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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지리산도보순례

천마리학 2013. 6. 30. 16:55

 

 

[지리산도보순례]지리산 도보 순례단장 수경 스님
"상생에 바탕 둔 대안운동 펴자"/"대립 초래하는 투쟁 논리 버려야"
기사입력시간 [603호] 2001.05.17  (목) 이문재 취재부장 | moon@sisapress.com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수경 스님은 바깥일에는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1990년 실상사에 들어갈 때, 수경 스님은 오랜 도반인 주지 도법 스님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했다. "실상사 문제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 법당에 불이 난다 해도 나는 신경 안 쓴다." 주지 스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해 봄, 도법 스님이 지리산 댐 반대 운동에 동참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했다. 그러나 수경 스님은 급기야 도법 스님으로부터 '생명이 죽어가는데 혼자 걸망 지고 가는 게 수행자냐'라는 '공갈 협박'을 받았다. 결국 넘어가고 말았다.

 

   
 
ⓒ시사저널 안희태
 
하지만 초기에는 갈등이 많았다. 괜한 고생을 하는 것 같았다. 스님은 그때 "지리산과 낙동강 그리고 내가 따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닌가. 내 수행과 내가 참여하는 운동이 일치하는 길을 찾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기획한 것이 낙동강 순례였고, 지난해 10월 낙동강 줄기를 따라 걸으며 그 길을 찾았다. 지리산 살리기가 곧 스님 자신을 살리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 순간부터 지리산 살리기 운동에 발벗고 나섰다.

 

10년 전, 지리산에서 혼자 사는 노인을 만나지 않았다면, 수경 스님은 지금 선방에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백장암에 있을 때, 뱀사골에서 거의 다 죽어가는 노인을 보았다. 인민군으로 내려왔다가 체포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죽기 일보 직전에 살아난 노인이었다. 전향하고 사회로 나왔지만, 대인공포증에 시달렸고, 영양 실조로 인하여 실명까지 했다. 지리산 위령제의 밑바탕에는 그 노인이 자리 잡고 있다.

스님은 이번 위령제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선 민간인 희생자는 물론 빨치산 원혼까지 아우르는 최초의 위령제라는 것. 둘째, 생명 문제를 통해 완강했던 종교간 벽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스님은 지리산 살리기에서 결집된 역량이 새만금 문제를 해결하는 강력한 추진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시민운동이 종교와 만나면서 대립 논리가 아니라 상생 논리에 개안하기 시작했다. 스님에 따르면, 시민운동이 구사하는 투쟁의 논리는, 설령 문제를 해결한다 해도 다른 한쪽에게 상처를 남긴다. 하지만 종교단체와 함께 상생을 전제로 대안 운동을 전개한다면 많은 문제가 앙금을 남기지 않고 풀려갈 것이라고 스님은 말한다. 예컨대 지리산 개발을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 중앙 정부 차원에서 특별법을 제정케 하여, 지역적 특성을 살리는 환경 친화 프로젝트를 제시한다면 어느 쪽이든 반대할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스님은 도보 순례 중에도 휴대폰 통화를 자주 한다. 스님은 새만금 반대 운동에도 깊숙이 개입해 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새만금 문제다. 지리산 문제는 어느 정도 정리되어 가고 있다. 개펄도 살리고 전북 지역도 살리는 대안이 받아들여진다면, 환경 정책이 크게 달라지는 계기가 될 것이다"라고 스님은 말했다.

[지리산도보순례]지리산 도보 순례단장 수경 스님

"상생에 바탕 둔 대안운동 펴자"/"대립 초래하는 투쟁 논리 버려야"

 

 

 

기사입력시간 [603] 2001.05.17 () 이문재 취재부장 | moon@sisapress.com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수경 스님은 바깥일에는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1990년 실상사에 들어갈 때, 수경 스님은 오랜 도반인 주지 도법 스님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했다. "실상사 문제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 법당에 불이 난다 해도 나는 신경 안 쓴다." 주지 스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해 봄, 도법 스님이 지리산 댐 반대 운동에 동참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했다. 그러나 수경 스님은 급기야 도법 스님으로부터 '생명이 죽어가는데 혼자 걸망 지고 가는 게 수행자냐'라는 '공갈 협박'을 받았다. 결국 넘어가고 말았다.

 

 

 

시사저널 안희태

 

하지만 초기에는 갈등이 많았다. 괜한 고생을 하는 것 같았다. 스님은 그때 "지리산과 낙동강 그리고 내가 따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닌가. 내 수행과 내가 참여하는 운동이 일치하는 길을 찾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기획한 것이 낙동강 순례였고, 지난해 10월 낙동강 줄기를 따라 걸으며 그 길을 찾았다. 지리산 살리기가 곧 스님 자신을 살리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 순간부터 지리산 살리기 운동에 발벗고 나섰다.

 

10년 전, 지리산에서 혼자 사는 노인을 만나지 않았다면, 수경 스님은 지금 선방에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백장암에 있을 때, 뱀사골에서 거의 다 죽어가는 노인을 보았다. 인민군으로 내려왔다가 체포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죽기 일보 직전에 살아난 노인이었다. 전향하고 사회로 나왔지만, 대인공포증에 시달렸고, 영양 실조로 인하여 실명까지 했다. 지리산 위령제의 밑바탕에는 그 노인이 자리 잡고 있다.

 

스님은 이번 위령제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선 민간인 희생자는 물론 빨치산 원혼까지 아우르는 최초의 위령제라는 것. 둘째, 생명 문제를 통해 완강했던 종교간 벽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스님은 지리산 살리기에서 결집된 역량이 새만금 문제를 해결하는 강력한 추진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시민운동이 종교와 만나면서 대립 논리가 아니라 상생 논리에 개안하기 시작했다. 스님에 따르면, 시민운동이 구사하는 투쟁의 논리는, 설령 문제를 해결한다 해도 다른 한쪽에게 상처를 남긴다. 하지만 종교단체와 함께 상생을 전제로 대안 운동을 전개한다면 많은 문제가 앙금을 남기지 않고 풀려갈 것이라고 스님은 말한다. 예컨대 지리산 개발을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 중앙 정부 차원에서 특별법을 제정케 하여, 지역적 특성을 살리는 환경 친화 프로젝트를 제시한다면 어느 쪽이든 반대할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스님은 도보 순례 중에도 휴대폰 통화를 자주 한다. 스님은 새만금 반대 운동에도 깊숙이 개입해 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새만금 문제다. 지리산 문제는 어느 정도 정리되어 가고 있다. 개펄도 살리고 전북 지역도 살리는 대안이 받아들여진다면, 환경 정책이 크게 달라지는 계기가 될 것이다"라고 스님은 말했다.

 

 

 

[지리산 도보 순례] "백두대간·엄천강 죽이지 말라"
도보 순례단, 남원 환경운동연합과 운봉댐 건설 반대 첫 궐기대회
기사입력시간 [605호] 2001.05.31  (목) 이문재 취재부장 | moon@sisapress.com  
지난 5월17일 오후, 운봉읍사무소 앞에서 열린 운봉댐 건설을 반대하는 첫 궐기대회에 지역 주민들은 거의 참가하지 않았다. 모내기가 한창인 데다, 아직 골프장 건설에 대한 주민들의 체감 온도가 낮아 보였다. 남원 환경운동연합 윤태중 의장은 "환경청과 산림청이 입법 추진하는 백두대간 보호법을 적극 지지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운봉에 골프장이 들어서지 못하도록 결사 반대하겠다"라고 말했다.
   
 
ⓒ시사저널 안희태
"골프장 건설 백지화하라" : 도보 순례단과 지역 환경단체가 운봉읍사무소 앞에서 골프장 건설 반대 시위를 벌였다. 가운데 모자 쓴 이가 도보 순례단장 수경 스님.
 
궐기대회에 참석한 남원을 비롯한 임실·순창 환경단체에 따르면, 골프장은 백두대간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경남 함양으로 흘러가는 엄천강을 오염시킨다. 또한 보통 농사에 견주어 7배에 달하는 농약을 뿌려 지하수 오염은 물론, 뿌린 농약 가운데 30%가 공기 중에 방사되어 인근 바래봉·시루봉까지 농약 피해를 보게 된다. 게다가 지하수 고갈 문제도 심각해질 것이라고 지적한다. 지역 환경단체는, 이외에도 골프장이 들어선다고 해서 지자체의 세수가 크게 느는 것도 아니고 새 일자리가 창출되는 것도 아니라며, 골프장 건설을 백지화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남원시 관계자는 "관계법에 따라 검토하고 있는 단계여서, 아직 시의 입장을 밝힐 때가 아니다. 앞으로 환경·재해·교통 영향 평가와 공청회 등 거쳐야 할 절차가 많다"라고 말했다. 정준상 남원시의원은 "환경단체의 지적에 일리가 있다. 그러나 침소봉대된 측면도 있다. 나는 지역 주민들에게 '피부에 와닿는 이익도 없지만, 피부에 와닿는 피해도 없다. 골프장은 지역 발전의 시초다'라고 말한다. 지역 여론은 골프장을 세워야 한다는 쪽이 압도적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역 환경단체는, 대다수 주민이 골프장 예정지의 위치조차 모를 만큼 아직 무관심하고, 현지 가장리 주민들은 농약 피해를 크게 걱정하고 있다고 맞서고 있다. 인터넷 여론조사에서는 골프장 반대 의견이 대다수였다고 지역 환경단체는 덧붙였다. 정준상 의원에 따르면, 골프장 개발권은 올 연말쯤 가부가 결정난다. 올 하반기에 운봉읍에서는 개발론과 환경론이, 그리고 전북과 경남 지역이 첨예하게 대립할 것으로 보인다.

[지리산 도보 순례] "백두대간·엄천강 죽이지 말라"

 

도보 순례단, 남원 환경운동연합과 운봉댐 건설 반대 첫 궐기대회

 

 

 

 

기사입력시간 [605] 2001.05.31 () 이문재 취재부장 | moon@sisapress.com

 

 

 

 

지난 517일 오후, 운봉읍사무소 앞에서 열린 운봉댐 건설을 반대하는 첫 궐기대회에 지역 주민들은 거의 참가하지 않았다. 모내기가 한창인 데다, 아직 골프장 건설에 대한 주민들의 체감 온도가 낮아 보였다. 남원 환경운동연합 윤태중 의장은 "환경청과 산림청이 입법 추진하는 백두대간 보호법을 적극 지지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운봉에 골프장이 들어서지 못하도록 결사 반대하겠다"라고 말했다.'

 

 

시사저널 안희태

"골프장 건설 백지화하라" : 도보 순례단과 지역 환경단체가 운봉읍사무소 앞에서 골프장 건설 반대 시위를 벌였다. 가운데 모자 쓴 이가 도보 순례단장 수경 스님.

 

궐기대회에 참석한 남원을 비롯한 임실·순창 환경단체에 따르면, 골프장은 백두대간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경남 함양으로 흘러가는 엄천강을 오염시킨다. 또한 보통 농사에 견주어 7배에 달하는 농약을 뿌려 지하수 오염은 물론, 뿌린 농약 가운데 30%가 공기 중에 방사되어 인근 바래봉·시루봉까지 농약 피해를 보게 된다. 게다가 지하수 고갈 문제도 심각해질 것이라고 지적한다. 지역 환경단체는, 이외에도 골프장이 들어선다고 해서 지자체의 세수가 크게 느는 것도 아니고 새 일자리가 창출되는 것도 아니라며, 골프장 건설을 백지화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남원시 관계자는 "관계법에 따라 검토하고 있는 단계여서, 아직 시의 입장을 밝힐 때가 아니다. 앞으로 환경·재해·교통 영향 평가와 공청회 등 거쳐야 할 절차가 많다"라고 말했다. 정준상 남원시의원은 "환경단체의 지적에 일리가 있다. 그러나 침소봉대된 측면도 있다. 나는 지역 주민들에게 '피부에 와닿는 이익도 없지만, 피부에 와닿는 피해도 없다. 골프장은 지역 발전의 시초다'라고 말한다. 지역 여론은 골프장을 세워야 한다는 쪽이 압도적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역 환경단체는, 대다수 주민이 골프장 예정지의 위치조차 모를 만큼 아직 무관심하고, 현지 가장리 주민들은 농약 피해를 크게 걱정하고 있다고 맞서고 있다. 인터넷 여론조사에서는 골프장 반대 의견이 대다수였다고 지역 환경단체는 덧붙였다. 정준상 의원에 따르면, 골프장 개발권은 올 연말쯤 가부가 결정난다. 올 하반기에 운봉읍에서는 개발론과 환경론이, 그리고 전북과 경남 지역이 첨예하게 대립할 것으로 보인다.

 

 

 

[2] 도보 순례는 자발적 유배 (54~5)

 

 

[602] 20010510() 이문재 moon@e-sisa.co.kr

 

 

 

 

 

 

도보 순례는 자발적 망명이다.

도시적 삶에 빼앗긴 자기 자신을 되찾는 적극적 행위이다.

민족의 역사와 뭇생명이 처한 현실을 발견하고, 마침내 '우주인 나'를 만나는 아프고도 기쁜 ''시간이다.

 

   

 

 

 

©시사저널 안희태

 

 

 

 

 

 

길이 아니어도 좋다 : 경호강 물이 불어나 징검다리가 떠내려갔다. 대원들이 강을 건너며 ''을 만들고 있다.

   

 

날이 흐린 것일까, 안개일까. 낯선 산골의 신새벽. 텐트 밖으로 나오자 바로 선뜩한 '자연'이다. 침낭 속에서 몇 번이나 뒤척였다. 오랜만에 지구 표면에 바싹 달라붙어 잠을 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밤새 꿈의 갈피로 소쩍새 울음과 엄천강 물소리가 끼어들었던 것 같다꿈들은 단 하나의 문장도 이루지 못한다. 괜찮다. 지리산의 새벽 속에 있는 것이다.

   

순례 단장 수경 스님은 벌써 일어나, 교정 곳곳에 버려진 꽁초와 휴지 따위를 줍고 있다. 지난 해 11, 낙동강 1300리 도보 순례를 마쳤을 때 내걸었던 현수막이 그대로 걸려 있다. '지리산을 푸르게낙동강을 맑게함양을 아름답게/낙동강 도보순례단 환영식 및 보고대회/2000

1120일 지리산댐 백지화 함양군 대책위원회'

  

 

스님은 지난해 10월 말부터 27일 동안, 강원도 태백에서 부산에 이르는 낙동강 수계 도보 순례를 기획하고, 현장에서 지휘했다. 실상사에서 주지 도법 스님과, 백두대간을 종주한 연관 스님(화엄학림 학장)과 함께 정진하며, 생명 논리에 바탕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고 있다.(인터뷰 기사 참조)

   

 

 

 

 

©시사저널 안희태

 

 

 

 

 

 

음식찌거기? : 사찰식 식사법(발우공양)은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해법일 수 있다. 먹을만큼 먹기때문에 일체의 음식이 남지 않고 합성세재도 쓰지 않는다.

   

 

 

아침 메뉴는 떡국과 백김치마늘쫑겉절이절집에서와 똑같이, 큰 그룻 하나에 반찬과 밥을 '양껏' 담되, 남기지 않아야 한다. 다시말해 쓰레기를 남기지 않아야 한다.하루도 빠짐없이 하루 세 끼를 먹어왔으면서도, 밥과 반찬 양을 가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난감했다. 남은 백김치를 씹어 삼키느라 곤욕을 치렀다. 도보 순례 이튿날 아침부터  대 얻어맞은 것이다(다음 주에 이 '발우공양'에 대해 따로 언급할 것이다. 이 사찰 식사법은 우리가 시급히 되살려야 할 '오래된 미래' 운데 하나다).

  

 

다들 잠을 설친 것 같았다. 운동장 가, 수돗가에서 양치질을 하는 대원들의 낯빛이 부시시하다. 도보 순례는 한 마디로 모든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었다. 몸이 낯선 곳에 던져지자(물론 각자 선택한 것이지만)

마음은 '몸둘 바'를 몰라 한다. 아파트, 자동차, 전기 제품, 통신 기기, 인스턴트 식품, 정해진 일상적 삶... 한 마디로 도시적 삶의 방식으로부터 격리된 것. 도보 순례는 자발적 유배가 아닐 수 없다.

