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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마실-(권천학 시인)대표 자선작 10편
문학마실93호에서 2013.03.11 (10:47:15)
조회 수 : 1366
동물의 피 ─나는 아직 사과 씨 속에 있다
權 千 鶴
모두들 충혈 되어 있었다
야적장의 얼어붙은 어둠 속에서도 동물성의 피를 가진 사람들과 광물성의 쇠붙이들이 날뛰었다
이 세상은 그들먹하게 떠들어대는 한 판 술자리 같고
동물성의 피와 광물성의 잡쇠들이 서로 얽혀서 있지도 않은 우라늄 광맥을 찾아다니다가 죽어나가는 젊음을 애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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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의 나비들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17
權 千 鶴
눈만 감으면 출렁거린다 김제평야의 드넓은 나락 밭 위에서 부황 뜬 시절을 지낸 유년을 살찌우던 가을이 출렁거리고,
초등학교 운동장보다 더 넓은 들판으로 나가 독새기 풀씨 받으며 타넘던 논두렁 잡풀도 그렇게 명(命)을 이어주던 한때의 시절이 출렁거리고,
양조장집 식구(食口)통에 줄 선 동네 사람들 술지게미의 취기로 허기를 달래던 시절이 비틀비틀 출렁거리고,
동리마을 성머리 아름드리 정자나무 아래 정갈한 모시옷 차림으로나앉아 온종일 말없이 먼 하늘만 바라보시던 고성할배의 단아한 모습이 먼 바다 빛으로 출렁거리고,
김제(金堤) 읍내로 가는 재빼기 너머까지 춘자(春子) 따라갔던 어느 해 봄, 아지랑이 덮씌워진 산을 헤매다 진달래 한 아름 안고 벌겋게 꽃물이 들어 돌아온 어스름 저녁, 회초리 든 어머니의 눈빛마저 물들이던 꽃빛깔이 출렁출렁
노랑나비 봄꿈 꾸는 공자리 밭에 들어가 꽃모갱이 꺾다 놓쳐버린 풋내 나는 꿈들이 부화한 황산(黃山)의 나비들, 지금도 가끔씩 나풀나풀 꿈에 나타나 노랗게 노랗게 빈혈 일으키며 사는 내 중년을 출렁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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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과수원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57
權 千 鶴
중년이 되어서야 알았다
부용(芙蓉)집 담 넘어 반월리(半月里)로 굽어지는 괴테네 과수원 탱자 울타리에 밤새 내려와 집을 짓고 등을 밝히던 별들은 날이 밝아도 떠날 줄 모르더니, 수밀도(水蜜桃) 익어가던 복숭아나무 아래 앉아서 떠나버린 통학열차가 유강리 쪽 모퉁이로 돌아설 때 꼬리 흔들어 내던 기적(汽笛) 소리 들으며 두근두근, 늘 안부가 궁금한 괴테를 꿈꾸며 소설을 구상하던 소녀시절을 소설처럼 끌어안고 있는 덧없는 세월의 가시, 하얗게 하얗게 덮어주는 탱자꽃 구름처럼 일어나는 이 흔들림이, 가시에 찔린 상처에 접시꽃잎 말려 붙이던 추억이, 지병(持病)이 된 두통이 모두 외로움이라는 것을
찻잔에 동동 떠오르는 쑥부쟁이 꽃잎차를 마시는 중년의 아침이 되어서야 알았다
괴테의 과수원엔 지금도 눈이 내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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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재소 옆을 지나며 * 權 千 鶴
속살의 아픔 한 가운데를 지나가는 톱날 소리를 들으며 한 생애를 뭉턱뭉턱 잘라먹는 톱날 소리를 들으며 나이테 속으로 얇게 얇게 저미는 톱날 소리를 들으며 무너진 몸뚱이의 옹이를 파내는 톱날 소리를 들으며 죽지 못한 가지들을 쳐내는 톱날 소리를 들으며
바로 서게 하는 기둥으로 바로 눕게 하는 널빤지로
톱날에도 잘리지 않는 속살이 되어 톱날에도 잘리지 않는 생애가 되어 톱날에도 잘리지 않는 분노가 되어 톱날에도 잘리지 않는 옹이가 되어 톱날에도 잘리지 않는 산보다 높은 희망이 되어
한 그루 소나무로 한 자루 톱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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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무명시인 * 權 千 鶴
시인 초년병 시절, 한 선배 시인에게 '유명한 무명시인'이 되겠다고 말했다 '니가 뭘 몰라' 묘하게 웃던 선배는 그 후 세상 속으로 들어가 이름이 주렁주렁해졌다
