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신] 도보 순례는 자발적 유배 (5월4일~5일)
[602호] 2001년 05월 10일 (목) 이문재 moon@e-sisa.co.kr
도보 순례는 자발적 망명이다.
도시적 삶에 빼앗긴 자기 자신을 되찾는 적극적 행위이다.
민족의 역사와 뭇생명이 처한 현실을 발견하고, 마침내 '우주인 나'를 만나는 아프고도 기쁜 '몸'의 시간이다.
©시사저널 안희태
길이 아니어도 좋다 : 경호강 물이 불어나 징검다리가 떠내려갔다. 대원들이 강을 건너며 '길'을 만들고 있다.
날이 흐린 것일까, 안개일까. 낯선 산골의 신새벽. 텐트 밖으로 나오자 바로 선뜩한 '자연'이다. 침낭 속에서 몇 번이나 뒤척였다. 오랜만에 지구 표면에 바싹 달라붙어 잠을 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밤새 꿈의 갈피로 소쩍새 울음과 엄천강 물소리가 끼어들었던 것 같다.꿈들은 단 하나의 문장도 이루지 못한다. 괜찮다. 지리산의 새벽 속에 있는 것이다.
순례 단장 수경 스님은 벌써 일어나, 교정 곳곳에 버려진 꽁초와 휴지 따위를 줍고 있다. 지난 해 11월, 낙동강 1300리 도보 순례를 마쳤을 때 내걸었던 현수막이 그대로 걸려 있다. '지리산을 푸르게,낙동강을 맑게,함양을 아름답게/낙동강 도보순례단 환영식 및 보고대회/2000년
11월20일 지리산댐 백지화 함양군 대책위원회'
스님은 지난해 10월 말부터 27일 동안, 강원도 태백에서 부산에 이르는 낙동강 수계 도보 순례를 기획하고, 현장에서 지휘했다. 실상사에서 주지 도법 스님과, 백두대간을 종주한 연관 스님(화엄학림 학장)과 함께 정진하며, 생명 논리에 바탕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고 있다.(인터뷰 기사 참조)
©시사저널 안희태
음식찌거기? : 사찰식 식사법(발우공양)은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해법일 수 있다. 먹을만큼 먹기때문에 일체의 음식이 남지 않고 합성세재도 쓰지 않는다.
아침 메뉴는 떡국과 백김치,마늘쫑,겉절이.절집에서와 똑같이, 큰 그룻 하나에 반찬과 밥을 '양껏' 담되, 남기지 않아야 한다. 다시말해 쓰레기를 남기지 않아야 한다.하루도 빠짐없이 하루 세 끼를 먹어왔으면서도, 밥과 반찬 양을 가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난감했다. 남은 백김치를 씹어 삼키느라 곤욕을 치렀다. 도보 순례 이튿날 아침부터 대 얻어맞은 것이다(다음 주에 이 '발우공양'에 대해 따로 언급할 것이다. 이 사찰 식사법은 우리가 시급히 되살려야 할 '오래된 미래' 운데 하나다).
다들 잠을 설친 것 같았다. 운동장 가, 수돗가에서 양치질을 하는 대원들의 낯빛이 부시시하다. 도보 순례는 한 마디로 모든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었다. 몸이 낯선 곳에 던져지자(물론 각자 선택한 것이지만)
마음은 '몸둘 바'를 몰라 한다. 아파트, 자동차, 전기 제품, 통신 기기, 인스턴트 식품, 정해진 일상적 삶... 한 마디로 도시적 삶의 방식으로부터 격리된 것. 도보 순례는 자발적 유배가 아닐 수 없다.
출발하기 전, 조 별로 나뉘어 마을 청소에 나섰다. 도보 순례 총괄 진행을 맡고 있는 국민행동 허욱 사무국장이, 문정댐이 들어서려 했던 곳을 일러준다.지리산 댐 건설 계획은 실측 단계에서 들통이 났다.
1998년, 진주 환경연합에서 일하는 김석봉씨가 엄천강 용유담을 지나다가 우연히 측량하는 사람들을 발견한 것이다.