  

 

출발하기 전, 조 별로 나뉘어 마을 청소에 나섰다. 도보 순례 총괄 진행을 맡고 있는 국민행동 허욱 사무국장이, 문정댐이 들어서려 했던 곳을 일러준다지리산 댐 건설 계획은 실측 단계에서 들통이 났다.

1998, 진주 환경연합에서 일하는 김석봉씨가 엄천강 용유담을 지나다가 우연히 측량하는 사람들을 발견한 것이다.

  

 

정부에서는 지리산 댐 계획 자체가 없다고 발뺌했지만, 1999년 민관 동 조사단이 만들어졌다. 1년이 넘는 조사를 거쳐 지난 2월에 보고서가 발표되었는데 그 결론은 '건설 불가'였다. 허욱 국장에 의하면, 매우

이례적이고도 강력한 입장이었다. 이후 정부는 함구하고 있다.

 

   

문하마을 김길동 이장을 아십니까

     

54, 아침 8시 정각, 깃발을 앞세우고 문정초등학교 정문을 나섰다지리산 도보 순례가 이틀째로 접어들었다. 선두는 도로로 나서지 않고 오른쪽 마을로 올라가는 고샅길로 올라선다. 깃발은 세운 지 얼마 안되어 보이는 비석 앞에 섰다. '김길동 공덕비'. 문정초등학교 건물이 바로 뒤였다.

이병철 공동대표가 비석 뒤에 새겨진 비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51, 28~9함양군 일대에서 대대적인 양민 학살극이 자행되었다이곳 문하마을이 그 시발지였다금서면 반곡에서 267명이 학살당했고유림면 서주에서는 107명이그리고 29일에는 거창 신원면에서 587 명이 목숨을 잃었다불과 이틀 사이에 1천 여 명이 공비와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것이다

  

 

28일 아침 8시 경시국 강연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주민 200명이 모였다이때, 마을 이장 김길동씨가 웃옷을 벗어던지며 죄가 있다면 책임자인 내게 있으니 나를 죽여라'라며 군인들에게 항의, 위기를 모면했다. 200여 마을 주민 가운데 그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

   

이 공덕비는 지난 해 세워졌다. 함양-산청-거창 양민학살 사건이 발생한 지 50 년이 지난 2000년에야 비문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대원들은 일동 묵념했다

 

 

하룻밤 묵은 문하마을, 영화 <태백산맥>을 함께 본 마을 사람들 중에 그때 살아남은 노인들이 있었던 것이다.

 

   

2차선 지방도를 걸어보라

    

엄천강을 오른쪽에 두고 걷는다. 순례단이 걷는 만큼 천왕봉은 오른쪽 어깨 뒤에서 조금씩 멀어진다.

   

한 대원이 ', 아카시아가 피었네'라며 탄성을 지른다. 누군가 찔레 순을 따 먹어보라고 한다. 50여 년 전, 전쟁 와중에도 아카시아 꽃이 피어나고, 찔레가 여린 순을 내밀었으리라. 군경 토벌대도, 빨치산도 아카시아 꽃이나 찔레순을 따 입에 넣었으리라. 달착지근해 했으리라. 하지만 젊은 순례 대원들은 꽃이나 새순을 선뜻 입에 넣지 않는다. 길가에 피어난 꽃과 새순이어서, 즉각 자동차 배기가스를 떠올린 것일까. 민족사의 비극은 꽃이나 새순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인간이 인간을 증오하며 저지른 참혹한 역사가 불과 반 세기만에 인간과 자연 사이의 단절로 전이되고 있는 것인가. 지리산의 어제와 지리산의 오늘, 그리고 지리산의 내일을 이어주는 '생명의 패러다임'

아직 관념인 것인가.

   

 

엄천강이 왼쪽으로 급하게 커브를 튼다. 함양군 유림면 서주마을로 향하는 2차선 도로 역시 말발굽처럼 휘어들어간다. 길은 강물의 흐름을 따라 조금씩 낮아진다

  

 

5분에 한 대 꼴로 15톤 덤프 트럭이 우리가 걸어온 문정리 쪽으로 질주한다. 상류에 또 무슨 공사가 있는 모양이다. 중장비가 시속 70km지나갈 때마다 '폭풍'이 일었다. 움찔하며, 숨을 멈추고 갓길 쪽으로

몸을 돌려야 한다. 개발 논리가 도로를 뚫고, 경쟁(경제)논리가 포장된 도로를 질주한다

 

   

국도를 걸어보라. 온몸으로 자동차의 속력을 느낄 수 있으니. 2차선 지방도로를 걸어보라. 온몸으로 성장 제일주의의 무지막지한 속력을 확인할 수 있느니...

 

  

 

 

 

 

 

 

©시사저널 안희태

 

 

 

 

 

 

참종교 : 지리산 살리기 운동은 종교간 벽을 허무는 시발점이다.

오후 3, 서주 마을에서 '한국전쟁시 함양군 민간인 희생자 위령제'지냈다. 함양군 종교인협의회에 소속된 종교인들이 각각 원혼을 위로했다.

원불교, 기독교, 천주교, 불교 순으로 종교인들이 나와 각각의 의식으로 원혼들을 위로하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적이었다. 지리산 위령제가 완강하기만 하던 종교 간 벽을 허무는 하나의 계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교무, 목사, 수녀, 스님들이 나란히 서서 유족회 대표의 당시 증언을 숙연하게 듣고 있었다(관련 기사 참조).

   

다시 길로 올라선다.

  그렇다. 이 길은 죽음의 길이었고 죽임의 길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이 분단의 그늘이 머리에 인 채 오가던 분노의 길이고, 복수의 길이며, 공포와 절망의 길이다. 지리산을 들고나는 이 길은, 분단에서 발원한

아주 오래된 길이다. 

순례 이튿날 저녁, 지리산 시루봉 너머로 지는 노을은 지독했다.

지리산 능선 바로 위에서 붉은 원이기를 포기하는 저녁 해는 서녘 하늘을 물들이지 않고, 저 혼자 무너지고 있었다 

신생 조선을 거부하고,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경남 산청 금서로 내려와, 스러진 조국을 향해 눈물을 흘렸다는 망경루에 묵는다.

  하룻밤 묵게 된 망경루에는 일체 전원이 없었다.

  플러그가 없는 곳을 상상해 보았는가. 생각해 보라. 핸드폰을 충전할 수 없는 곳, 그곳이 바로 망명지이다. 단원들 가운데 몇몇은 외부와 완전 두절되었다.

   

전원이 없어서였을까. 땅의 기운이 좋아서였을까. 잠은 달았다(산악인들에 따르면, 어떤 곳에 텐트를 치면, 아무리 피곤해도 잠이 오지 않는 곳이 있다고 한다).

  계곡 물에서 세수를 하다가, 멈칫했다. 물 속 돌 틈에서 가재 새끼들이 꼼지락거렸다. 피래미들도 보였다. 두 손을 모아 물을 담아 올리는 동작이 나도 모르게 조심스러워졌다. 가재 새끼들과 20년 넘게 전원과 연결되어 있던 도시인이 교감한 것이다.

   

두렵고도 기쁜, 우리 아픈 몸 

   

55, 순례 셋째날. 오늘부터 본격적인 도보 순례에 돌입한다. 

어제는 7,5km를 걸었지만, 오늘은 산청읍까지 21km를 걷는다. 

엄천강은 산청에서 경호강으로 이름만 바뀐다. 전북 남원 운봉에서 경남 함양군 유림까지가 엄천강이고, 유림과 맞닿은 산청군 생촌면에서부터 진주까지가 경호강이다. 진주에 들어서면 남강으로 불린다.

   

산청가는 길, 이 길에서도 위령제가 열린다. 57(월요일) 단성면 외공리에서 범종교인 위령제를 갖는 것이다.

   

해방과 분단, 전쟁과 분단의 역사에 귀기울이다 보면, 지리산은 함부로 밟을 수 없다. 지리산 일대는 모두 '묘지'이기 때문이다.

  양촌 마을에서 점심을 먹고, 경호강변을 따라 걷는다. 

양촌 강변유원지에서 길은 갑자기 멈춰선다. 징검다리를 건너기로 했는데, 두 개의 징검다리 모두 가운데 물살 센 곳이 유실되어 있었다.

모두 운동화와 양말을 벗고, 바지춤을 걷어 올리고 얕을 곳을 찾아 강을 건넌다. 물 속 자갈이 매우 미끄러웠 위험했다. 녹조 현상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도강 작전은 성공이었다. 부상자, 낙오자가 없었다.

   

다시 강변으로 올라가 휴식. 즉석에서 물수제비 뜨기 대회가 열린다.

모두 어린이로 돌아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어린이날이었다 

오전에 오른쪽 무릎 아래, 이른바 '촛대뼈'가 시큰거리더니, 11무렵부터는 허리가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불안하고 기뻤다. 이러다가 도중 하자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가도, 상한 몸이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는 '명현 현상'일 것이라며 스스로를 달랬다. 사흘 연속해서 걸어본 적이 있었던가. 초등학교 이후, 그러니까 30년 만에 처음 있는 대사건이었다.

몸은 더 아플 것이다. 당연하다. '두 발 인간'이 직립 보행을 등한시해온 대가를 받는 것이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무플 관절은 뜨거워 질 것이다. 허리가 더 굳을지도 모른다...

  

 

 

 

 

 

 

©시사저널 안희태

 

 

 

 

 

 

미래로 : 도보순례는 자기몸으로 돌아가 생명의 미래를 성찰하는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망명'이다.

 

 

 

   

순례단장 수경스님의 '법어'

   

어제(54) 저녁, 식사를 마치고 평가 회의가 있었다.

   

순례단 세끼 식사와 텐트 등 장비를 담당하고 있는 지원팀에서는 세 가지 부탁이 나왔다. 첫째, 식기를 물로 닦지 말고, 소량의 휴지로 닦아주실 것. 둘째, 쓰레기 분리 수거에 신경을 써 주실 것. 셋째, 배낭

끈처리를 말끔하게 할 것. 트럭에 짐을 싣고 내릴 때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대원들은 낮에 거행된 서주마을 위령제에서 느낀 바가 매우 많았다고 말했다.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곧바로 도보 순례에 합류한 박기성 대원(한국산악연맹구조대)"유가족 부회장께서 당시 상황을 회상하는 것을 들을 때 눈물이 나오는 한편, 창피한 생각도 들었다. 우리 역사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됐다. 여기에 오길 잘 했다"라고 말했다.

   

대원들은 김길동 공덕비나 위령제에 대한 사전 정보가 부족했던 것이 아쉬웠다고 지적했다. 진행팀에서 전날, 다음날 일정에 대해 간략한 설명이 있으면 좋겠다는 지적이 나왔다.

   

하지만 진행팀의 생각은 달랐다. 총괄진행을 맡은 허욱 국장은 "도보 순례는 공부 보다는 몸이 먼저다. 백가지 지식을 얻는 것보다 자기 몸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앞으로 몸이 힘들어지면 알게 된다.

몸이 아프면, 무엇보다 먼저 자기 몸을 보전하는 데 집중하게 된다.

그때 자기 자신과 대화가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낙동강 살리기 도보 순례에 참가했던 화가 장영철씨(알아주는 소리꾼이다)

역시 순례 행위 자체가 갖고 있는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씨는 "시인이 시상이 가장 잘 떠오를 때가 언제인지 조사해 봤더니, 걸을 때였다. 걸으면서 많은 영감이 떠오를 것이다. 걸으면서, 내 안에서 들끓는 불만 덩어리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보라. 현대사의 질곡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도보 순례가 각자 자기 자신을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수경 스님은 '법어'를 내렸다. 어려운 말씀은 아니었지만, 당장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었다. 스님이 어린이들을 만날 때마다 늘 당부하는 세 가지 바람을 대원들에게 들려주었다. 요약해서 옮긴다.

 

첫째, 인사를 반듯하게 하라. 

둘째, 댓돌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아라.

셋째, 바른 자세로 앉아라.

 

댓돌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는 사람은 자기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다. 신발 벗어놓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성정을 읽을 수 있다. 조급한 사람은 결코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지 않는다.

  

 

앉을 때 척추를 바로 세워야 호흡이 원활해지고, 마음이 바로 선다.

()을 바로 세워야 세상을 보는 바른 눈이 생기는 법이다.

 

   

54~5일 지리산

도보순례 일정

 

 

 

 

[지리산 도보 순례] 850리 대장정 현장 중계

"그들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다"/'한국전쟁 지리산 희생자 위령제' 지내

 

 

 

기사입력시간 [604] 2001.05.24 () 이문재 취재부장 | moon@sisapress.com

 

 

 

 

도보 순례는 순항 궤도에 올라 있다. 길과 하나가 되는 도보 순례는 속도제일주의를 성찰하는 '자발적 망명'인 동시에, 온몸으로 역사와 생명을 느끼는 '상생의 기행'이다. 지리산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 한 자락에서 근현대사의 '아직 쓰이지 않은 페이지'를 읽어내고, 풀 한 포기, 송사리 한 마리에서도 인간중심주의의 그늘과 마주치는 것이다.

 

 

 

 

시사저널 안희태

 

 

 

[58() 6일째]

 

이른 아침, 순례 행렬에서 이탈했다. 그저께 개관한 '지리산 빨치산 토벌 전시관'을 둘러보려는 것이다. 어제, 비를 맞으며 위령제를 지냈던 외공마을 밤나무밭을 뒤로 하고 중산리 쪽으로 향한다. 취재팀과 동행한 서봉석 산청군 의원은 "원래 '지리산 평화의 집'으로 명명하려 했는데 '빨치산 토벌 전시관'이 되었다. 남북 정상이 만나 평화를 논의하는 마당에, 공비 토벌을 기념하다니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대결 논리가 낳은 '빨치산 토벌 전시관'

 

 

 

시사저널 안희태

'빨치산 토벌 전시관' 밖에 재현한 빨치산 아지트.

 

예상과 달리 전시관은 아담한 2층 건물이었다. 야외 공간에는 당시 국군이 사용했던 무기와 테마 조각, 시비 그리고 빨치산들이 사용했던 아지트가 복원되어 있고, 전시관 내부는 역사실과 생활실로 구성되어 있다. 서봉석 의원이 지적한 것처럼 전시관은 화해와 평화를 위한 교훈을 얻자고 하면서도 몇몇 군데에서는 냉전 논리가 여전했다. 조각품은 모두 국군이 인민군보다 크고 공격적이며, 여순 '반란' 사건 등 일부 용어도 시대 흐름에 역행하고 있었다. 전시관은 '대결의 논리'가 낳은 결과물로 보였다. 좌와 우, 남과 북 모두 피해자라는 상생의 논리가 작동했다면 세워지기 어려운 '안보 전시관'이었다(시사저널홈페이지 www.e-sisa.co.kr 참조).

 

[59() 7일째]

 

새벽녘에 구름 사이로 만월이 보였다. 지리산을 시계로 본다면, 순례단은 4시에서 6시 방향으로 내려간다. 어제 허 욱 국장이 잔뜩 겁을 주었다. 오늘 코스가 세 시간은 오르막길이고, 또 세 시간은 내리막길이라는 것이다. '마의 코스'. 전체 구간 가운데 가장 길다.

 

오전 750. 하동군 옥종면 월횡리 티타늄 광산 앞에서 출발한다. 하동, 섬진강 쪽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맞바람. 선선하다.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지난 7, 온종일 봄비 속을 걸었기 때문일까. 대원들은 저마다 자신감을 얻은 듯하다. 30명에 가까운 행렬이 흐트러지지 않고 가지런하다.

 

에리히 프롬은 이렇게 말했다. '역사상 이 시점에서 회의하고 비판하고 불복종하는 능력이야말로 인류 문명의 종말을 막을 수 있는 모든 것이다'(인문학과 생태학에서 재인용). 역사상 이 시점이 바로 지금이고, 그 지점 또한 바로 여기이다. 그리고 회의하고 비판하고 불복종하는 능력이 바로 걷기이다.