그 말이 씨가 되어, 나는 지금도 '중견'이라는 수식어가 어색하게 붙여지는 은둔과 칩거의 무명시인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무명으로 남는 일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안다 ‘무명’은 이루었지만 아직 유명을 이루지는 못했다
내가 한 말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이제 유명해질 일만 남았는데 어떻게 해야 유명해지는지를 몰라 나는 여전히 헤매고 있다, 하지만
주렁주렁한 이름 대신 시가 주렁주렁해 지는 일 더 어려운 그 일에 매달려 여전히 고집 부리듯, 변명하듯 세상의 변두리에서 외롭게 살며
아직도 덜 뜬 시의 눈을 뜨게 하려고 아직도 덜 뜬 나의 눈을 닦아내곤 한다 |
탄천(炭川) -한강5
權 千 鶴
소문난 재주와 꾀로 염라사자를 속이고 속여 삼 천 갑자를 살고도 부족한 명줄 더 잇고 싶어서 중국을 떠나 조선으로 도망쳐온 동방삭이, 번다한 서울을 피해 경기도 땅 용인 근처 어디쯤에서 숨어살고 있었겄다
뒤쫓아 온 염라사자, 사람 많이 나다니는 길목들을 지키며 염탐을 하다 보니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어느 화상이 동방삭이인지 알 길이 없는지라, 고심 고심 궁리 끝에 동방삭이 놈 걸어 넘어뜨린 꾀 하나 떠올라 무릎을 쳤겄다
그 날부터 서울사람 용인사람 다 지나다니는 길목 냇가에 앉아 흐르는 물에 하릴없이 숯을 빨고 있었으니 오가는 사람마다 하 이상해서 이유를 물을라치면 ‘숯을 하얗게 하려고 빨고 있는 중이오’ 하고 천연덕스럽게 던지는 대답에 아리송해지는 사람들, 그 때 마다 고개만 갸웃둥
그러던 어느 날, 제법 똘똘해 뵈는 길손 하나 지나다가 그 광경을 보았는지라 그 역시 염라사자 하는 짓이 야릇하기 짝이 없어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겄다, 가던 발길 멈추고 까닭을 물어본즉, 염라사자 능청스레 똑같은 대답을 했겄다 “숯을 희게 하려고 빨고 있는 중이니 귀하께선 괘념치 마시고 가던 길이나 가시지오” 그 대답을 듣고 기가 막힌 길손 왈 ‘참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군’ 혼잣소리처럼 하고도 참을 수 없어 “내가 삼 천 갑자를 살았지만 숯을 희게 하려고 냇물에 빠는 어리석은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오” 거들먹거리며 웃음을 터트리는 순간 덜미 잡힌 동방삭이 그제야 염라사자에게 잡혀 저승으로 끌려갔으니,
재주와 꾀를 재주와 꾀로 덮어 가리며 헛된 망상의 탑을 쌓느라 혈안이 된 서울바닥 어디에선가 지금도 누군가 열심히 숯을 빨고 있을 것이고, 쫒고 쫒기는 놀음판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또 누군가, 개미지옥 즐비한 함정의 도시에서 열심히 제 꾀에 넘어가 무너지고 있으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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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놀부 타령 -놀부의 넋두리
權 千 鶴
얼쑤, 세상 사람인심 좀 보소! 속절없는 여름비에 옷 적실 내 아니지만 이런 답답한 경우가 있나? 배운 것 없어 증권투자 넘보지 않고 봇장 없어 땅 투기 꿈도 꾸지 않았는데 놀부 심뽀가 어떻다고? 얼쑤, 잘 돌아간다!
사사건건 속 보이는 조작놀음 숫자놀음에 놀아난 바 없고, 그 흔한 복권이나 딱지 한 장 손에 쥔일 없는데도 까닭 없는 뜬소문으로 밀어붙이고 잔가지에 이는 바람 홍수에 물 불어나듯 하는 세상이고 보니 이만한 처지면 노류장화(路柳墻花)에 화초첩(花草(妾) 두엇 쯤 거느릴 법함을 자타가 인정하겠지만, 내 본디 천성이 맑아 누대(累代)에 걸친 가풍을 더럽히지 않고자 아예 두문불출, 화초장 등에 지고 입심 굵은 마누라와 심심파적 소일하는 터
일찌거니, 내 분수 알아채고 제법 한다하는 사람들이 써먹는 말로 마음 비우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내 이름자에 타고 난 운수대로 살면서 사주팔자에 실리지 않은 자식 탐내지 않고 친척 인척 줄줄이 늘어서는 꼬락서니 보기 싫어 하나 있는 혈육마저 정갈하게 다스리는데 어라, 세상 사람들로서 제 집 기둥뿌리 썩는 줄 모르고 남의 말 하기 쉬워 함부로 내 말하니 이 아니 답답한가
사람 먹는 음식에 독(毒) 넣어 놀부밥 만들고, 아무 데나 시커먼 매연과 고약한 냄새 뿜어내고, 안 보이는 곳에 스을쩍 폐수(廢水)와 정액(精液)을 빼내면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치들이 어디 한둘인가? 그러고도 누가 감히 놀부 심뽀 들먹여?