정부에서는 지리산 댐 계획 자체가 없다고 발뺌했지만, 1999년 민관 동 조사단이 만들어졌다. 1년이 넘는 조사를 거쳐 지난 2월에 보고서가 발표되었는데 그 결론은 '건설 불가'였다. 허욱 국장에 의하면, 매우
이례적이고도 강력한 입장이었다. 이후 정부는 함구하고 있다.
문하마을 김길동 이장을 아십니까
5월4일, 아침 8시 정각, 깃발을 앞세우고 문정초등학교 정문을 나섰다.지리산 도보 순례가 이틀째로 접어들었다. 선두는 도로로 나서지 않고 오른쪽 마을로 올라가는 고샅길로 올라선다. 깃발은 세운 지 얼마 안되어 보이는 비석 앞에 섰다. '김길동 공덕비'. 문정초등학교 건물이 바로 뒤였다.
이병철 공동대표가 비석 뒤에 새겨진 비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51년, 2월8~9일,함양군 일대에서 대대적인 양민 학살극이 자행되었다.이곳 문하마을이 그 시발지였다.금서면 반곡에서 267명이 학살당했고,유림면 서주에서는 1077명이,그리고 2월9일에는 거창 신원면에서 587 명이 목숨을 잃었다. 불과 이틀 사이에 1천 여 명이 공비와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것이다.
2월8일 아침 8시 경,시국 강연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주민 200여 명이 모였다. 이때, 마을 이장 김길동씨가 웃옷을 벗어던지며 죄가 있다면 책임자인 내게 있으니 나를 죽여라'라며 군인들에게 항의, 위기를 모면했다. 200여 마을 주민 가운데 그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
이 공덕비는 지난 해 세워졌다. 함양-산청-거창 양민학살 사건이 발생한 지 50 년이 지난 2000년에야 비문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대원들은 일동 묵념했다.
하룻밤 묵은 문하마을, 영화 <태백산맥>을 함께 본 마을 사람들 중에 그때 살아남은 노인들이 있었던 것이다.
2차선 지방도를 걸어보라
엄천강을 오른쪽에 두고 걷는다. 순례단이 걷는 만큼 천왕봉은 오른쪽 어깨 뒤에서 조금씩 멀어진다.
한 대원이 '아, 아카시아가 피었네!'라며 탄성을 지른다. 누군가 찔레 순을 따 먹어보라고 한다. 50여 년 전, 전쟁 와중에도 아카시아 꽃이 피어나고, 찔레가 여린 순을 내밀었으리라. 군경 토벌대도, 빨치산도 아카시아 꽃이나 찔레순을 따 입에 넣었으리라. 달착지근해 했으리라. 하지만 젊은 순례 대원들은 꽃이나 새순을 선뜻 입에 넣지 않는다. 길가에 피어난 꽃과 새순이어서, 즉각 자동차 배기가스를 떠올린 것일까. 민족사의 비극은 꽃이나 새순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인간이 인간을 증오하며 저지른 참혹한 역사가 불과 반 세기만에 인간과 자연 사이의 단절로 전이되고 있는 것인가. 지리산의 어제와 지리산의 오늘, 그리고 지리산의 내일을 이어주는 '생명의 패러다임'은
아직 관념인 것인가.
엄천강이 왼쪽으로 급하게 커브를 튼다. 함양군 유림면 서주마을로 향하는 2차선 도로 역시 말발굽처럼 휘어들어간다. 길은 강물의 흐름을 따라 조금씩 낮아진다.
5분에 한 대 꼴로 15톤 덤프 트럭이 우리가 걸어온 문정리 쪽으로 질주한다. 상류에 또 무슨 공사가 있는 모양이다. 중장비가 시속 70km로 지나갈 때마다 '폭풍'이 일었다. 움찔하며, 숨을 멈추고 갓길 쪽으로
몸을 돌려야 한다. 개발 논리가 도로를 뚫고, 경쟁(경제)논리가 포장된 도로를 질주한다.