 

섬진강 강바람에 섞여 있는 것일까. 지리산 남서쪽 사면이 흘려보내는 바람은 상쾌하다. 삼림욕이 있으니 풍욕(風浴)도 있으리라. 순례 행렬은 싱싱한 바람 속에서 저마다 펄럭이는 깃발이었다. 깃발들이 우치(소재)를 넘어 하동읍을 지나 섬진강가에 도착한다. 내일은 순례 기간 중 단 하루뿐인 운행 조정일(휴일)이다.

 

 

 

 

 

[511() 9일째]

 

마지막 맑은 강, 섬진강이 죽어가고 있었다. 어제 섬진강에서 재첩을 채취해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섬진강 하류가 바다로 변하고 있다고 했다. 지리산은 신음하고 있었다. 산은 산대로 허리가 잘리고, 하천은 죽어가고 있다. ·핵폐기물 처리장·관광 일주 도로·골프장 등 온갖 오염 시설이 지리산 안팎을 들쑤시려 하고 있다(90쪽 상자 기사 참조).

 

8일 밤 진주 환경운동연합 김석봉 사무국장의 강연이 생각난다. '물이 오염된 지역은 인심도 나쁘다.' 인심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관심만은 아닐 터이다. 큰 산이나 오래된 나무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한편, 감나무에 까치밥을 남기고, 물고기들이 죽을까 봐 뜨거운 개숫물은 버리지 않는 섬세한 배려가 모두 '인심'이 아닌가. 우주와 자연과 교감하던 저 인심이 하루빨리 현재화해야 할 '오래된 미래'이다.

 

소설 토지의 최참판댁 '신축'

 

도보 순례는 시속 4km로 섬진강을 거슬러올라 악양면으로 깃든다. 토지전반부의 무대로 널리 알려지기 이전부터 악양은 악양동천(岳陽洞天)으로 이름이 높았다. 동천은 신선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 청학동과 흡사한 개념이다. 풍수적으로 거의 완벽한 환경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리산 일대에는 악양 이외에도 화개·의신 등이 동천이라고 불린다.

 

악양면 면소재지에 짐을 풀고 매암 차문화박물관을 찾았다. 대원들은 박물관장 강동오씨의 안내에 따라 차(중작)를 따 보았다. 강관장은 "차를 따보아야 차값이 결코 비싸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라고 말했다. 곡우 전후에 따는 우전 같은 경우, 20년 된 숙련자가 하루 종일 따는 양이 800g 정도라고 한다. 저녁에, 하동 민주청년회와 하동사랑운동연합과 지역 주민이 모여 '핵폐기물 처리장 설치 반대 군민 연대의 밤'을 가졌다. 생각보다 주민들의 참여는 저조했다.

 

[512() 10일째]

 

어젯밤, 악양의 밤하늘에는 '수박씨보다 많은' 별들이 박혀 있었다. 텐트에 누워 침낭 속으로 들어가 지형을 머리 속에 그려 보았다. 남쪽 섬진강을 바라보며 오른쪽으로는 성제봉, 뒤로는 시루봉, 왼쪽으로는 깃대봉과 칠성봉. 대원들은 커다란 삼태기의 중심에 누워 있다. 꿈에 별당아씨와 함께 지리산으로 숨어 들어간 구천()이나 길상이를 만나는 것은 아닐까 기대했는데, 깨고 보니 꿈 없는 잠이었다. '동천'이어서 그랬을까.

 

면소재지에서 내려오며 평사리 최참판댁 앞을 지난다. 악양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최참판댁을 하동군이 복원하고 있는데, 사실은 복원이 아니고 소설에 그려진 대로 '신축'하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문학의 위력일까, 아니면 관광 상품을 개발하지 못해 안달하는 지방자치단체의 얄팍한 '상술'일까, 진정 문학의 위엄이 살아 있다면 지리산에 대한 인간의 예의가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찍이 환경 전문지 녹색평론이 선언했듯이, 모든 진정한 문학은 모두 심오한 생태론이기 때문이다.

 

[513() 11일째]

 

 

 

시사저널 안희태

'이념의 사슬' 끊고 쉬소서 : 남부군의 '전설적 지도자' 이현상이 사살된 곳으로 여겨지는 곳에서 '지리산 희생자' 위령제를 지냈다.

 

드디어 지리산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것도 가장 깊은 곳으로. 원래 오전에 11km만 걷고 오후에는 지역 주민과 대화를 나누기로 했는데, 일정을 바꾸었다. 쌍계사앞 주차장을 출발해 오전에 단천골· 의신·삼정을 거쳐 빗점골까지 오르기로 했다. 의신에서부터는 등산이나 다름없는 도보 순례이다. 모두 12km.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사살된 곳에서 위령제를 지내기로 한 것이다.

 

세이암에서 단천골에 이르는 계곡은 깊고 길다. 산악의 근육은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있고, 근육들이 뿜어내는 신록은 눈부시다. 크고 높은 것에서 작고 낮은 것, 오래된 것에서 막 태어난 것까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는 산, 지리산 속에서 도보 순례 행렬은 한없이 작아져 있다.

 

의신에서부터 등산로는 '빨치산 토벌 루트'로 변해 있다. 곳곳에 하동군이 세워놓은 안내판과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다(함양군에서도 같은 표지판들을 보았다). 명선봉(1586m) 형제봉(1442m) 덕평봉(1510m)을 모자처럼 쓰고 있는 빗점골 계곡에서 남부군의 '전설적 지도자' 이현상은 사살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죽음은 명쾌하지 않다. 당시 군경의 자료와 남부군 출신들의 증언이 엇갈린다.

 

시린 계곡물 바로 옆, 이현상이 사살되었다는 곳, 한 평 정도 바위 위에 제단을 차렸다. 수경 스님은 '() 한국 전쟁 시 지리산 희생자 존영' 위패를 모신 뒤 "이현상이나 군경 토벌대의 죽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그 죽음들을 나의 죽음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평소 우리는 어떻게 살고 죽을 것인지 파악하지 않고 살아간다.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끊고 지리산에서 희생된 죽음과 나 자신을 일치시켜라"고 말했다.

 

긴 묵념에 이어 추도사가 낭독되고, 음복을 했다. '토벌 루트'를 되돌아 나오며 곰곰이 생각했지만, 지리산 희생자들의 죽음과 나 자신의 삶(혹은 죽음)을 일치시키기, 그것은 순례단원들 각자가 앞으로 오래 들고 다녀야 할, 버거운 화두였다.

 

* 더 상세하고 다양한 내용이 시사저널홈페이지(www.e-sisa.co.kr)에 중계되고 있습니다.

 

 

 

 

[지리산 도보 순례] 850리 대장정 현장 중계③
'상생의 인간띠' 두르다/뭇생명의 위기 초래한 원인 성찰
기사입력시간 [605호] 2001.05.31  (목) 이문재 취재부장 | moon@sisapress.com  
 

[지리산 도보 순례] 850리 대장정 현장 중계

'상생의 인간띠' 두르다/뭇생명의 위기 초래한 원인 성찰

 

 

 

 

기사입력시간 [605] 2001.05.31 () 이문재 취재부장 | moon@sisapress.com

 

 

 

 

 

 

시사저널 안희태

 

 

그것은 '인간띠'였다. 순례단이 지난 53일부터 18일까지, 16일 동안 걸은 850리 길은 '상생의 인간띠'였다.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20세기 냉전 논리가 작동하는 한반도의 압축 파일이 지리산이었다. 앞만 보고 달렸던 개발 독재의 엔진 또한 저 냉전 논리였으니, 지리산은 바로 우리들이었다. 지리산은 우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였다.

 

함양 마천면에서 지리산을 시계 방향으로 돌며 커다란 원을 그린 850리 도보 순례는 행선(行禪)이었으며, 화살기도였다. 목적어였던 몸을 주어의 자리에 앉히려는 묵상이었고, 좌우 대립으로 희생된 넋을 위로하는 천도재였으며, 효율과 편리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경제 논리의 대안을 탐색하는 성찰이었다.

 

지리산 도보 순례는, 범종교계 100일 기도·백두대간 종주와 함께, 오는 526() 오후 1, 달궁에서 분단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지리산 위령제'에서 일단 막을 내린다. 시사저널홈페이지(www.e-sisa.co.kr)에 더 상세하고 다양한 기사가 중계되고 있다.

 

 

 

[514() 12일째]

 

 

 

시사저널 안희태

위령제 포스터(판화 이철수)

 

경남 하동에서 전남 구례로 접어든다. 토지면 송정리, 섬진강 가에서 일박하고 구례읍으로 향한다. 시계에 견주면 7시에서 8시 방향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몸이 잃어버렸던 '자연의 시계'가 째깍째깍 돌고 있다. 아침 6시면 정확하게 눈이 떠지고, 온도·습도·풍속을 온몸으로 느낀다. 전날 발표되는 일기예보와 무관해져 있다.

 

 

오전 10시 반, 조선 시대 양반 저택이었던 운조루 앞 모정에서 잠시 휴식. 오늘 따라 수경 스님의 핸드폰이 유난히 자주 울린다. 빗점골 위령제에 대한 신문 기사 때문이다. 순례단이 마치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만을 추모한 것처럼 보도해서, 여기저기서 민감한 반응이 날아오는 것이다. 어쨌든 이현상이 최후를 맞이한 빗점골에서 지낸 지리산 희생자 위령제가 언론에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시사저널604호 참조). 스님은 "아직도 냉전 논리가 시퍼렇게 살아 있다. 범 종교계가 나서지 않았다면 지리산 위령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구례에 접어들자 노고단과, 노고단이 흘려보내는 능선(용의 등줄기)이 한눈에 들어온다. 순례 12일 만에 노고단을 본 것이다. '지리산 시인' 이원규 대장의 설명에 따르면, 지리산은 토산(土山)이어서 더욱 풍요한 산이다. 바위가 많은 악산(嶽山)과 달리, 골짜기와 능선은 물론 봉우리 정상까지 뭇생명이 빼곡하다. 지리산이 어머니산으로 불리는 여러 이유 중에 하나가 여기에 있다.

 

"지리산에 반달가슴곰 10여 마리 산다"

 

 

 

시사저널 안희태

장용욱 섬진강어족보존회 회장 - 장회장을 비롯한 회원들은 불법 어로를 감시하고, 수질 오염원을 찾아내느라 늘 '눈에 불을 켜고' 다닌다. 섬진강을 연어가 돌아오는 1급수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구례읍 입구에서부터 순례단의 행진은 시끌벅적해진다. 풍물패를 앞세워 길놀이를 한 것이다. 섬진강 어족보존회 회장 장용욱씨(51)도 회원들과 함께 어깨띠를 둘렀다. 1995년에 결성된 어족보존회는 불법 어로를 감시하는 한편, 수질 오염을 막기 위해 늘 눈을 부릅뜨고 다닌다. 장회장은 "모래무지 다슬기 참게 은어 등 1급수 어종이 급격하게 소멸하고 있다"라면서, 앞으로 섬진강을 연어가 회귀하는 청정 수역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화엄사 입구 주차장에서 숙영한다. 날이 어두워졌을 때 지리산 자연환경생태보존회 우두성 회장이 찾아왔다. 우회장이 들려준 1950년대 후반 지리산 등산로 복원 사업과 반달가슴곰 살리기 운동은 눈물 겨운 것이었다. 우회장은 "지리산에서 밀엽은 이제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다. 우회장에 따르면, 지리산에 반달곰이 10여 마리 살고 있는데, 앞으로 새끼곰을 방사해 개체 수를 늘려갈 예정이다.

 

 

[515() 13일째]

 

 

 

시사저널 안희태

우두성 지리산 자연생태 환경보존회장 - 1960년대 초반, 당시 구례군의 만 가구가 가구당 10원씩을 걷어, 지리산 살리기 운동에 나섰던 정신을 이어받아 지리산 반달가슴곰 살리기에 적극 나섰다.

 

화엄사에서 천은사를 거쳐 산동면 원촌까지 걸었다. 모두 18km. 이른 아침, 화엄사에서 나와 2차선 도로를 걷다가 보았다. 논에서 트랙터가 써레질을 하는데, 그 뒤에 백로를 비롯한 새 몇 마리가 뒤따르고 있었다. 기계가 논바닥을 갈아엎을 때 먹이가 나오기 때문이다. 고깃배 뒤를 쫓는 갈매기떼 같았다. 새들이 야성을 버리고 기계에 적응하는 것인가.

 

 

1960년대 미국 반문화 운동의 기수였던 시인 개리 스나이더는 자신의 책 야성의 삶에서 인간성은 곧 야성이며, 인간이 야성을 분리하는 순간 자연의 질서로부터 이탈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야성의 삶으로 돌아가기란 쉽지 않다. 지금, 여기서 누리는 모든 기득권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과 불편을 적극적으로 선택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스나이더는 말했다. 불교는 실천이지 이론이 아니라고. 명상은 종교적 행위가 아니고 '의도적인 고요와 침묵'이라고. 그렇다. 그러고 보니 사랑은 지극한 인위였다. 사랑이 자연스럽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인간중심주의부터 내던져야 하는, 뭇생명에 대한 사랑은 더욱 그렇다. 정밀한 프로그램 아래, 저마다 섬세한 집중력과 꾸준한 지속성을 갖추어야 한다. 사랑보다 참회가 더 고통스러운 법. 생명에 대한 인간의 참회는 생각보다 훨씬 길어질지 모른다.

 

그런데, 누구에게 앎이 부족하랴. 앎은 도처에서 흘러넘친다. 경전에서부터 교실·신문과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지식은 흘러넘친다. 이미 지식 '강국'인 것이다. 지식이 아니고 지혜다. 앎이 아니라 행함이다. 인류 역사에서, 그리고 한 개인의 삶에서 언제나 부족했던 것은 단 한가지, 바로 실천이었다.

 

[516() 14일째]

 

밤재에 올라 지리산 주능선을 '목격'한다. 순례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의 일부를 만난 것이다. 밤재 정상은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 걷는 사람만이 지리산을 볼 수 있는 천혜의 전망대다. 서너 개의 능선이 완만하게, 그러나 완강하게 흘러내린다. 지리산의 넉넉한 부피가 한눈에 들어온다.

 

 

 

시사저널 안희태

걷는 자의 행운 :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밤재에서 바라보는 노고단. 지리산의 넉넉한 품이 한눈에 들어온다.

 

 

새로 난 밤재 터널을 통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걸어서 불과 10. 하지만 순례단은 '직선과 평지'(밤재 터널)를 거부하고 밤재 위로 구불구불 걸어 올랐다. 밤재는 길이라기보다는 흔적이었다. 밤재 정상에서 소로를 버리고 인적이 뜸한 숲길로 파고든다. 삼림욕이다. 점심을 빵으로 때우고, 다시 숲길을 타고 남원 쪽으로 내려가다가 길을 잃고 말았다. 지도에 나와 있는 길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반바지 혹은 반팔 차림을 한 대원들은 종아리와 팔뚝에 상처가 났다. 10여 분이면 갈 거리를 세 시간 넘게 걸어 도착했다. 오랜만에 대원 대부분이 지쳐 있었다. 18세기 후반에 태어난 국창 권삼득이 득음한 육모정(구룡계곡)에서 야영한다.

 

[517() 15일째]

실상사 화엄학림에서 공부하는 스님 10여 분이 구간 참여했다. 평소보다 길어진 행렬이 구룡계곡을 따라 올랐다. 빗점골·밤재 구간에 이어 세 번째 산악 순례다. 오후 1시에 운봉 골프장 반대 궐기 대회가 열려서 그런지, 가파른 계곡 등산로를 올라가는 행렬이 더욱 긴장되어 보인다. 운봉 골프장 건설을 반대하는 최초의 공식 시위가 열리는 것이다.

 

엊저녁, 국민행동 허 욱 사무국장으로부터 '브리핑'을 받았다. 30만 평에 달하는 운봉 골프장 예정지는 지리산에서 출발하는 백두대간을 북쪽으로 넘겨주는 수정봉 기슭, 운봉면 가장리 저수지 부근이다. 이곳은 경남 함양·산청으로 흘러나가는 엄천강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허국장은 운봉 골프장 건설이 전통 지리학인 백두대간을 부정하고, 지리산 샛강의 죽음을 무시하는 지역이기주의의 표본이라고 말했다

 

 

도시적 삶으로 복귀하기 싫은 대원들

 

도보 순례의 종착지 실상사에 가까워질수록 대원들의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 같다. '도시적 삶'으로 복귀하기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성계의 황산대첩비와 가왕(歌王) 송흥록·국창 박초월 생가가 복원되어 있는 운봉읍 화수리 비전 마을에서 도보 순례는 마지막 밤을 맞는다.

