊은 날의 뜨거운 열정과 폭설처럼 퍼붓던 젊음의 욕망들이 가슴속 저 깊은 곳으로 서서히 숨어들어 이제 농익은 숙성주의 은은한 향기를 완성하기 위해 부글거리는 마지막 발효의 몸부림을 치는 나이에 그 몸부림을 조용히 다독이며 속으로 삭히려는 시인의 독백을 읽다가 나는 문득 백석(白石)의 시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을 떠올렸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세인 쓸쓸한 거리끝에 헤매이었다./ …… 나는 이런 저녁에는 더욱 화로를 다가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아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어두워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믈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김윤식과 김현이 <한국문학사>에서 한국시가 낳은 가장 아름다운 시중의 하나라고 극찬한 이 시는 갑작스레 가난하고 불운해진 백석의 맑고 맑아서 금속이 된 듯한 체념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마른 가지 꽃눈 틔우느라

마른버짐 핀 봄 가시내

봄마실 갔다가

부르튼 입술로

치맛단에 꽃물 잔뜩 묻혀와

온 동네 다 물들이는 연분홍 소문

 

젖몽오리

꽃몽오리

살몽오리

참 가시내도……

 

-‘꽃가루 주의보 5소문전문.

 

 

징허다 꽃!

봄만 되면 벌거벗는 저것들!

안달 나 아랫도리 다 드러내 놓고

부끄러움도 없이 지랄들이야

그래 봤자

가는 봄을 잡지도 못 할 거면서

아무렴

기우는 햇볕에

시 한 편 구워내느라

노을 앞에서 잉걸불 지피는 내 속만 할까

 

-‘꽃가루주의보 6봄꽃전문.

 

노곤하게 감겨오는 봄기운은 시인도 어쩌지 못해 아련하게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잡힐 듯 말 듯한 생명충동, 원초적 사랑의 본능은 시인을 통해 이렇게 아름답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약간의 질투를 은근히 감추고.

 

-‘유명한 무명시인이 되겠다고 작정한 이후 스스로 노숙(露宿)을 시작했다’-는 시인. 그는 태어나고 자란 고국땅을 떠나 태평양 건너 낯선 땅에서 노숙을 하다가 이제 또 다시 철새처럼 훌쩍 대륙을 가로질러 서부로 날아갔다. 새로 옮겨 앉은 노숙지에서 더 많은 아픈 이들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힘찬 날개짓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천 마리 학의 포근한 날개짓이 온 세상을 덮는 날 이 세상은 좀 더 살만한 곳이 되어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