국도를 걸어보라. 온몸으로 자동차의 속력을 느낄 수 있으니. 2차선 지방도로를 걸어보라. 온몸으로 성장 제일주의의 무지막지한 속력을 확인할 수 있느니...
©시사저널 안희태
참종교 : 지리산 살리기 운동은 종교간 벽을 허무는 시발점이다.
오후 3시, 서주 마을에서 '한국전쟁시 함양군 민간인 희생자 위령제'를 지냈다. 함양군 종교인협의회에 소속된 종교인들이 각각 원혼을 위로했다.
원불교, 기독교, 천주교, 불교 순으로 종교인들이 나와 각각의 의식으로 원혼들을 위로하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적이었다. 지리산 위령제가 완강하기만 하던 종교 간 벽을 허무는 하나의 계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교무, 목사, 수녀, 스님들이 나란히 서서 유족회 대표의 당시 증언을 숙연하게 듣고 있었다(관련 기사 참조).
다시 길로 올라선다.
그렇다. 이 길은 죽음의 길이었고 죽임의 길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이 분단의 그늘이 머리에 인 채 오가던 분노의 길이고, 복수의 길이며, 공포와 절망의 길이다. 지리산을 들고나는 이 길은, 분단에서 발원한
아주 오래된 길이다.
순례 이튿날 저녁, 지리산 시루봉 너머로 지는 노을은 지독했다.
지리산 능선 바로 위에서 붉은 원이기를 포기하는 저녁 해는 서녘 하늘을 물들이지 않고, 저 혼자 무너지고 있었다.
신생 조선을 거부하고,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경남 산청 금서로 내려와, 스러진 조국을 향해 눈물을 흘렸다는 망경루에 묵는다.
하룻밤 묵게 된 망경루에는 일체 전원이 없었다.
플러그가 없는 곳을 상상해 보았는가. 생각해 보라. 핸드폰을 충전할 수 없는 곳, 그곳이 바로 망명지이다. 단원들 가운데 몇몇은 외부와 완전 두절되었다.
전원이 없어서였을까. 땅의 기운이 좋아서였을까. 잠은 달았다(산악인들에 따르면, 어떤 곳에 텐트를 치면, 아무리 피곤해도 잠이 오지 않는 곳이 있다고 한다).
계곡 물에서 세수를 하다가, 멈칫했다. 물 속 돌 틈에서 가재 새끼들이 꼼지락거렸다. 피래미들도 보였다. 두 손을 모아 물을 담아 올리는 동작이 나도 모르게 조심스러워졌다. 가재 새끼들과 20년 넘게 전원과 연결되어 있던 도시인이 교감한 것이다.
두렵고도 기쁜, 우리 아픈 몸
5월5일, 순례 셋째날. 오늘부터 본격적인 도보 순례에 돌입한다.
어제는 7,5km를 걸었지만, 오늘은 산청읍까지 21km를 걷는다.
엄천강은 산청에서 경호강으로 이름만 바뀐다. 전북 남원 운봉에서 경남 함양군 유림까지가 엄천강이고, 유림과 맞닿은 산청군 생촌면에서부터 진주까지가 경호강이다. 진주에 들어서면 남강으로 불린다.
산청가는 길, 이 길에서도 위령제가 열린다. 5월7일(월요일) 단성면 외공리에서 범종교인 위령제를 갖는 것이다.
해방과 분단, 전쟁과 분단의 역사에 귀기울이다 보면, 지리산은 함부로 밟을 수 없다. 지리산 일대는 모두 '묘지'이기 때문이다.
양촌 마을에서 점심을 먹고, 경호강변을 따라 걷는다.
양촌 강변유원지에서 길은 갑자기 멈춰선다. 징검다리를 건너기로 했는데, 두 개의 징검다리 모두 가운데 물살 센 곳이 유실되어 있었다.
모두 운동화와 양말을 벗고, 바지춤을 걷어 올리고 얕을 곳을 찾아 강을 건넌다. 물 속 자갈이 매우 미끄러웠 위험했다. 녹조 현상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도강 작전은 성공이었다. 부상자, 낙오자가 없었다.