 

[518() 마지막 날]

 

 

 

시사저널 안희태

 

'원만회향' : 도법 스님(왼쪽 두 번째)'도보 순례는 근원의 길 찾는 기도'라고 말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아깝다는 듯, 실상사로 향하는 발걸음이 단정하다. 실상사까지 13km, 30여 리. 인월에서 엄천강을 다시 만난다. 지리산을 한 바퀴 돌았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16일 동안, 발바닥이 부르트고, 피부는 새카매졌다. 16일 동안 위령제를 지내고, 전단을 돌리고, 구호를 외치고, 야영하면서, 어머니 지리산을 한바퀴 에워싸는 '상생의 인간띠'를 두른 것이다.

 

1055, 드디어 실상사 천왕문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실상사는 '원만회향'을 축하하는 현수막을 하나 걸어 놓았을 뿐, 환한 햇볕 속에서 고요했다. 1130, 기도를 마친 주지 도법 스님이 도보순례단을 맞이했다. 도법 스님은 "인간끼리 만든 역사가 사실을 잘 해보려고 한 것이었는데, 막상 이루어진 결과를 보면 끝없이 서로에게 못할 짓만 해온 역사였다"라며, 도보 순례가 무사히 끝난 날이 우연찮게 5·18과 겹쳐 있음을 환기시켰다. 스님은 피해자도 억울하지만 가해자도 스스로 야만임이 드러나 양쪽 다 불행한 역사가 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시사저널 안희태

마침내 일주 : 순례단원들이 저마다 지리산을 마음에 품고 실상사 앞에 도착해 기념 촬영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마찬가지라고 스님은 말했다. 인간과 자연도 결국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나아가 생명 전체가 위기를 맞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스님은 "도보 순례는 바로 이와 같은 결과가 왜 발생했는지 진지하게 성찰하는 기도였다는 점에서 대단히 큰 의미를 갖는다"라고 말했다.

 

실상사에서 다시 올려다보는 천왕봉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걸어서 지리산을 한 바퀴 돌아온 순례자들은 저마다 마음 속에 지리산이라는 큰 생명을 모시게 되었을 것이다. 순례는 끝났다. 하지만 그것은 앎의 한 방편이었을 따름. 문제는 행함이다. 그러니, 순례는 끝나지 않았다. 아직 시작하지도 않은 것이다.

 

 

 

시사저널-이문재기자취재부장 | moon@sisapress.com

지리산도보순례 제4신

 

[지리산도보순례 : 제4신] '지리산 빨치산 토벌 전시관'에서(5월8일~9일)

 

기사입력시간 [603호] 2001.05.17  (목)

 

'지리산을 그대로 놔두라'. 순례단이 출발할 때마다 외치는 구호다. 산청에서 하동으로 향하는 길. 지리산은 신음하고 있다.단 하루도 포크레인이나 덤프 트럭과 마주치지 않은 날이 없다. 몇몇 부상자들이 발생했지만,순례는 순항 중이다. 대열은 천왕봉을 중심으로4시에서 6시 방향으로 내려가고 있다.

 

 

 
 
ⓒ시사저널 안희태
'우리는 같은 민족' : 빨치산 토벌 전시관 외부에 전시된 조각품. 아직도 냉전논리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다.

 

 

5월8일 아침, 비가 그쳐 있다. 하지만 천왕봉은 보이지 않는다. 운무에 가려져 있다. 산 아래, 인간들이 저지르고 있는 탐욕스런 작태들이 보기 싫었던 것일까.

 

외공마을 '피의 골짜기'에서 맞은 비가 마르지 않는다. 젖은 옷과 신발은 밤새 말랐지만, 대원들의 표정은 젖어 있다. 50년 째 '무명 묘지'로 남아 있는 밤나무밭을 두 발로 밟고 온 느낌이 생생한 것이다.

오전 8시, 순례 행렬에서 이탈해 중산리 버스 종점 옆에 세워진 '지리산 빨치산 토벌 전시관'을 찾았다. 취재팀과 동행한 서봉석 군의원은 "당초에는 '지리산 평화의 집'이라고 명명하려 했는데, 토벌 전시관이 되고 말았다. 남북 정상이 만나 평화를 논의하는 마당에, 공비 토벌을 기념하다니,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예상과 달리 전시관 건물은 아담한 2층 건물이었다. 2년 전 다른 용도로 지었던 것을 전시 공간으로 바꾼 것이다. 입구에는 장갑차와 탱크, 경비행기 등 한국전쟁 당시 국군이 사용하던 무기가 전시되어 있고, 그 주위에 빨치산 토벌 장면을 비롯한 조형물(테마 조각)과 시비가 세워져 있다. 전시관 뒤에는 빨치산이 은거하던 아지트와 1963년 11월, 최후의 빨치산(정순덕)이 생포됐던 내원골 민가(구들장 아지트)가 실물 크기로 복원돼 있다.

 

   
 
ⓒ시사저널 안희태
'안보교육' : 토벌전시관은 남북화해시대라는 큰 흐름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
 
빨치산 토벌 전시관은 전쟁박물관을 떠올리게 한다. 몇 년 전, 서울 용산에 전쟁박물관이 세워질 때 찬반 양론이 분분했다. 그 중에서 '우리가 기념할 만한 전쟁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염원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목소리가 높았던 기억이 난다.

 

토벌 전시관은 전형적인 대립 논리의 결과물이다. 아군과 적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같은 대립 논리로는 더불어 살아가는 상생의 문명을 일구어낼 수 없다. 대립의 논리는 승패의 악순환을 되풀이할 따름이다. 지배와 전복의 악순환. 상처가 치유되기는커녕, 상처는 또다른 상처를낳는다. 대립의 논리에서 완전한 승리는 없다. 승자의 자리가 바뀔 뿐이다.

대립의 논리에서 보기에 '지리산 위령제'를 불필요하다. 이쪽은 선이고 저쪽은 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생명은 하나라는 상생의 논리에서 보면, 국군이나 빨치산은 다 같은 피해자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뭇생명의 상생을 희원하는 지리산 위령제 기간에 개관한 빨치산 토벌 전시관이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다.

'전쟁-고통-상처-화합'으로 이루어진 테마 조각 가운데에는 국군이 개머리판으로 인민군을 가격하려는 순간을 조각한 '작품'이 있는데 그 제목이 <우리는 같은 민족>이다. 그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작품 설명'이 붙어 있다.

'서로 다른 이념, 그리고 전쟁. 그로 인한 고통과 상처... 그 참혹한 비극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전쟁, 고통, 상처, 그리고 화합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조각상 앞에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되는가'

 

   
 
ⓒ시사저널 안희태
냉전논리 벗어나야 : 서봉석의원은 전시관이 지나치게 토벌대의 시각에 치우쳐 있다고 지적한다.
 
시비 앞에서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신동엽 시인의 <봄은>과 나태주 시인의 <강강수월래>가 나란히 새겨져 있었다. 신동엽 시인과 나태주 시인의 시가 어떻게 '빨치산 토벌 전시관' 과 어울리게 된 것일까, 의아했다. 신동엽 시인의 시 <봄은>에서 한민족이 녹여버려야 할 '미움의 쇠붙이'는 곧 외세와 이념일 터였다. 나태주 시인의 시 <강강수월래> 또한 남과 북이 서로 얼싸안고 강강수월래를 추는 그날을 열망하는 통일의 시이다. 두 시는 오히려 지리산 위령제에 적합한 시이지, '빨치산 토벌을 기념하는' 전시관과는 어울리기 힘든 시다.

 

서봉석의원은 전시관 1층 '역사실'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도 부적절하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1948년 '여순 사건'을 일방적으로 '반란'이라고 규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당시 군인들이 진압을 거부한 제주 4·3 사건은, 특별법이 제정되고 위령제가 거행되고 있는데, 지금 그 군인들을 '좌익'으로 보는 것은 낡은 냉전 논리라는 것이다.

오전 10시. 인근 중학교 학생들이 단체 관람을 하러 왔다. 한 학생이 "빨치산, 아주 나쁜 놈들이데요"라고 말했다. 아마 그 어린 중학생은 이곳 출신이 아니거나, 할아버지나 부모로부터 '그때 이야기'를 아직 듣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학생들은 <휘파람> <반갑습니다> 따위의 북한 노래를 거리낌없이 불러댔다.

지리산 빨치산 토벌전시관 앞에서 냉전 논리는 아직도 엄연했다.


길 위에서 맞은 어버이날

순례 3일 째부터 부상자가 발생하더니, 오늘(5월8일)에는 첫 낙오자가 생겼다. 시인 권천학씨(58)가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는 바람에 지원팀 자동차 신세를 졌다. 발바닥 물집 치료법을 두고 의견이 둘로 나뉘었다. 물집을 터뜨려야 한다는 쪽과 그대로 둬야 한다는 쪽. 한 대원은 그저께 물집을 터뜨렸고, 한 여성 대원은 터뜨리는 대신 양말에 쑥을 넣고 걸었다.

이틀이 지나자 두 대원 모두 '쌩쌩'했다. 어제,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며 걷고 나서인지, 모두들 걷기에 자신감이 붙은 모양이다.

외공마을에서 내려와 산청군을 벗어난다. 하동군 옥종면 월횡리. 티타늄 광산 시추지에서 야영한다.

길 위에서도 어버이날은 어버이날이었다. 2.5t 트럭으로 대형 천막이며 취사 도구, 대원들의 커다란 배낭 등을 운반하는 지원팀 응묵 스님(실상사)과 안준환 지원팀장이 어디선가 카네이션을 구해온 것이다. 순례단 막내 송정희씨(원광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가 단장 수경스님 왼쪽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드렸다.

스님은 전혀 예상을 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쑥스러워 했다. 하지만 이내 "평생 카네이션은 처음 받아보네"라며 환하게 웃었다. 대원들은 손뼉을 치면서, 저마다 두고온(혹은 돌아가신) 부모와, 두고온 어린 자녀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오늘 구간에 참여한 진주 환경운동연합 김석봉 사무국장의 강연이 있었다.

새벽녘에, 먹구름 사이로 보름달이 얼핏 나타나곤 했다.

 

5월8~9일 지리산도보순례

 

 

 

 

 

 

[지리산도보순례 : 6] '토벌루트' 따라 빗점골에 오르다

 

 

 

 

 

기사입력시간 [603] 2001.05.17 () 이문재 취재부장 | moon@sisapress.com

 

 

 

 

 

시사저널 안희태

빗점골 : 지리산의 가장 깊은 오지 가운데 하나인 이곳에서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최후를 맞았다.

 

513, 일요일. 11일째다. 새벽부터 부산했다. 지리산에서 가장 깊은 오지의 하나로 알려진 빗점골까지 올라야 한다. 원래는 오전에 11km만 걷고 오후에는 지역 주민과 대화를 나누기로 했는데, 일정을 바꾸었다.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사살된 곳으로 알려진 빗점골에서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에서 희생된 넋들을 달래기로 했다. 도보 순례는 지리산 위령제의 일환인 것이다.

 

오전 730, 쌍계사 앞 주차장을 출발한다. 30여 분을 걸었을까. 계곡 양 켠 가파른 경사면 곳곳이 차밭이다. 이른 시간인데, 벌써부터 차따는 사람들이 보인다(매암 차문화 박물관에서 차잎을 따보았으므로 자신있게 하는 말인데, 차값은 비싸지 않다).

 

최치원이 속세에서 더러워진 귀를 닦고 산 속으로 들어갔다는 세이암에서 단천골로 오르는 계곡은 깊고 또 길다. 길고 깊은 계속이 능선을 힘차게 밀어올린다. 하늘을 보려면 고개를 바짝 제껴야 한다.

 

산악의 근육은 팽팽하게 부풀어올라 있고, 그 근육들이 뿜어내는 신록은 눈부시다. 모두 이 봄에 새로 태어난 잎사귀들. 길섶에 나와 있던 다람쥐 한 마리가 다시 숲속으로 튀어들어간다. 크고 높은 것에서 작고 낮은 것까지, 오래된 것에서 막 태어난 것까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는 산. 지리산은 토산(土山)이다. 바위가 많은 악산(嶽山)에 견주어, 전체적으로 식생이 매우 풍부하다. 골짜기는 물론이고, 사방으로 뻗어내려간 능선과 우뚝우뚝 솟아있는 정상까지 생명이 빼곡하다. 지리산 속으로 파고들수록 도보 순례단의 행진은 한없이 작아져 있다.

 

마을 입구에 돌로 '의신동천'이라고 새겨넣은 의신에서부터 등산로는 '빨치산 토벌 루트'로 변해 있다. 하동군에서 세워놓은 빨치산 토벌 안내판과 이정표를 자주 마주친다. 도보 순례 첫날, 함양 마천 지역에서도 이같은 표지판을 본 적이 있다.

 

의신에서 한 시간 가량 걸어올라가야 하는 빗점골은 명선봉(1586m), 형제봉(1442m), 덕평봉(1510m)을 모자처럼 쓰고 있다. 오른쪽 너머로는 세석 평전. 지리산에서 가장 깊은 곳 가운데 하나다. 이 골짜기에서 남부군의 '전설적 지도자' 이현상이 사살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가 죽던 순간은 명쾌하지 않다. 당시 군경 자료와 남부군 출신들의 증언이 서로 어긋난다.

 

시린 물이 흐르는 계곡 바로 옆, 이현상이 사살되었다는, 한 평 반 정도 크기의 바위 위에 제단을 차렸다. 제단 바로 앞 바위에 위패를 모셨다. 위패에는 '고 한국전쟁시 지리산 희생자 존영'이라고 쓰여 있다. 수경 스님은 위령제 직전에, 묵념과 입정의 차이에 관해 설명했다. 입정은 '여러 생각들을 지우고 오직 한 생각을 모아 평정에 이르는' 마음 다스리기의 하나. 입정해 한 생각으로 관()할 때 비로소 지혜가 생긴다.

 

스님은 "이현상이나 군경 토벌대의 죽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그 죽음을 나의 죽음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평소 우리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지 파악하지 않고 살아간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끊고 지리산에서 희생된 죽음과 나 자신을 일치시켜라"라고 말했다. 향불을 하나씩 들고 입정한다. 계곡물소리, 바람소리, 산새소리가 끼어든다. 마음을 한군데로 모으기란 쉽지 않다. 이어, 조별로 추도사가 낭독되었다.

 

문규현 신부의 감동적인 추도사

 

 

 

시사저널 안희태

'고 한국전쟁시 지리산 희생자 존영' : 순례단이 조별로 추도사를 작성,낭독하고 있다.

 

순례단이 조별로 추도사를 낭독하고 난 뒤, 이원규 대장이 문규현 신부의 추도사를 대독했다. 지난 216, 지리산 위령제가 시작될 때 문신부가 보내온 것이었는데, 빗점골에서 이원규 대장의 목소리로 듣는 문신부의 '기도'는 남달랐다. 그것은 한편의 시 낭송이었다. 그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지리산 한바퀴 850리를 걷고 또 걷습니다.

함양군, 산청군, 하동군,

구례군, 남원시,

그리고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반야봉에서 빗점골, 피아골까지

저 계곡들 구석구석을 맴도는 바람은 그저 바람이 아니요,

그 바람이 내는 소리도 하릴없는 바람의 소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활활 타오르는 단풍과도 같은 선지피로

온 산을 적셨던 억울한 원혼들이 구천을 떠도는 것이요,

그들의 피맺힌 울부짖음의 소리입니다.

 

한국 전쟁시 좌와 우의 이데올로기 대립 속에서,

분단과 통일의 갈림길에서,

형은 토벌대로 아우는 빨치산으로 총구를 맞서게 했습니다.

