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칼럼-기본이 가장 좋은 창이며 방패다

천마리학 2009. 9. 13. 13:03

 

 

 

 

 

기본이 가장 좋은 창이며 방패다

 

권 천 학(시인)

 

 

작년 어느 날, 유니온 역을 지나 세인트 로렌스 마켓으로 이어지는 길을 걷다가 ‘허밍센터’의 이름이 ‘소니센터’로 바뀐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인 부자가 사들인 모양이구나. 물론 그 부자는 소니일 것이고… 슬그머니 배가 아파왔다. 사촌도 아닌데 배가 아프다. 소니이기 때문이고, 소니는 곧 일본이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는 표현하진 않지만, 그리고 나만 그런 건 아니겠지만, 일본 하면 괜히 떫고, 괜히 얄미운 구석이 있다. 객관적이어야 함이 상식이지만 그 상식 이전에 더 깊은 밑바닥으로 가라앉아있는 역사적 앙금은 어쩔 수 없다. 일본은 우리에게 원수였으며, 라이벌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와 동세대 한국인들이 가지는 기본적인 대일감정일 것이다.

 

 

 

 

달래꽃

 

 

 

 

아직도 원수의 관계로만 있다면 얼마나 비참할까? 우리는 열심히 노력해서 라이벌의 단계까지 이르렀다. 여러 분야에서 일본을 따라잡고 앞서거나 혹은 대등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갈 길이 멀다. 우선 쉽게 꼽을 수 있는 것이 아이티 관련이나 자동차 등 산업기술의 성공이다. 삼성이나 엘지의 디비디나 티브이 제품들이 줄지어 서서 외국인들의 시선을 끄는 외국공항의 로비에서면 가슴이 뭉클하고 통쾌하다. 외국의 거리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의 바퀴들이 굴러가는 것을 보면 뿌듯해진다. 나의 가족이나 친척들 중에는 그 회사에 다니는 직원이 없는데도 그 기업들이 내 가족 같다. 몇 해 전 융프라우에 올라갔을 때 ‘유럽의 톱’이라고 하는 그 만년설의 봉우리에서 갑자기 뜨거운 우리나라의 컵라면 생각이 나는 것은 또 왠일인가? 혹시나 하고 가게를 다 뒤져봤지만 우리나라 컵라면은 없었다. 다른 나라 컵라면에 쥐약을 섞었을 리 없지만 먹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은근히 화가 났다. 우리나라 컵라면은 왜 아직도 이 융프라우에 올라오지 못한 거야 하고. 그런데,

최근의 경제뉴스에 의하면 미국 발 경제위기가 삼년 째 계속되고 있는 요즘, 소니와 토요타 등 일본 굴지의 세계적 기업들이 엄청난 적자를 내며 도산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이다. 소니는 우리의 삼성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토요타는 창업 이래 가장 큰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고 한다. 원인은 세계적인 불황과 맞물려, 그들이 기본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시루뽄나물

 

 

 

 

기본이 뭘까? 바로 고객 제 1주의이다. 전 세계 기업의 벤치마킹 대상이었던 회사, 최정상의 브랜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이름이, 그들이 처음에 내세웠던 고객중심주의라고 하는 기본을 무시하면서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80년대의 일본 산업은 우리가 넘을 수 없는 산이었다. 일본의 제품이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의 물류시장을 석권했다. 김포공항에 줄줄이 코끼리 표 전기밥솥을 들고 들어오는 아줌마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고, 시세이도 화장품이 판을 치고, 한국 사람들의 손에 소니제품들을 들고 다녔다. 토요타, 싱가미싱, 코닥… 많다. 우리 정부에서는 국산품애용을 부르짖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뮤직가든의 할미꽃

 

 

 

 

나에게 80년 그 시절, 고객중심주의의 표본이 되는 추억이 있다. 소니 휴대용 래디오를 상사로부터 선물 받았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서 튜너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떨어트렸던가 싶다. 어쩌다 갖게 된 일본제품이라서 몹시 아까웠지만 차마 상사에겐 그 말을 못하고 끙끙대다가 소니회사로 편지를 보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깟 래디오 한 개쯤을 가지고 궁색을 떠는 한국인이란 인상을 심어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됐다. 20일쯤 지나서였다. 쏘니사로부터 일본말과 한국말을 병행해서 쓴 소포한 개가 왔다.

<죄송합니다. 불편을 드려서. 그리고 우리의 소니제품을 사용해주신 것과 잘못된 점을 지적하여주신 것에 대하여 저희들의 전 직원의 이름으로 사죄와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 더 좋은 제품을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사죄의 뜻으로 새로운 제품을 보내드립니다. 그리고 만일을 대비해서 여분의 튜너도 함께 보냅니다. 고장이 난 제품은 착불로 보내주십시오.>

 

 

 

 

 

뮤직가든의 하이야신스

 

 

 

 

 

한 사람의 고객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 성의, 책임감이 일본이라는 국적을 뒤로 하고, 인간적인 감동으로 깊이 박혔다. 그 후로 승승장구해가는 일본의 기업을 볼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그들을 그때부터 이미 기본의 중요성을 간파했었고, 그리하여 우뚝 섰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사이 소니가 토요타가 기본을 잊어버렸던 모양이다. 기본은 그들을 세웠고, 그들을 무너뜨렸다. 만감이 교차한다. 결코 타산지석으로만 보아 넘길 일만은 아니다.

모든 일에는 기본이 있다. 기본은 가장 좋은 창이며 방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