나 이래 봬도 이름 빙자하여 국록(國祿) 빼돌린 일없고, 권력 휘둘러 거둬들인 거 없고, 금박(金箔) 명함으로 겁주고 기죽인 일없고, 골프 폼 잰 일없고, 고스톱 판에는 끼어 든 일없는 보통양반으로, 바라건대, 더도 덜도 말고 물려받은 유산 온전히 간수하려는 것뿐, 굳은 땅에 물괴는 이치 왜들 올라?
내게 흠이 있다면 제비다리 분지른 정도인데 그야 털어 먼지 적당히 나야 제격인 요즘 세상에 너무나 인간적인 모양새 아닌가베, 그만한 배알도 없으면 어찌 놀부로서 체면 유지가 될꼬, 혀서 무책임하게 퍼지르고, 힘 안 들이고 호박이 넝쿨 째 굴러오길 노려 남의 눈치 살피며 손바닥 비벼 만두 잘 빚어내고, 눈물 콧물 짜내며 굽신대는 기회주의자 흥부놈 처세에 비하면 백 번 낫지
암, 낫고말고 형만 한 아우 없다고 옛말 그른 것 하나도 없데, 얼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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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리 춘향가 -춘향 3
權 千 鶴
소문이란 본시 믿을 게 못 되는 것 어둡고 때 낀 과거를 지울 수 만 있다면 무슨 짓인들 못 할까 해서, 각색하여 퍼트린 자전적(自傳的)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될 줄이야. 요새 같으면 저작권 수입만으로도 짭짤할 텐데…… 하여튼,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꼬리에 꼬리에 방울을 달고……
내 친구 애랑이 고 기집애 장난기가 좀 심해서 탈이긴 하지만 그래도 애교 있어 그 바닥에서 주가 올리다가 얼굴값 하느라고 <베비장전> 주연자리 따내어 영화판에 나서더니 요샌 국제영화제 진출을 노린다하고
천박하고 약아빠져 하는 일마다 눈총 받는 일만 골라하던 밉살댕이 추월이 고년은 눈총? 흥! 콧방귀로 밀어붙이고 화냥기 밑천 삼아 희번득 요사부리며 열쇠고리 쩔렁이더니 제 버릇 개 줄 리 없다고 요샛날 영동으로 옮겨 앉아서도 생긴 대로 놀면서 그저 수표에 박힌 동그라미 숫자만 꿰어내느라 눈알이 시뻘겋다니 쯧쯧, 혹시 히로뽕은 안 쓰는지 몰라 아무리 그렇고 그런 판이라 해도 양심이라는 게 있어야 하거늘 이그! 정나미 떨어져
머리에 든 게 많아 제법 고상하게 놀던 황진이 가슴 또한 유난히 깊어 보기 드문 멋쟁이 지성인이 됐지 걘, 가야금 잘 타던 솜씨로 사내 어우러 타는 솜씨 또한 뛰어나나 송곳 같은 정에 약한 것이 흠이 되어 못 견뎌 지는 마음 원고지 칸칸마다 꼭꼭 쟁이더니 나와는 노는 판이 달라 얄밉긴 하지만 지금도 이불 속으로 시냇물 소리 끌어들여 밤 허리 적시고 가야금 줄마다 문장 풀어 얽어매고……. 가끔씩 시 낭송에도 불려 다닌다지 아마
또 있지 빠트려선 안 될 내 친구 요절해서 가슴 아프게 한 논개년말야 하기사, 가끔 보면 일찍 죽어 빛나는 사람들도 더러 있더라만 사주마다 개가 끼어 어려서부터 개라 불리더니 끝내는 웬수같은 왜장 새끼 물어뜯고야 말았으니 그러고도 남을 일이지
내 친구 중에 제일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그깟 죽고 사는 게 어디 대순가 요샛날 살아서도 죽은 목숨으로 뵈는 개뼉다귀 같은 사람들에 비하면 죽어서도 살아있는 논개가 개 같은 세상에 사람 같은 사람이지
남 얘기 해 놓고 내 얘기 안 할 수 없어 털어놓는 얘기지만 나 춘향이는 내세울 게 하나 없는 얼치기 반쪽 양반으로 태어날 때부터 한이더니 불우한 어린 시절 맺힌 설움만으로도 한 짐인데 출신성분 독하게 따지는 세상에서 내림기생이라니 죽고만 싶은 심정이라 어둡고 때 낀 세월을 지울 수 만 있다면 조상 묘자린들 못 팔아먹을 까
남 설움에 내 설움 실어 우는 사람 마음 다 한 가지로 입에서 입으로 가슴에서 가슴으로…… 한 마디로 내 출세는 덩달아 춤추는 세상 덕이 반이고 나머지 반의반은 터트려 준 매스컴 덕, 터졌다 하면 와 몰리는 무리들 곧잘 따라 웃고 따라 우는 순진한 사람들 애간장 노려 도화선에 불붙이듯 살짝 건드려 준 것뿐인데 꼬리에 꼬리에 거품을 물고, 꼬리에 꼬리에 바퀴를 달고…… 시끌벅적한 세상 정치 문제 노사문제 게다가 교원노조까지 들어 가뜩이나 지친 사람들에게 달짝지근한 연애얘기에 눈물 살짝 발랐지 뭐
친정식구 같은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긴데 본디 찬스 포착에 강하고 연극에도 소질 있던 나 춘향이 아닌가 속으로 칼 갈며 때만 노리던 터에 운 좋게도 꽃다운 나이 때맞추어 바람기 있는 미스터 리를 만났으니 그 또한 왔다였지, 솔직히 말해서 출세 싫은 사람 있을까, 속보이는 소리 그만들 하라고 혀!