자연도 인간에게 아름다움으로 다가서기 힘들었고,

인간은 자연 속에 젖어들 수 없는 분열과 파괴로 내몰았습니다.

 

저 좌우 대립과 긴 시간 속에

무수한 사람들이 핏빛 꽃잎으로 졌습니다.

작은 돌무덤들로 쌓이고 흙이 되었습니다.

눈물이 비가 되고 혼은 바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자연과 함께 죽어 자연으로 돌아갔으되,

자연은 여전히 그 억울한 혼들을 품었습니다.

불의한 인간 세상이 그들을 외면했을 때,

여기 지리산의 모든 뭇생명들이 그 외로운 혼들 곁에 남아,

그들을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저 역사 속의 억울한 죽음 앞에

용서를 청하지도 못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유일한 벗이 되어 온 지리산의 생명들을

또한 파괴해 왔습니다.

그래서, 짓밟히고 죽은 것이 사람인가 하면 자연이고

자연인가 하면 사람입니다.

바람소린가 하면, 죽어간 영혼들의 울부짖음이고

누군가 울부짖는가 하면, 바람이 우는 소립니다.

 

이제 우리는 지리산의 모든 영혼들을 위로하며,

그 영혼들과 함께 죽어간 꽃들과 나무들과 짐승들에게

용서를 청합니다.

끊임없는 인간의 무지와 탐욕으로 여전히 파괴당하고 있는

이 지리산의 고통을 끝내기 위해 우리 자신을 바칩니다.

그 원혼들이 위로받고, 자연에 대한 파괴가 멈춰질 때 그때서야,

우리는 진정으로 모든 생명들의 조화와 평화가

어우러지는 사회를 성취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용서를 구하며 걷고 또 걷습니다.

 

한국전쟁시 희생된 지리산의 모든 영가들이시여,

이제는 편히 잠드소서.

 

 

 

시사저널 안희태

돌로 만든 위령탑 : 대원들이 저마다 조약돌을 구해와 탑을 쌓았다.

 

위령제가 끝나고, 대원들은 저마다 조그만 돌을 하나씩 주워왔다. 위령제를 지낸 자리 바로 왼쪽 바위 위에 돌탑을 쌓아올렸다. 하동군은 이현상이 사살된 바위 한쪽에,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그림과 글이 새겨진 대형 안내판 세 개를 병풍처럼 세워놓았다. 그 병풍 맞은 편에 도보 순례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위령탑'이 솟아올랐다.

 

빗점골에서 걸어내려오며, 지리산 희생자들의 죽음과 나 자신의 죽음(혹은 삶)을 일치시키라는 수경 스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그것은 도보 순례단 대원들 각자가 앞으로 오래 들고 다녀야 할, 버거운 화두였다. 문제는 언제나 몸과 마음, 생각과 행동의 일치다. 일치!

 

 

 

 

[지리산 도보 순례] 지리산·섬진강 '중병'

 

마구잡이 개발·바닷물 역류 등으로 '만신창이'

 

 

 

기사입력시간 [604] 2001.05.24 () 이문재 취재부장 | moon@sisapress.com

 

 

 

 

 

시사저널 안희태

지리산 죽이기 : 희남재(멀리 보이는 산) 순환 관광도로를 건설하면 지리산은 또 다시 두 동강 나고 말 것이다.

 

11일 동안 지리산을 반 바퀴 도는 사이 도보 순례단은 하루도 빠짐없이 공사 현장을 지나쳤다. 지리산 북부를 휘감아 돌아 진주로 내려가는 엄천강-경호강-남강 줄기에는 상류 지역의 난개발로 인해 지난 4월 초 상상도 못하던 녹조 현상이 나타났다.

 

최후의 청정 수계라고 불리던 섬진강도 마찬가지다. 엄천강이 그렇듯이, 섬진강도 상류는 오폐수 유입으로 4급수 이하라고 알려져 있다. 하류로 내려오며 지리산 계곡물이 섞여드는 덕분에 물이 맑아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섬진강에는 바닷물이 역류하고 있다. 상류에 세워진 댐이 섬진강으로 물을 방류하지 않고, 다른 지역으로 물을 빼내는 데다, 설상가상으로 모래를 많이 파내 강바닥이 낮아졌기 때문이라고 주민들은 지적한다.

 

하동읍 섬진교 바로 위쪽에서 재첩을 채취하는 서정순씨(49)"도다리·농어·우럭까지 올라오고 파래가 생긴다. 바닷물이 여기까지 올라오면 재첩 생산이 줄어든다. 큰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하동 주민들은 섬진강 생태계 변화말고도 올 초부터 불거진 핵폐기물 처리장 설치 문제로 긴장하고 있다.

 

 

 

시사저널 안희태

'소금' : 바닷물이 역류해 섬진강에서 재첩을 채취하는 주민()들은 걱정이 태산이다.

 

지난 1, 공식으로 제기된 핵폐기물 처리장 부지는 현대제철이 들어서려 했던 갈사만과 금오산 두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지난 2월 하순 유치운동 단체가 발족되면서 유치하자는 쪽과 '결사 반대'하는 진영이 갈등을 빚어왔다. 핵폐기물 처리장 반대 대책위를 주도하는 하동민주청년회에 따르면, 지역 여론은 대부분 '결사 반대' 분위기이다. 전국 47개 자치단체를 대상으로 한 핵폐기물 처리장 유치 신청은 오는 6월 말 끝나는데, 5월 초순 현재 단 한 군데도 나서지 않고 있다.

 

악양에서 청학동으로 넘어가는 희남재를 지리산 순환 관광도로로 개발한다는 소식도 최근 알려졌다. '자연의 친구들' 대표 차준엽씨는 "성삼재에서 관광도로의 역기능이 여실하게 드러났는데, 희남재까지 포장한다면, 지리산은 또다시 두 동강 난다"라고 말했다. ·순환 관광도로·핵폐기물 처리장·골프장·위락시설·공장·축사·생활 오폐수. 지리산은 전방위에서 개발지상주의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서점에 <걷기 예찬>이 나와 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 사회학 교수인 다비드 르 브르통이 쓰고, 문학평론가이자 불문학자인 고려대 김화영 교수가 한국어로 옮겨 현대문학사에서 펴낸 이 책은, 걷기가 몸에 좋으니 하루에 몇 분씩은 걸어야 한다는 건강 서적이 아니다. 걷기를 통해 자기 삶의 길 위에 올라서야 한다는 길의 연금술이다.

 

 

 

베르너 비숍

 

대지는 자동차 타이어보다는 인간의 두 발을 위해 만들어졌다.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걷기를 말살하는 도시 문명을 비판하면서, 걷기에 관해 글을 쓴 동서양의 저자들과 함께 길을 떠난다. 브르통은 위대한 도보여행가들과 함께 과거로 출발하지만, 그의 도착지는 몸이다. 브르통이 보기에, 오늘날 도시인의 몸은 거의 실신 상태다.

 

 

현대 문명은 몸의 기능의 확장이다. 걷기는 자전거에서 자동차와 비행기로, 보기는 망원경에서 디지털 카메라로 진전을 거듭했다. 던지기는 활에서 총을 거쳐 미사일로 발전했고, 대화는 전화기에서 핸드폰, 인터넷으로 대체되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몸이 확장되는 사이에, 정작 몸은 급속도로 퇴화하고 있다.

 

브르통은, 인간의 조건은 이제 움직이지 않는 앉은뱅이의 조건으로 변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자아의 존재감이 감소하고 사물에 대한 인식의 폭이 협소해진다는 것이다. 이같은 역진화를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행위가 바로 걷기이다. 걷는 사람은 걷는 동안은 오직 자기 몸으로 살아 있으며, 자기 몸으로 자기 자신 혹은 세계와 교감한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주도권이 걷는 자에게 돌아온다.

 

이 책은 유럽을 도보로 횡단한 영국 젊은이 등 위대한 도보탐험가를 뒤따라가는 한편 바쇼·루소·니체·랭보·소로·카잔차키스·피에르 상소 등 느림의 아버지들과 수시로 동행하며 걷기가 일으키는 화학적 변화를 묘사한다. 그래서 간혹 걷기 혹은 길의 잠언집처럼 보인다.

 

자동차 시속과 컴퓨터 전송 속도에 민감한 속도 제일주의자가 보기에, 걷기는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 하지만 시속 100km로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바라보는 7번 국도 주변과, 반바지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거닐며 바라보는 고향의 저녁 풍경이 얼마나 다른지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걷기를 찬양하는 책 앞에서 냉정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도법·수경 스님의 탁발 순례 대장정 (시사저널)| 세상보기
해피맨*^.^*문용성 | 조회 23 |추천 0 | 2004.03.03. 13:26
도법·수경 스님의 탁발 순례 대장정 -
도법·수경 스님, ‘생명 평화’ 탁발 도보 순례…3~5년 동안 전국 돌아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리기 직전이었다. 경내에는 봄 기운이 완연했다. 실상사 앞을 흐르는 엄천강도 물이 불어나 쿵쾅거렸다. 며칠 전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났다고 했다. 지리산은 북쪽 사면까지 눈을 모두 녹여낸 뒤였다. 아침 새소리들이 윤택했다. 지리산 일대가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실상사가 성큼 봄의 안쪽으로 한 발짝 내딛고 있었다.

지난 2월26일 오전, 두 스님은 비옷이며 신발 따위를 챙기고 있었다. 도법 스님과 수경 스님. ‘전생에 부부였을 것’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절친한 사이. 눈빛만으로도 흉중을 읽는 두 도반이 길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때가 된 것이다. 도법 스님이 깨달음도 접고, 부처도 내려놓고, 수행도 포기하고 붙잡았다는 화두-생명 평화. 그 생명 평화의 문을 찾아 기어코 그 문을 열기 위해 두 스님이 길을 나서는 것이다.

3월1일 오전, 두 스님은 지리산 노고단에서 생명 평화 탁발 도보 순례의 시작을 알리는 기도를 올린 다음, 길에 올랐다. 우선 지리산 일대 1천6백리를 40여 일 동안 걷는다. 4월 하순, 탁발 순례는 물을 건너 제주도 땅을 밟는다. 제주도를 구석구석 돌고 나면 다시 뭍으로 나와 전국을 주유하는데, 짧으면 3년, 길면 5년이 걸리는 대장정이다. 두 탁발승은 걷고 걷고 또 걸어서 전국의 면 단위 땅을 모두 밟을 예정이다.

탁발은 걸식이다. 걸식은 부처 이래 두타행의 한 중심을 이루어온 수행법이다. 부처는 탁발을 통해 수행의 가장 큰 적인 교만과 아집을 없애고, 걸식을 통해 얻은 음식을 중생에게 베풀라고 가르쳤다. 초기 불교는 걸식으로 먹을 것을 해결하고, 걸식할 때에는 가난한 집과 부잣집을 가리지 말며, 하루에 한 끼만 먹으라고 일렀다.

도법 스님은 출가 초기 토굴 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탁발을 해본 경험이 없다. 반면 수경 스님은 입산 직후부터 ‘원없이’ 탁발을 했다. 1960년대 후반, 당시 열아홉 살이던 수경 스님은 서산 간월암에서 노장 스님을 모시고 살았다. 간월암에는 노장 응담 스님과 제자 수경 단둘이었다. 하지만 노장 스님은 한 끼도 발우공양을 거르지 않을 정도로 엄격했다. 노장 스님은 식량이 있는데도 어린 제자에게 탁발을 시켰다.

수경 스님에게 탁발은 부끄러움과의 싸움이었다. “처음에는 얼굴이 뜨거워 견디기 힘들었다. 사지 멀쩡한 젊은 놈이 웬 거렁뱅이 짓이냐고 야단을 치는 사람, 기독교 믿는 집이라며 문을 닫아버리는 사람, 사주 관상 봐달라는 사람 등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었다.” 간월암에서 노장을 모시고 살던 3년간, 수경 스님은 서산·홍성·해미·당진·태안 등지를 돌며 탁발했다. 쌀 소두 열 말을 지고 뻘만 7~8km를 걸어야 하는 고행을 받아들이며 자기를 비울 수 있었다.

생명 평화를 위한 탁발 순례는 지난해 11월에 끝난 도법 스님의 1000일 기도의 연장이자, 지난해 3월 말부터 6월 초까지 수경 스님이 문규현 신부와 함께한 새만금 살리기 삼보일배의 연장이다. 도법 스님의 1000일 기도는 지리산으로 상징되는 현대사의 아픔을 치유하고, 나아가 21세기 생명 평화 운동의 전망을 모색하는 데 집중했지만, 명쾌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기도 기간에 밖에서는 이라크에서 전쟁이 나고 한반도에는 전쟁 위기가 감돌았다. 생명과 생명 사이의 평화는 멀기만 했다.

수경 스님에게도 새만금 삼보일배 후유증이 있었다. 삼보일배는 단순히 새만금 간척공사를 반대하는 운동이 아니라, ‘욕심을 줄이고 자족하는’ 생태적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참회와 각성의 기도였는데, 그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경 스님은 “내 역량이 부족했다. 특히 전라북도 도민들에게 갈등의 소지를 제공했다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불교적 행위였다면, 대립을 해소하는 결과가 나왔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말, 1000일 기도와 삼보일배 후유증을 앓고 있던 두 스님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내딛자”라고 다짐했다. 수경 스님은 원효의 무애행을 현재화·대중화하자고 제안했다. 불교적 격식을 훌훌 털어버리고 대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중의 언어를 들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도법 스님도 같은 생각이었다. 스님은 지난해 말 한 신문에 발표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붙잡고 있던 모든 것을 비우고 버리는 길을 떠나볼까 싶다. 깨달음이라는 환상을 좇아온 그간의 삶을 포기할 작정이다. 훌륭한 수행자라는 허상을 좇아온 벅찬 꿈을 접기로 했다.’ 도법 스님의 글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농부도 상인도 사장도 실업자도 장관도 주정뱅이도 목사도 신부도 교무도 스님도 만날 것이다. 술집도 가정집도 관공서도 언론사도 교당도 교회도 절도 굿당도 찾아갈 것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탁발할 것이다. 밥도 빌고, 돈도 빌 것이다. 땅도 빌고, 마음도 빌 것이다.’두 스님은 ‘알리러 가는 길이 아니라 얻으러 가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미래를 위한 ‘전망과 모색’ 얻으러 가는 길

생명이 안전하고 건강하며, 더불어 사는 삶이 평화로운 세계로 가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이 탁발 순례가 힘껏 붙잡고 있는 화두이다. 도법 스님은 생명 평화 탁발 순례의 기본적 전제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라고 말한다. “행복과 불행의 주인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사회를 만들어가는 주체도 바로 자기 자신이다. 나라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도 나 자신이다. 우리 모두가 저마다 부처라는 사실을 일깨우려고 한다.”

짧게는 3년, 길게는 5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두 스님이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은 ‘좋은 뜻을 가진 사람들’만은 아니다. 지역과 직업, 남과 여, 나이, 정치적 이념, 종교 등 모든 경계를 뛰어넘어 두 스님이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생명 평화의 중요성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어제까지 도둑이었든, 좌익이었든 우익이었든, 돈 많은 사람이었든 가난한 사람이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부터 생명 평화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는 마당, 그것이 탁발 순례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보와 보수, 영남과 호남, 부자와 가난한 자, 남자와 여자가 대립하는 이른바 ‘남남 갈등’ 혹은 집단 이기주의를 풀어내는 계기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생명 평화의 길을 찾으려는 탁발 도보 순례는 겹겹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도법·수경 두 스님만이 길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천년 고찰 실상사가 21세기, 아니 새로운 천년을 내다보며 함께 길을 나서는 것이다. 이 땅에 선불교를 처음 들여온 실상사는 20세기 들어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1980년대 후반 선우도량에 이어 화엄학림을 열며 수행과 연구 풍토를 쇄신했다. 동시에 실상사는 산문의 울타리를 헐어버렸다. 작은학교·생명문화교육원·지역생태농업센터·지역복지문화센터 등 ‘실상사 공동체’로 거듭나고 있다. 실상사는 불교는 물론 한국 사회와 지구촌의 미래를 위한 ‘모색과 전망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두 스님은 ‘걸음걸음이 모두 사지(死地)’라는 경허 스님 말씀을 되새기겠다고 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죽음의 장소라면, 한 순간도 깨어 있지 않을 수 없다. 깨어 있다면 그 걸음은 죽음이 아니라 거듭남이자 살림의 걸음이다.