다시 강변으로 올라가 휴식. 즉석에서 물수제비 뜨기 대회가 열린다.
모두 어린이로 돌아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어린이날이었다.
오전에 오른쪽 무릎 아래, 이른바 '촛대뼈'가 시큰거리더니, 11시 무렵부터는 허리가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불안하고 기뻤다. 이러다가 도중 하자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가도, 상한 몸이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는 '명현 현상'일 것이라며 스스로를 달랬다. 사흘 연속해서 걸어본 적이 있었던가. 초등학교 이후, 그러니까 30년 만에 처음 있는 대사건이었다.
몸은 더 아플 것이다. 당연하다. '두 발 인간'이 직립 보행을 등한시해온 대가를 받는 것이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무플 관절은 뜨거워 질 것이다. 허리가 더 굳을지도 모른다...
©시사저널 안희태
미래로 : 도보순례는 자기몸으로 돌아가 생명의 미래를 성찰하는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망명'이다.
순례단장 수경스님의 '법어'
어제(5월4일) 저녁, 식사를 마치고 평가 회의가 있었다.
순례단 세끼 식사와 텐트 등 장비를 담당하고 있는 지원팀에서는 세 가지 부탁이 나왔다. 첫째, 식기를 물로 닦지 말고, 소량의 휴지로 닦아주실 것. 둘째, 쓰레기 분리 수거에 신경을 써 주실 것. 셋째, 배낭
끈처리를 말끔하게 할 것. 트럭에 짐을 싣고 내릴 때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대원들은 낮에 거행된 서주마을 위령제에서 느낀 바가 매우 많았다고 말했다.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곧바로 도보 순례에 합류한 박기성 대원(한국산악연맹구조대)은 "유가족 부회장께서 당시 상황을 회상하는 것을 들을 때 눈물이 나오는 한편, 창피한 생각도 들었다. 우리 역사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됐다. 여기에 오길 잘 했다"라고 말했다.
대원들은 김길동 공덕비나 위령제에 대한 사전 정보가 부족했던 것이 아쉬웠다고 지적했다. 진행팀에서 전날, 다음날 일정에 대해 간략한 설명이 있으면 좋겠다는 지적이 나왔다.
하지만 진행팀의 생각은 달랐다. 총괄진행을 맡은 허욱 국장은 "도보 순례는 공부 보다는 몸이 먼저다. 백가지 지식을 얻는 것보다 자기 몸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앞으로 몸이 힘들어지면 알게 된다.
몸이 아프면, 무엇보다 먼저 자기 몸을 보전하는 데 집중하게 된다.
그때 자기 자신과 대화가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낙동강 살리기 도보 순례에 참가했던 화가 장영철씨(알아주는 소리꾼이다)
역시 순례 행위 자체가 갖고 있는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씨는 "시인이 시상이 가장 잘 떠오를 때가 언제인지 조사해 봤더니, 걸을 때였다. 걸으면서 많은 영감이 떠오를 것이다. 걸으면서, 내 안에서 들끓는 불만 덩어리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보라. 현대사의 질곡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도보 순례가 각자 자기 자신을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수경 스님은 '법어'를 내렸다. 어려운 말씀은 아니었지만, 당장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었다. 스님이 어린이들을 만날 때마다 늘 당부하는 세 가지 바람을 대원들에게 들려주었다. 요약해서 옮긴다.
첫째, 인사를 반듯하게 하라.
둘째, 댓돌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아라.
셋째, 바른 자세로 앉아라.
댓돌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는 사람은 자기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다. 신발 벗어놓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성정을 읽을 수 있다. 조급한 사람은 결코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지 않는다.
앉을 때 척추를 바로 세워야 호흡이 원활해지고, 마음이 바로 선다.
신(몸)을 바로 세워야 세상을 보는 바른 눈이 생기는 법이다.
5월4~5일 지리산
도보순례 일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