적당히 주무르고 삶아서 신분조장부터 받아놓고 그네 줄 밀고 당기듯 사내 속 녹여내는 연출에 열정을 다 쏟아 열녀라는 덧 이름까지 이력서에 새겨 넣었으니 그게 다 속 두고 한 짓이라, 은근 슬쩍 미스터 리 뒷대 눌러가며 받아둔 문서 덕으로 일테면 난 기상출신 VIP가 된 셈이지, 이만하면 나도 이 바닥에서 썩긴 아까운 인물이라 요즘 것들은 몰라 눈에 뵈는 것밖에
젊은 날의 모험적인 활약으로 지금은 제법 그럴 듯한 네임벨류 지니고 살면서 한 자리 하고 있는 내 남편 이 서방에 걸 맞추느라 여가선용 삼아 사회활동도 적당히 하는데 그 중에 지난날의 행적이 적극적인 여성상으로 평가받아 여권협회에도 고문 격으로 앉아서 간간이 신문에 얼굴도 내밀고 남편의 내조도 반들반들 해내는 데 끝이 없는 게 사람의 욕심이라 살기 이만 허니 아무도 모르는 야무진 꿈 또 하나 갖게 되었으나 아직은 말하기 좀 곤란해
사람팔자 시간문제라고 그깟 베스트셀러 작가로 머물 순 없고 내 친정 식구 같은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인데 말야 저어……. 거시기……. 있잖아……, 하여튼말야 내 실력쯤이면 누구처럼 무지막지하게 휘둘러서 감당 못 할 만큼 저질러놓지도 않고 촉새 마냥 낄 데 안 낄 데 마구 끼어 드러나게 미움을 사지도 않을 것이며 적당히 품위 유지해 가며 아니 기가 막히게 날 한번 해 볼 텐데, 끝내 주게 잘 해서 요게 진짜 <춘향전> 주인공이다 하고 꽝 터트릴 텐데……
춘란(春蘭) 향기 한번 기차게 뿜어볼 텐데……
오늘 밤 퇴근해 온 남편 또 한 번 주물러 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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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이의 입덧 -춘향 2
權 千 鶴
이게 꿈은 아니겠지? 향단아 간밤에 불불새 한 마리 품안으로 날아들어 둥지를 틀더니만 그 고운 깃 속에 알을 품더구나
산그늘에 젖는 언덕배기 휜 길 소나무 숲에 지는 석양을 걷어내며 히끗히끗 두루마기 자락 펄럭이더라고?! 정녕 아카시아 꽃은 아니겠지, 향단아 쑥대머리 꺾어 젖히며 풀어놓는 동편제 한 가닥 바람결에 들리더란 그 말
그만 두자꾸나 황사바람 저 켠에 더디 오는 봄 진저리쳐 지는 꽃 피고 있을 테니 그만 두자꾸나 향단아 꽃 진 자리마다 이글거리는 입덧 맺힌 열매 영글리는 여름 오고야 말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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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오시려나 -춘향 1
權 千 鶴
그대 오시려나 젖은 내 눈물자국 위로 그리움 가득 품어 안고 휘어지는 요천수 푸른 물결을 건너 그대 오시려나
오색실 엮어 매어 놓은 그네 빈 바람에도 흔들리는 내 열 아홉의 뜨락으로 해질녘 땅거미 등을 타고 그대 오시려나
그리움은 끝도 없어 밤마다 키우는 외로움에 움이 돋고 달빛 머무는 들창 너머로 숙고사 치맛자락 쓸리는 그리움은 끝도 없어
걷어붙인 옷소매 다홍 끝동에 물색 고운 비단 수 원앙 옷고름 뜯겨진 자리에 은장도 칼날 번뜩이는 새벽을 지나 햇보리 이랑을 넘어 그대 오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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