‘나’로 돌아가면서 동시에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길. 둘이 걷되 각자 걷고, 각자 걷되 생명 평화를 기원하는 모든 마음들과 함께 걷는 길. 탁발 도보 순례가 3월 초순, 지리산 남쪽, 구례군·용방면·구례읍·문척면·토지면으로 천천히 이어지고 있다



이문재 기자 moon@sisapress.com
[ 2004/03/11 750 호 ]

 

 

 

 함양 관광진흥 리포트 <1>
 
 [2012-10-29 오후 4:42:00]

함양 관광진흥 리포트

지금은 힐링 체험시대!

 

▲  지리산 자락길 풍경

함양 빅 4 트레일(도보여행길) 개발을 위한 提言(제언)

 

글 싣는 순서

1. 스토리텔링 강한 함양 옛길, 바로 이곳이다

2. 제산의 마음수련길 답사기 & 스토리텔링 개발방안

3. 중국진시황 불로초의 길 개발 &강원도 산소길 운영 및 웰빙 기획상품, 이렇다

4. 지리산 테마 길 이렇게 개발하자

5. 함양여행길 걸으며 힐링한다.

 

본문

 

사람들은 왜

도보여행에 열광할까?

 

# 서명숙이라는 여자가 있다. 제주 서귀포 출신. 고려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시사전문지 <시사저널> 편집장으로 일했었다. 한때 날카로운 정치분석의 글을 써 독자로부터 호평을 받았던 인물이다.

2003, 시사저널을 그만 둔 서명숙은 훌쩍 스페인 북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갔다. 이 곳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성 야고보의 유해가 있다 해서 중세 이래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고 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산티이고 출발지 프랑스 루르드에서 스페인 콤포스텔라까지 도보 순례를 하고 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세계적인 소설가 코엘료가 쓴 수필 <순례자> 무대이기도 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전 세계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인생의 교훈을 얻기 위해, 사람들과 떨어져 사색의 시간을 갖기 위해 등등 갖가지 이유로 사람들은 길을 떠난다.

 

서명숙은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길을 걸어가며 이런 생각을 했다. “내 고향 서귀포에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길처럼 아름다운 길이 있다. 귀국하면 서울생활 청산하고 내 고향으로 내려가 서귀포 길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길 못지 않은 명소로 만드리라!”

서명숙은 귀국 후 서귀포로 내려가 제주 올레길 개척에 나섰다. 서명숙이 제일 먼저 한 일. 그는 서귀포 재래시장에서 어물장수 하는 어머니를 통해 스토리텔링 있는 제주 옛길이 어디냐고 탐문했다. 어머니는 말했다. “제주 바닷가에는 깻깍이(깍아지른 절벽)가 많다. 이 깻깍이 아래에서 가부좌하고 명상하면 몸이 개운 안 하나, 바다 바람한테 약성이 있단다.

, 말이다. 이 깻깍이 아래 해안에서 전복껍대기 줍고, 그 껍데기 가루 내어 먹으면 바로 그게 모려란 건데, 위장 나쁜 사람한테 참 좋다

서명숙은 어머니 훈수를 받아 제주 옛길을 하나씩 개발, 마침내 제주올레길을 탄생시킨다. 제주올레길은 현재 트레일(도보여행 코스)의 총아로 각광받고 있다. 제주올레길 코스에 등장하는 370여개의 제주 오름이 장관이다. 지난 928일 제주올레길을 답사한 최광식 문화체육부장관은 말한다.

제주올레길을 걷다보니 절로 몸도 마음도 다 열리네요. 앞으로 우리나라에 제주올레길 같은 곳(마음 치유의 길)이 많이 등장했으면 합니다

 

함양 옛길은

문사철(文史哲)의 보고

 

# 지금 세계는 도보여행 신드롬에 빠져있다. 왜 사람들은 도보여행에 열광할까? 트레일을 하다보면 사람을 만나고 자연을 만날 수 있다. 산이나 계곡 바다를 걸을 때 (비행기나 자동차를 타고 가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함양에도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제주올레길 버금 가는, 옛길이 있다. (이 옛길들은 현재 개발되지 않은 상태다)

 

이 함양 옛길을 소개하면 한국 명리학 태두 제산 박제현 선생이 소시적, 마음수련을 하기 위해 선수련 명당터를 찾아갔던 길 중국 진시황 휘하인물 서북이 불로초로 찾기 위해 지리산을 찾았던 길 조선조 학자 김종직 남효온 김일손 조식 등이 지리산을 유람했던 길 정자문화의 메카 함양, 조선조 선비들은 함양 정자에서 어떤 풍류를 즐겼는가, 그 길을 찾아서! 등이다.

 

-제산(霽山) 박재현 선생은 경남 함양군 서상면 옥산리 출신으로써 1970년부터 2006년 사이 한국 명리학계의 전설적인 태두로 이름 높다. 살아생전 박정희 전대통령, 장덕진 전 농수산부장관,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회장, 박태준 포철 명예회장 역술 자문역을 맡았다.

서기 어린 함양 백운산 자락에서 태어난 제산은 10대 때 영통했다. 함양 백전 사는 숙천(화과원 혜원 스님 속가 부친) 문하에서 주역을 공부했고 상연대 토굴에서 한소식을 했다.

 

제산 선생은 상연대 토굴에서 네가지 감로강정법(甘露强精法)으로 심신을 수련했다.

감로강정법은 이렇게 한다.

백자진언을 일곱 번 암송. 이것을 하면 신업 악업을 정화할 수 있다(하략).

 

조선일보 조용헌 칼럼니스트 증언에 따르면 제산은 마음공부를 하기 위해 함양 백운산 계곡을 즐겨 찾았지요, 그곳에서 능엄신주를 암송함으로써 한소식을 했다 합니다. 제산이 마음공부를 했던 곳을 발굴하면 꽤 괜찮은 힐링 명상 트레일 코스로 주목받을 수 있을 겁니다

 

-조선조 때 함양에 거주하던 주목할만한 학자(조식, 김일손, 남효온 등)들이 지리산에 올랐다. 이들은 산에서 이른바 논어에 나오는 어진 이는 산을 즐기고 지혜로운 이는 물을 즐긴다(仁者樂山 智者樂水)를 터득했다. 이들은 지리산을 다녀온 후 불후의 산행기를 썼는데 그 중 남명 조식 선생의 글이 빼어나다.

다음은 조식 선생의 글이다.

 

<16. 새벽빛이 희미하게 밝아질 무렵, 섬진에 다녀왔다. 찬란한 아침해가 막 떠오르니 떵로 만경창파가 붉게 물들고 (중략) 이날 온종일 큰비가 그치지 않고 운무가 사방에 자욱하여 밖의 인간 세상과는 몇겹의 구름과 물이 가로 막혔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이처럼 지리산의 아름다움에 도취한 조식 선생은 한평생 지리산 자락 우거에서 살게 된다.

조식 선생을 비롯, 조선조 학자들이 찾았던 지리산 옛길 그 아름다움을 심층적으로 답사해볼 참이다.

 

-2011년 경남 창원 컨벤션센터. 진시황 불로초(산삼?)를 찾아서 심포지엄이 열렸다.

앞서 언급한대로 중국 진시황은 영생을 얻기 위해 휘하 인물 서북(徐北)을 한반도에 보냈다. 일설에 따르면 서북은 함양 삼봉산에 베이스 캠프를 쳤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서암정사 뒷산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뒷산이란 서암동. 마천면 추성리에 있다.

서북이 찾았던 함양 옛길 그리고 이와 관련된 스토리텔링 또 서북의 불로초길 개발가능성에 대해 취재할 참이다.

이와 더불어 함양 산양삼 테마파크 활성화를 위한 각계의 의견도 물어볼 참이다.

 

-함양은 예로부터 풍광명미하고 학문을 숭상하는 고장으로 이름높다. 많은 시인묵객들이 아름다운 건축물 누(), 정자에서 학문을 습득하고 풍류를 즐겼다. 함양군 서하면 거연정에 이런 글이 남아 있다.

 

거연정을 바위 틈에 지어 섰으니

천지가 비장(秘藏)하는 물(()로서 형체했네

예로부터 어진 분들 장이(杖履)가 머물렀고

지금토록 산수(山水)는 정령히 흐르도다

꽃피고 임무(林茂)하는 깊고 깊은 고을이고

고기들과 나는 용()이 담담한 물가더라

 

함양군청 앞 학사루에는 이런 글이 있다.

 

산수가 얽히니

도는 별천지

이 루()에 앉았으니 신선 같구나

마을에 연한 푸른 대 서늘함이 자리에 스며들고

연기 낀 장림에 어둔 그림자 잠겼으라

 

- 본지는 위에 열거한 함양의 옛길을 답사, 숨겨져 있는 이 옛길의 역사적 가치, 트레일 코스로서의 적합성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취재팀은 유성욱(여행작가, 서울특별시 관광 브리핑 제작자) 홍결(마케팅 전문가), 김영해(민속학자), 야은거사(풍수가), 최윤호(사진작가), 고영창(불교산악회장), 구본갑(주간함양 칼럼니스트) 등이다.

 

 

 

 

 

조회 수 2267 추천 수 0 2002.04.15 16:55:43
 


[제6호]1면:지리산위령제"이제는 편히 잠드소서"



한국전쟁 좌우익 희생자 합동 '지리산위령제'
범국민 범종교적 해원상생 한마당, 5월 26일 달궁

지난 5월 26일 지리산 달궁 계곡에선 "생명평화 민족화해 지리산 위령제"가 열렸다. 한국의 7대 종교계와 200여 시민단체가 참여한 이번 행사는 순수 민간차원에서 한국전쟁시 희생된 모든 영가들을 모신 위령제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4,000여명의 시민과 종교인이 참여한 이날 행사는 길놀이, 씻김굿 공연 등의 여는 행사와 봉행사, 위령제문, 천도법문, 유족분향·헌주, 소전, 합토합수제 등 본행사로 나뉘어 오후 1시부터 5시30분까지 4시간 30분에 걸쳐 진행되었다.
한국전쟁시 희생된 군인과 경찰, 민간인과 빨치산을 망라한 고혼들의 위패를 모신 이번 행사는 분단과 전쟁으로 고통받았던 현대사의 비극을 어루만지고, 지리산을 통해 너와나, 호남과 영남, 세대와 세대, 우익과 좌익, 종교와 종교, 인간과 자연 사이의 단절과 대립을 풀고 하나되기 위한 행사로 치러졌다.
이번 행사를 위해 지난 4월 2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생명평화 민족화해 지리산위령제 봉행위원회"가 발족하여 행사를 준비하였으며, 각 종교계 원로들은 물론 정대 조계종 총무원장, 김동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유병택 성균관 부관장, 박은정 참여연대 대표,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 등 각개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지리산 위령제는 당일 행사 이외에 1백일간 다채로운 행사로 이어졌다. 지난 2월 16일 "뭇생명 해원상생을 위한 지리산 천도재 입재식"을 통해 지리산 위령제를 맞이하기 위해 각 종교계와 시민단체가 준비에 들어갔으며, 실상사 도법스님을 중심으로 "범종교계 1백일 기도"가 뒤이어 지리산 위령제의 무사 진행을 위한 기원에 들어갔다.
한편, 한겨울의 눈밭을 헤치며 국토의 근간을 이루는 산줄기를 이해하고, 청정국토를 기원하는 70일간의 "백두대간 종주 대장정"이 2월 17일 천왕봉을 시작으로 덕유산, 속리산, 소백산, 태백산, 오대산, 설악산을 거쳐 4월 30일 진부령과 향로봉에 이르러 남쪽 구간을 모두 마치고 무사 귀향했다. 유난히 폭설이 많이 내려 고난의 걸음이 될 수밖에 없었던 백두대간 종주는 실상사 연관스님을 단장으로 박기성 대장의 인솔로 이루어졌다.
5월 3일 함양군 마천면 의탄초등학교에서 출정식을 가진 "지리산 850리 도보순례"는 18일까지 16일간 지리산의 둘레를 한바퀴 돌며 지리산에 살고 있는 뭇 생명들과 이웃들이 하나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었다. "지리산살리기국민행동"의 상임공동대표이신 수경스님을 단장으로 진행된 도보순례는 함양군 유림면 서주리와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에서 한국전쟁시 희생된 민간인에 대한 의령제를 가졌으며, 빗점골에서 이현상 등 빨치산에 대한 위령제를 여는 등 지리산 위령제에 이르기까지 개별 위령제를 진행했다. 또한 5개 시·군을 돌며 "운봉 골프장 반대 결의대회" 등 지역행사를 통해 지역의 단체들과 뜻을 함께 하며, 지리산의 자연환경을 지켜나가기 위한 공동연대의 장을 모색하였으며, 곳곳에서 영화상영을 통해 주민들과 만나고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밖에 50일에 한번씩 2차례 모임을 가진 "지리산 공부모임"은 향후 3년간 한국 현대사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평화와 화해를 위한 이론적인 모색에 들어갔으며, 공부모임에 대한 구체적인 위상과 성격을 규정하기 위한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범종교계와 시민단체가 앞장선 "지리산 위령제"는 5월 26일 대단원의 막을 내렸지만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다. 지리산에서 죽어간 모든 영가가 제자리로 돌아가고, 지리산에 깃든 모든 생명들이 개발과 파괴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을 찾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제공 : 시사저널 안희태>

 

 

 
이문재와의 만남 / 이홍섭
바깥의 사유, 바깥의 시
[8호] 2002년 03월 10일 (일) 이홍섭 시인
이문재 시인과의 만남은 언제나 편안하고 설렌다. 그 편안함은 그가 늘 타인에게 섬세하게 눈높이를 맞추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고, 설렘은 그의 몸짓과 말투, 목소리에서 외로운 도보 고행승을 느껴볼 수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대담을 하려고 했으나 시인은 쑥스럽다며 서면 인터뷰를 하자고 했다. 그래서 질문요지를 미리 보낸 뒤 그가 몸담고 있는 회사 부근에서 같이 밥 먹고, 차 마시고, 놀다가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정성스런 글이 도착해 있었다. 엉성한 질문과 정성스런 대답으로 이루어진 이 인터뷰를 통해 우리는 삶을 옥죄는 문명과 자본의 횡포 속에서 시쓰기의 의미와 시인됨의 자기근거를 찾아가는 한 시인의 고행을 따라가 볼 수 있을 것이다.

― 소월시문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수상소감문 제목 밑에 붙어있는 ‘어서 시로 돌아가겠습니다’라는 부제가 인상적이던데요. 혹 시인께서 원래 수상소감문 제목으로 삼았던 구절이 아니었는지요.

   
이문재 시인
그렇습니다. 늘 시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강박이 강했지요. 나는 시인은 늘 시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시 쓰는 후배들에게는 늘 시만 생각하라고 하면서도 정작 나는 시인의 직무를 유기하고 있었지요. 수상소감에서도 밝혔지만, 나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이 열리던 청주에서 수상 통고를 받았습니다. 아마 집이나, 서울에서 수상 소식을 들었다면, 그런 느낌이 덜했을 겁니다.

덧붙이자면, 시인은 시를 쓸 때만 시인이지요. 그리고 한 편의 시를 쓰고 난 순간, 어서 그 시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합니다. 지금 막 완성된 한 편의 시로부터 완벽하게 도망쳐야, 새로운 시를 쓸 수 있게 됩니다. 연극배우들은 새 배역을 맡으면, 그 역을 살아내기 위해 무진 애를 씁니다. 하지만 공연이 끝나면 맡았던 배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시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어서 시로 돌아갔다가(들어갔다가), 또 어서 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시쓰기는 몸을 상하게 합니다.

― 수상소감문에서 시인께서는 첫 시집 이후 시를 ‘반인간적 문명과 맞설 수 있는 전망 좋은 관측소’라고 여겨왔다고 하셨는데 지금도 이러한 인식에는 변함이 없는지요.

