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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모태(母胎)인 고향 김제 그리고 백제(百濟)

천마리학 2014. 5. 31. 06:32

 제 207호 2012년 8월 10일(금)
기획 - 고향김제..... 5
내 삶과 문학의 모태(母胎)인 고향 김제 그리고 백제(百濟)

 

 

 

권 숙 자, 김제, 金堤, Kimje, Gimje, 백제 … 고향을
생각할 때마다 그리고 나의 삶과, 삶을 지탱해 온 문학을
생각할 때마다 써보는 단어들이다. 나는 지금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여전히 문학 활동을 하며 살고 있다. 이곳의
언론매체들을 통하여 시도 발표하고 고정 칼럼도 쓰고…
한국에서부터‘권천학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지만
나의 김제시절 이름은‘권숙자’이다.
나 어렸을 적에 김제 어딘가에서 사금(砂金)이 나온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김제’라고 했다. 자라면서 나 나름대로는 호남평야의 중심에 자리잡아‘김제’가
되었다고생각했다.‘ 김제’는‘금빛언덕’이고, 금빛은벼가익은가을녘, 누렇게
익은 황금들판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정확한지 그 유래의 역사에 대해선
정확히 모르지만 어떻든 간에,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호남평야의 중심인
김제는 백제, 일제(日帝)…등 역사적인 의미와 함께 나도 모르게 내 삶 깊숙이
스며 내가 평생을 골몰해 온 문학의 모태가 되어주고 있다. 김제군 공덕면 황산리.
나의어릴적삶이있는황산은솜리‘( 이리’라는이름을거쳐지금의‘익산시’가
되었다)와 김제를 잇는 중간지점이다. 신작로가 휘어지는 지점‘성머리’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고, 그 곁에 우람한 정자나무 한 그루, 그 안쪽으로 지서(지금의
파출소)가 있었다. 그 나무 그늘 아래 늘 모시옷 정갈하게 입고 살랑살랑 부채질
하며 앉아계시던 외할아버지의 단아한 모습이 지금도 선연하다. 버스가 지나갈
때마다 뿌옇게 일던 흙먼지, 버스길을 사이로 마주한 학교와 양조장, 학교 운동장
으로부터 이어진 들녘, 그 들녘 너머로 외황산과 중촌, 중촌에서 들녘을 건너
학교에 다니던 내 친구들, 우천이, 우체, 재숙이, 귀자, 인기, 금수, 용애...
동리마을의 가운데쯤에 있던 공동우물 큰시암, 그 안쪽으로 내가 살던 조그만
초가집과 이웃들, 청자언니, 갑순이, 금님이, 순이, 을순이, 부월이, 이순이….
이순이네 마당으로 이울던 을순이네 감나무. 늦은 봄쯤? 바람 부는 날이면 우수수
떨어지는 감꽃잎과 땡감을 먼저 주우려고 달려가던 일, 여름이면 이순이네 집
뒷길 둥구나무에서 둥구 잡던 일, 동네 뒤곁의 파란 보리밭 물결, 그 보리밭에서
문둥이가 아이들 간을 빼먹는다고 해서 뒷등 넘기를 무서워했던 일.... 김제 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가면 재빼기, 기씨(氏)네 과수원과 담배 밭들. 봄가을 소풍 때마다
걸어갔던 흥복사. 춘자와 함께 진달래 꺾다가 치마에 온통 꽃물 들여와 혼나던
일… 학교 운동장 너머의 들녘. 그 들녘을 온통 보랏빛으로 물들이던 자운영꽃밭
이며, 홍수가 진 어느 해 방과 후, 중촌에 사는 친구들을 방과후 데려다준다고
함께 물바다가 된 들녘을 건너다가 덩어리로 얽혀있던 뱀 떼에 혼쭐이 나서 물속
에 나딩굴며 혼비백산 했던 일, 독새기 풀씨 걷던 일…,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그 모든 것들이 지금의 나에겐 정신적 보배이며 문학의 물줄기이다. 그 추억의
물줄기의 끝이 백제로 이어져 내 작품의 곳곳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다. 백제를
테마로 한 시집을 낼 때쯤 김제 혹은 백제정신이 나의 속살에 스며있음을 깨달
았다. 나는 지금 먼 타국에 있으면서도 고향 김제의 금광맥을 캐내고 있다.
지금쯤 어떻게 변했을까? 그때 그 친구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철들어가고
있을까? 오늘도 써본다 권숙자의 나라에 새겨진 이름들. 황산, 공덕, 김제, 金堤,
Kimje, Gimje, 백제…그립다 김제! 고맙다 김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