그렇습니다. 양극 체제가 무너지고, 세계가 미국 일극 지배 체제로 바뀌면서, 나의 생각―시는 반인간적 문명의 전모를 파악하는 관측소―은 더욱 굳어지고 있습니다. 세계화는 곧 미국화이고, 미국화는 지구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반생태적 문명화 과정입니다. 이제 지구에서 산다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자본주의와 무관할래야 무관할 수가 없습니다. 종교와 학문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술의 거의 모든 분야도 자본주의의 휘하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문학 가운데 시만은 자본주의와의 연관이 희박합니다. 저는 시집이 많이 팔리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내가 이른바 인기 시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이 대중문화의 시대에, 대중에게 노출된다는 것은 대중들의 입맛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나는 대중들과 거리를 둔 채, 전망 좋은 관측소에서 이 반인간적 문명의 범죄상을 지켜보고자 합니다. ‘시인과 농부’라는 음악이 있지요? 주페라는 사람이 작곡한 것으로 아는데, 나는 그 작곡가가 뛰어난 선각이라고 봐요.

지구를 과도하게 사용하면서, 결국 인간의 인간다움을 앗아가는 이 문명과 거리를 둘 수 있는 삶은 시인과, 소규모 유기농을 하는 농부밖에 없다고 봅니다. 시와 소규모 유기농 농산물은 자본주의의 네크워크에 편입되지 않습니다. 시인과 농부가 수행하는 바깥의 사유를 저는 옹호합니다.

― 시인의 최근작들을 읽을 때마다 문명의 대안, 혹은 참다운 미래를 찾으려는 힘겨운 몸짓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된 계기가 있었는지요.

   
이문재 시집
<마음의 오지>
가끔 내가 메시아 콤플렉스가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볼 정도로, 문명의 현실과 그 대안에 매달려 있습니다. 특별한 계기랄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20대 후반, 한창 직장 생활에 적응하고 있을 때, 대체 나를 위한 시간과 공간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루에, 내가 주인이 될 수 있는 시간이 채 10분도 안 되는 것 같았습니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억울했습니다. 삶이 이래도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따위의 질문을 중얼거렸습니다. 그러면서 시를 더욱 움켜쥐게 되었습니다. 그래, 내가 기댈 언덕은 시쓰기밖에 없구나. 시 밖에서, 나는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이른바 ‘느림의 시학’으로 이동했는데, 그때 내 몸이 처해 있는 현실을 곰곰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몸이 엉망이었습니다. 몸은 우선 감각인데, 감각들이 만신창이였습니다. 시각만 비대해지고(그래서 나는 시각 패권주의라는 말을 만들어서 애용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은 퇴화하다시피 했습니다.

다섯 가지 감각이 온전해야 온전한 몸이 아닐까요. 산업 문명은 다섯 가지 감각을 기형화하며 진전해온 문명입니다. 산업 문명이 고안하고 유포한 도구들을 보십시오. 모두 다섯 가지 감각과 연관됩니다. 자동차는 두 발을 퇴화시켰고,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은 시각을 이상 발달시켰습니다. 도시 생활은 후각과 미각의 기능을 현저하게 떨어뜨렸습니다. 감각에 관한 한 인간은 ‘인조인간’입니다.

이 인조인간은 전원에 플러그를 꽂아야만 생존이 가능한 ‘전기인간’이기도 합니다. 나는 감각의 복원을 통한 몸의 복원이 참다운 문명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원래 자연과 교감하기 위해 진화해온 감각들이 거대 도시에 던져지면서, 지체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감각들은 시차를 적응하지 못하고 있거나, 문화 충격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속도, 정보, 지식, 접속, 전원 따위의 개념이나 가치, 삶의 방식들이 나의 적들입니다. 나의 일상은 아직 ‘적과의 동침’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이 적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독자적인 삶을 추구할 것입니다. 자립하는 삶, 자족하는 삶, 자존하는 삶 말입니다.

― 수상소감에서도 나와 있지만 최근작들을 보면 시인께서는 참다운 미래를 ‘개인으로서의 인간과 뭇 생명’이 보호받고, 옹호되는 세계 속에서 찾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관이 시를 관념화시키고, 단순화시킬 우려도 있을 것 같은데요.

나는 디테일을 숭상합니다. 글쓰기에서 디테일을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관념이 그렇게 나쁜 것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감각과 직관에 길들여져 있는 탓인지, 관념적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때도 있습니다. 가끔 관념적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관념과 추상으로 어떤, 아주 쓸모 없는 논리를 만들어내고 싶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관념적이라는 말처럼 ‘순수’한 말이 또 어디 있을까요. 개인으로서의 인간과 뭇 생명이 보호받는 세계는 생태적 상상력이 가동되는 세계이겠지요. 다른 말로는 유토피아겠지요.

유토피아란 ‘없는 곳’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는데, 없는 곳을 지향하는 노력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가 죽음에 대하여 실체적으로 인식할 수 없듯이, 유토피아도 죽음 이후의 세계와 같은 것 아닐까요. 우리가 경험할 수 없지만, 늘 우리의 삶과 사유에 개입하고 간섭하는 존재. 언젠가 이런 시를 썼습니다. ‘내가 죽어야 내 죽음도 죽는다.’ 태어나면서 내 죽음도 함께 태어나는 것이지요. 거듭 말하지만, 나는 아주 빛나는 관념적인 시를 써보고 싶습니다.

다음은 단순화의 문제인데, 단순화도 나의 소망입니다. 단순함이 갖고 있는 힘과 영원성을 부러워합니다. 삶이나 글이나 단순할 수 없기 때문에 그토록 지리멸렬하고 장황한 것 아닐까요. 단순한 삶을 영위하며 단순한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저는 최근에 ‘지극한 인위’라는 개념을 발명해 놓고 있는데, 우리가 노장의 세례를 받아서 무위, 무위하고 있지만, 무위는 거저 멍하니 있다고 해서 찾아오는 경지가 아닐 것입니다. 지극한 인위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습니다. 지극한 인위를 통해서 단순함을 체화할 때, 무위적 상태에 닿을 수 있겠지요. 사랑이 곧 지극한 인위 아닐까요. 자기 극복이란 것도 지극한 인위겠지요. 자발적 가난, 자발적 망명도 지극한 인위의 한 구체적 장면들이겠지요.

   
필자 이홍섭
― 최근 시인이 가고자 하는 세계는 다분히 불교적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명의 폐해를 벗어날 수 있는 불교적 해답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저는 스님들은 좋아하지만 불교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저에게는 기도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래서 조계사 대웅전에 가서 절을 하며, 기도를 올려보기도 했는데, 이런, 절을 어디에다 해야 하는지, 또 속으로 어떤 문장을 만들어야 하는지 난감했습니다. 그냥 무턱대고 절을 하면서 가능하면 단순한 문장으로 기도를 올렸습니다.

내가 간절함의 전압이 높다면, 부처님이 알아들으시겠지,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불교란 이렇게 기도를 드리는 종교가 아닙니다. 스스로 깨닫는 것이지요. 그런데 스스로 정진해 깨닫기가 어디 말처럼 쉬운가요. 선원에서 스승으로부터 섬세한 가르침을 받아도 잘 안되는 게 깨달음이잖아요. 기도하는 법이 장애물이 되고 있을 때, 연극하는 선배를 만났더랬습니다. 그 선배는 기독교 신자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불교 쪽에 친화력이 있다’고 했더니, 선배가 ‘야, 그거 너무 어려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기독교는 있잖아, 무조건 하나님께 기대면 돼’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나는 아주 약해져 있을 때여서, 기독교식 기도를 올리곤 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화살기도라고 하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께 화살을 쏘듯이, 짧은 기도를 올리는 것입니다. 다시 불교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지구를 생각하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불교적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화엄경이 무엇입니까. 우주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아닙니까. 저 돌, 저 풀 한 포기, 저 물 한 방울이 다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면, 함부로 대할 수 없겠지요. 불교는 생태적 종교입니다. 그리고 불교는 인식의 문제가 아니고 실천의 문제입니다.

― 수상작 중 하나인 〈지구의 가을〉은 지리산 실상사의 공양게송으로 시작됩니다. 실상사와의 인연은 오래되었는지요.

1992년 가을, 선우도량 1주년 때 실상사에 처음 가 봤습니다. 그리고 1994년 조계종이 개혁한다고 몸살을 앓을 때, 실상사에서 올라오신 도법 스님을 서울에서 한두 번 뵌 적이 있습니다. 지난해 봄부터 가을까지 실상사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초파일 직전에 도법 스님을 인터뷰하러 갔다가, 5월 초부터 17일간 수경 스님을 따라서 지리산 850리 도보 순례에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해인사 청동대불 조성사업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면서 또 실상사를 출입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내 직업(기자)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나는 지난해 봄과 여름이, 내 개인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몸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수경 스님이라는 선승을 보름 넘게 따라다녔다는 것은 실로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실상사 공양간에 걸린 공양게송으로 문학상까지 받게 되었으니, 실상사와 나와의 인연은 결코 작달 수 없지요. 요즘도 마음은 자주 실상사에 다녀옵니다.

― 잡지사 기자와 《문학동네》 주간을 거쳐 현재는 〈시사저널〉 편집위원으로 재직중인데요. 혹 이러한 직업의식이 시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닌지요.

직업의식이란 것이 내게 있을까요? 시인의식이 부족하듯이 직업의식도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기자라면, 좀 날카로운 구석이 있어야 하는데, 보시다시피 이렇게 멍청한 얼굴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면서 시인과 기자 사이에 엄격한 구분을 두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기자란 직업이 고약스러운 데가 있지요. 빙산의 일각인 세상의 모난 데만을 보려고 합니다.

나는 기사를 써서 먹고사는 월급쟁이이지만, 성공한 직업인은 못됩니다. 우리 회사 사장님이나 선후배들이 들으면 언짢아할 이야기지만, 나는 기자를 그만두었을 때, 기자라는 직업에 대해 정말 미련이 남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직업의식이 시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면, 벌써 그만두었을지 모릅니다. 아니, 직업의식이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도, 내가 아둔해서 자각증세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벌써 18년째인데, 비교적 적성이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내가 좀 산만한 성격인데다, 어디 한 군데 오래 앉아 있질 못하고 떠돌아다니기를 좋아합니다. 아마 기자가 되지 못했다면, 화물 트럭을 운전했을지도 모릅니다. 한때, 대륙을 횡단하는 화물 트럭 운전사를 꿈꾸기도 했습니다.

― 시인께서는 문학적 자전에서 문학청년시절 소설가 박상륭과 시인 김종삼을 좋아했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점이 영향을 미쳤는지요.

박상륭 선생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여기저기 하도 많이 써서, 다시 말씀드리기가 새삼스럽네요. 시가 잘 써지지 않을 때는 선생의 소설을 꺼내들고 아무 데나 읽습니다. 그러다 보면, 내 마음 속에서 어떤 말들이 꿈틀거립니다. 1990년대 후반, 선생께서 귀국하신 다음에는, 상계동이며 광화문이며 선생님 댁에 마구 쳐들어 가서 ‘행패’를 많이 부렸습니다. 반듯한 ‘시민’들이 사는 캐나다에서 사시다가, 지나치게 역동적인 ‘백성’들이 사는 서울로 돌아오셨을 때, 불편함이 많으셨을 텐데, 선생께서는 한 번도 궂은 표정을 짓지 않으셨습니다.

소설도 소설이지만, 선생께는 어떤 거인의 풍모가 있습니다. 우주적 상상력, 유장한 문체, 종교와 신화, 인간에 대한 엄청난 지식, 글쓰기에 바치는 무서울 정도의 집중과 정성…… 많이 배우고 있는데, 배운 것을 육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지요. 김종삼 선생은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선생의 시를 떠올릴 때마다 언젠가 만난 적이 있다는 기시감이 듭니다. 언어 경제라는 말이 있지요?

김종삼 선생으로부터는 그 깐깐한 언어 경제에서 비롯되는 인간에 대한 연민 같은 것을 배웠다고나 할까요? 박상륭 선생이나 김종삼 선생은 문학의 지향이나 그 방법, 표정들이 매우 다름에도 불구하고 수도자적 면모가 있습니다. 프랑스 속담에 이런 것이 있답니다. ‘은혜는 돌에다 새겨라.’ 그만큼 은혜는 잊기 쉽다는 것이지요. 은혜를 갚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지요. 두 분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문학적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큰 숙제입니다.

― 시인께서는 연배로 보아 현재 문단의 허리에 해당합니다. 앞 세대 시인들과 시인 세대의 차이점은, 그리고 시인 세대와 후배 세대와의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30대 후반 어느 날, 내가 갑자기 선배가 되어 있음을 알고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그 무렵, 어느 시 월간지에 시를 발표했는데, 표지에 수록 시인들이 등단 순서대로 실리잖아요. 한 20여 명이었던 것 같은데, 글쎄, 내가 맨 앞에서 두번째인 거예요. 깜짝 놀랐습니다. 나는 평생 선배가 되리라는 생각을 안 하고 살아왔던 겁니다. 늘 선배들만 따라다녔지요. 특히 김훈 선배는 문학뿐 아니라 직업적으로도 선배여서, 그 정도가 심했습니다.

술이 고프거나, 갑자기 돈이 필요할 때, 자랑을 하고 싶을 때, 또는 고민을 털어놓을 때 선배를 찾아갔습니다. 선배들은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다 받아주었습니다. 나는 선배는 으레 그런 줄 알았습니다. 새벽 네 시에 전화를 걸어도, 우리의 선배들은 다 받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내 밑에 후배들이 자욱해져 있는데, 아, 나는 그들에게 선배가 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몸이 힘들어 죽겠는데, 갑자기 사무실로 찾아오는 후배들이 원수처럼 보이는 거예요. 새벽에 전화질하는 후배는 쫓아가서 따귀라도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아, 나는 정말 선배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내가 막내 후배일 때에 견주면, 내 후배들은 잘 모이지도 않고, 모여도 술도 잘 마시지 않는 편입니다. 어떤 단절감까지 느낍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선배들에게 문학은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치열한 작가정신을 갖고 있으면서도 여유가 있었습니다. 악착같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문단은 다른 예술계에 견주어 따뜻하고 깨끗했습니다. 그런데 후배들은 이른바 ‘멋’이 없습니다. 예술가적 풍모가 엿보이지 않을 때가 많아요. 시인·작가를 전문인이라고 스스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요. 소설가는 잘 모르겠지만, 시인은 바보입니다. 어리숙한 존재입니다. 영악한 시인은 논리적 모순이에요. 이것저것 다 따지다가 언제 존재의 뒷켠을 보겠습니까. 주류에 적응하려고 애쓰다 보면, 낮고 작고 하찮고 사소한 것들에 관심을 두겠습니까. 바깥의 사유란 바보의 사유입니다.

― 비평가들은 문학의 시대가 갔다고 하는데, 최근 문학잡지는 꾸준히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문학잡지가 느는 까닭은 소위 출판 자본의 크기가 예전에 비해 커지고, 또 다양해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문학 인구, 특히 평론가들이 많아진 것도 한 원인일 것입니다. 군사 정권 시기에 비해 민주화가 조금 진전되었다는 것도 배경이 되겠네요. 문예창작학과가 급증한 것도 이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필자를 확보하고 신인을 배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문학지의 양적 증가가 큰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몇 개 계간지와 월간지를 제외하면, 거의 동인지 수준 아닙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문학의 시대와 문학지 창간 붐은 함수 관계가 없다고 봅니다. 지면을 염두에 두지 않고, 묵묵히 시를 쓰는 시인이 있겠지요. 마음에 드는 시 한 편을 썼을 때, 가까운 문우에게 전화를 걸어 막 태어난 시를 나지막하게 읽어주는 시인이 있겠지요. 어쩌다 읽은 시가 너무 좋아서, 밤길을 달려 그 시를 쓴 시인을 찾아가 맑은 술 한잔을 나누는 시인이 있겠지요. 요즘은 이메일로 좋은 시를 전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문학지에 너무 민감한 것은 시나 시인을 위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대로 된 시인이라면 문학지에 무심하겠지요.

― 시인께서 발표하신 산문들을 읽어보면 독서경험이 폭넓고, 앎에 대한 욕구가 대단하구나라고 느끼게 됩니다. 앞으로 특별히 더 깊게 공부하고 싶은 분야가 있으신지요.

올해가 소월 탄생 100주년, 정지용 탄생 100주년입니다. 소월과 지용이 태어나면서 한국 현대시가 태어난 것이지요. 소월과 지용 탄생 100주년 앞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우리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아버지는 1909년에 태어나셔서 1989년에 돌아가셨습니다. 한국 현대시사가 내 아버지의 생애와 겹쳐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 현대시의 역사가 결코 길다고 볼 수 없는 것이지요. 최근 정민 교수의 글을 읽다가, 다시 아버지의 생애가 떠올랐습니다. 정민 교수의 문제의식은, 5천년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어떻게 한국 현대시사는 고작 100년밖에 안 되는가, 한국시의 역사를 향가까지 끌어올릴 수는 없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담겨 있습니다. 갑오경장 이전의 한국문학과 100년밖에 안 된 ‘현대문학’을 연결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라고 정교수는 말합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을 격리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현대문학보다 우리 고전문학의 콘텐츠가 더 풍부한 것은 아닐까요? 내 아버지 말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 않을까요? 불경 공부와 함께 한시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 우문 같습니다만, 혹 다시 태어나도 시를 쓰시겠는지요. 아니면 다른 것을 해보고 싶으신지요.

시를 쓰는 사람이기보다는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시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내 일상적 삶이 좋은 시와 더불어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시 태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만, 나는 아마 이번 생에서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다시 태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농부거나 산림 간수, 도보 고행승 같은 것을 해보고 싶습니다.■

 

 

 
2013년 05월 23일 (목) 17:55
세상에 희망을!,마음에 행복을!

지리산 실상사에서 등불 켜기

실상사는 실상(實相)을 보는 사찰이다. 실상은 불교에서 이르는 모든 존재의 참된 본성. 또는 진여(眞如) ·법성(法性)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물질만능주의, 힘의 논리, 생명 경시의 천박한 자본주의 풍토를 거부하고 생명평화공동체를 통해 새로운 대안을 찾으려는 도법스님(실상사 회주)이 계신 실상사에서 연등불 켜기에 참여를 해 봤다.

사진은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있는 모든 존재의 참된 본성을 일깨워 주는 실상사에서 등불 켜기 행사장의 모습  ⓒ대한뉴스

모든 존재의 참된 본성을 일깨워 주는 실상사는 도법 스님의 생명평화운동의 실천현장이다. 그 속에는 생명평화가 깃들어 있다. 인드라망의 세계관이 스며있다. 낙동강 1300 리 도보순례, 지리산 850 리 도보순례를 결의했던 곳도, 5년 동안 진행된 생명평화탁발순례의 모태도 실상사이다.

사진은 환히 밝힌 등불 이라는 뜻으로, 어두운 세상에 밝은 빛을 비추고 깨달음을 얻고자하는 소원이 담겨있는 연등의 모습 ⓒ대한뉴스

 

 

 

 

 

 

2557(2013년) 부처님 오신 날,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있는 천년 고찰 실상사에서 산천은 새소리, 바람소리, 초목의 푸른 빛, 그리고 형형색색의 꽃들이 오늘을 찬탄하고 있을 때 우리 모두 지극한 정성으로" 세상에 희망과 마음에 행복을" 축원하자는 봉축 법요식과 문화제가 열렸다.

 

실상사는 여느 사찰과는 다르다. 마을과 이웃하고, 앞에는 들판이 펼쳐져있다. 천년사찰 실상사는 구산선문 최초의 가람으로 선풍의 발상지였다. 신라 흥덕왕(828년) 증각대사 홍척이 창건했다. 선풍을 일으키며 번창했던 실상사는 조선 세조(1468) 때 불에 타 전소됐다. 그 후 숙종, 순조, 고종 때 중건했다. 1883년 유생들이 불을 질러 모든 전각이 타버렸고, 이듬해 보광전 등 10여 채만을 중건했다. 그래도 전남 도내 단일 사찰로는 가장 많은 보물이 있다. 백장암 삼층석탑, 수철화상능가보월탑,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 석등, 부도, 삼층쌍탑, 증각대사응료탑, 증각대사응료탑비, 백장암석 등, 철제여래좌상등을 볼 수 있다.

사진은 2557(2013년) 부처님 오신 날, 실상사에서 대한불교조계종의 "세상에 희망을, 마음에 행복을 축원하는 연등불 켜기, 오후 7시 저녁예불의 모습 ⓒ대한뉴스

 

 

 

 

 

 

이날 오후 7시 저녁예불 연등불 켜기, 연등행열이 시작됐다. 연등(燃燈)은 '환히 밝힌 등불'이라는 뜻으로, 어두운 세상에 밝은 빛을 비추고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소원이 담겨있다. 통일 신라 시대 때부터 이어오던 우리나라의 전통 문화로, 고려 시대 때에는 연등회나 팔관회 같은 큰 연등 행사를 열어 복을 빌고 축제처럼 즐겼고, 온 나라가 집집마다 등을 달아 부처를 공양하고, 나라의 태평을 빌었다. 처음에는 음력 정월 보름에 하다가 지금의 사월 초파일(음력 4월 8일)로 바뀌었다.

사진은 응묵 스님이 마음의 등불을 밝히는 것이고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의 등불을 지상에 널리 알리는 등불을 밝히는 이유를 설명하는 모습  ⓒ대한뉴스

이날 실상사에서 연등불 켜기에 대해 응묵 스님은 "등불은 내 자신이 밝히는 것이 아니죠. 내가 등불을 밝히면 세상이 환해지듯이 내 주변과 이웃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처님에 어떤 가피도 있고, 또 개인적으로 바라다보면 지난날 어제라도 지난 과거를 살아오면서 참회하는 마음도 가지고, 또 참회를 바탕으로서 새로운 자기 서원과 원력을 가지는 그런 등불이기도하지요"라고 말했다.

사진은 아이들이 이웃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희망이 넘치고 저마다의 마음에 따뜻한 평화가 깃들 은 축원을 원하는 모습 ⓒ대한뉴스

 

 

 

2557(2013년) 부처님 오신 날,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은 "세상에 희망을, 마음에 행복"의봉축사가 있었다. "모든 이웃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희망이 넘치고 저마다의 마음에 따뜻한 평화가 깃들기를 축원합니다. 부처님 오신 날! 우리 모두는 깊은 성찰과 지혜의 눈으로 이 시대에 부처님이 오신 뜻을 새긴다"는 축원을 올리는 글을 소개해 본다.

 

 

 

 

 

 

사진은 점등을 하고 세상에 희망을 축원하는 아버지와 딸의 연등행열과 탑돌이 하는 모습 ⓒ대한뉴스

세상에 희망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은 이 땅에 좋은 세상 가꾸기를 꿈꾸는 불자들에게 "오늘 부처님 오신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으뜸으로 받들어야 할 가치는 바로 공동체의식이며 서로가 의지하며 평화와 행복을 이루는 상생의 세계가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이웃의 도움과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하늘이 있어 땅이 있고 땅이 있어 하늘이 있습니다. 물과 바람과 흙의 도움으로 만물이 생장합니다. 농부와 노동자의 땀과 정성이 있기에 사람은 밥을 먹고 아름다운 정신의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사진은 마음의 문을 열고 따뜻한 손을 잡고 살아가는 아버지와 딸이 마음에 행복을 축원하며 연등행열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 ⓒ대한뉴스

 

 

 

 

 

 

 

 

 

 

 

마음에 행복을!

 

자승은 마음의 문을 열고 따뜻한 손을 잡고 살아가는 국민들에게 우리 국민과 인류가 나아가야 할 길이 이와 같이 분명하지만, 오늘의 우리 사회는 우울하고 미래는 불투명합니다. 자연생태의 재앙이 생명을 위협하고, 야만적인 전쟁이 지구촌의 평화를 위협하고, 분단의 장기화가 민족공동체를 위협하고, 양극화가 사회공동체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한반도가 전쟁의 위협에 또다시 놓였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발원합니다. 탐욕과 증오를 내려놓고, 편견과 차별을 내려놓고, 멈추어 서서 다시 바라볼 것을 염원합니다. 그리하여 연대와 협력의 손을 잡고 평화와 행복의 길에 동행합시다.

 

이웃을 부처로 모시는 일이 삶의 현장에서 구현되기를 발원합니다. 농민이 논밭에서 호미와 괭이를 잡는 세상을, 빈민과 노동자가 거리에 나앉고 일터에서 쫓겨나는 일이 없는 세상을, 아이들이 친구와 우정을 나누고 가정에서 크게 웃는 세상을, 청년들이 냉혹한 삶의 전쟁터에서 불안에 떠는 일이 없는 세상을, 짐이 된 노인들이 쓸쓸히 석양을 바라보는 일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일에 국정의 지도자, 지식인, 종교인 모두가 힘을 모으기를 희망합니다.

 

 

당신과 나는 하나

 

실상사가 처음 이곳에 자리할 때는 그야말로 심산유곡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곳이 부처님의 품을 찾아든 사람들로 마을이 이루어지고 그들을 위한 논밭이 만들어지다 보니 오늘과 같은 모습이 되었고, 절은 출재가의 대중이 함께 모여‘사부대중공동체’를 이루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사부대중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실상사가 안아야 하는 사부대중공동체 가족도 많아졌고, 부처님의 가르침과 시대정신을 구하여 실상사를 찾아주시는 분들도 늘어났으며, 지역사회와 사찰의 관계도 함께 고민해야하는 과제도 있다.

당신과 나는 이것을 바로 우리가 이루어내야 할 역사이며 세상에 희망을!,마음에 행복을! 만들어가는 우리들이 꿈꾸는 세상 ⓒ대한뉴스

 

당신과 나는 하나이고, 중생을 떠난 부처는 없으며 고통의 사바세계를 제도함이 바로 정토세계를 구현하는 일이라면 당신과 나는 이것을 바로 우리가 이루어내야 할 역사이며 세상에 희망을!,마음에 행복을! 만들어가는 우리들이 꿈꾸는 세상입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은 연대와 협력의 손을 잡고 평화와 행복의 길에 동행하자며 "생명이여! 자유로 우소서, 평화로우소서, 행복하소서"를 축원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생태불사, 인간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공동체 불사를 만들어가는 도법스님(실상사 회주)은 물질만능주의, 힘의 논리, 생명 경시의 천박한 자본주의 풍토를 거부하고 생명평화공동체를 통해 새로운 대안을 찾으려하고 있다.

사진은 인간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공동체 불사에서 등불 켜기 행사는 당신과 나는 하나라는 것을 체험한 현장의 모습 ⓒ대한뉴스

응묵 스님은 우리들이 등불을 켜는 이유는 “마음의 등불을 켜는 것이고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의 등불을 지상에 널리 밝히기 위해서이지만, 신도들의 개개인마다 다 틀리겠지만, 우리 신도들은 10 년 동안 등불을 밝힌 수입금으로 사회에 환원하는 시스템과 지원을 하고 있다.

 

등불을 켜서 들어오는 수익은 불교계에서 하고 있는 지구촌공생이라는 엔지오 단체가 있고, 제3세계 나라에 우물을 파거나, 학교를 짓는 일부 쓰이고, 실상사 주변에 있는 불의 이웃 소외계층에 쓰이고 있다.

 

이 등불 켜기 행사는 주는 이도 받는 이도 복이 오는 상생의 길이며 나를 위해 밝힌 등이 이웃을 위한한 등을 밝히고 있다. 당신과 나는 하나라는 것을 체험하게 한 현장이었다.

 

 

 

한청관 기자

 

 

 

< 2002.05.28 12:01 / 조회수:97 >

한국 불교, 너무 귀족적이다

불교환경연대 상임대표 수경 스님

 

[출처: 시사저널]

 

 

 

사패산 입구 움막 도량.수경 스님은 이곳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화두로 삼아 정진하고 있다.

 

 

터널 공사를 반대하는 현수막이나 연등이 걸리지 않았다면, 영락없는 난민촌이었다. 국내에서 가장 작은 사찰. 지난해 11월 말, 북한산 회룡사 비구니 스님들이 천막을 친 이래, 지금까지 모두 네 채의 움막이 들어섰다. 최근에는 망루까지 세웠다.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교현리, 북한산 국립공원 사패산 입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서 남양주시 별내면에 이르는 서울외곽순환도로(총 길이 36.3km)가 북한산 국립공원 서북 사면을 관통하는 사패 터널(길이 4.6km) 진출입구 공사 예정지이다.

 

불교환경연대 상임대표 수경 스님은 지난 36일부터 이곳 움막을 선원으로 삼고 있다. 부처님오신날을 8일 앞둔 지난 511일 토요일 오전. 구둘이 울퉁불퉁한, 한 평 남짓한 움막에서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고 있는 수경 스님은 사패 터널 반대 운동은 불교계 내부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들 삶의 방식을 개선하기 위한 운동의 출발점이다라고 말했다.

 

움막에서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는 심경이 남다를 것 같다.

 

지금 이 현장에 부처님이 계시다면,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실까라는 생각에 몰두하고 있다. 불교적 방식으로 이 문제를 풀어 가는 것이 내 화두이다. (스님은 1966년 수덕사로 출가한 이래, 30년 넘게 선방에서 정진해온, 조계종의 대표적 선승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90년 이후 실상사에서 수행해온 수경 스님은, 2년 전 실상사 주지 도법 스님의 권유로 환경운동에 투신해, 낙동강 살리기 도보 순례와 지리산 위령제를 추진했고, 새만금 간척사업 반대 운동에도 참여했다. 지난해 6월에는 해인사 청동 대불 조성 계획을 정면 비판한 뒤, 도법·연관 스님 등 실상사 스님들과 21일 참회 단식 기도를 올린 바 있다).

 

불교계 내부의 인식은 어떤가?

 

예전보다 나아졌지만 아직도 문제를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구체적인 피해가 생기니까 반대하고 나선다면, 설령 그 사안이 해결됐다 하더라도 큰 의미가 없다. 근본적인 변화는 오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이 하나라는 동체대비를 구현해야 한다. 생명을 중심 가치로 두는 삶으로 전환해야 한다.

 

건설회사 담당자나 정부 당국자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혹시 분노를 느낀 적은 없는가?

 

자연과 내가 둘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LG건설 담당자나 정부 정책 입안자들이 적으로 보일 때가 있어 내가 깜짝깜짝 놀란다. 화 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내가 화를 내는 것은 그들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내가 탐진치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이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근원적으로 해결되는 상태란 어떤 상태인가?

 

사안만 놓고 보면 북한산 국립공원을 우회하는 대안 노선을 관철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모두 우리들 삶의 방식이 잘못됐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폭넓게 보면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의 생활이 변화해야 근본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불교환경연대는 공사중지 가처분 신청과 함께 도로 구역 결정을 취소하라는 법정 싸움을 벌이고 있다. 한편, 정부 당국자와 환경단체 전문가가 모여 국립공원 관통 구간을 원점에서 다시 심의하고 있다.)

 

불교와 생명운동은 본래부터 사상적으로 상당히 밀접해 있는데.

 

연기론이 바로 생명론이다. 우주 전체가 한 생명이라는 화엄 사상을 능가하는 생명 사상은 찾아보기 힘들다.

 

 

 

시사저널 이상철

 

 

하지만 한국 불교가 환경운동에 관심을 보인 것은 최근의 일이다.

 

수행과 전법을 올바르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행과 전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불교와 현실 사이에 거리가 생겼다. 수행과 전법에 전념한다면, 그것이 곧 생명운동이고 불교의 사회화이다.

 

자발적 가난이 환경운동의 관건으로 등장해 있다. 불가에 좋은 전통이 있지 않은가?

 

옛 스님들은 무소유를 철저하게 실천하셨다. 바리때와 옷 두 벌이 들어가는 걸망 하나가 전재산이었다. 입산한 직후, 밥을 짓다가 쌀 몇 톨과 콩나물 대가리 몇 개를 흘린 적이 있다. 그때 벽초 스님께서 다가와 수챗구멍에 있는 쌀과 콩나물을 바구니에 주워 담아 물에 한번 헹구고는 그 자리에서 드셨다.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리고는 사흘 후, 나를 불러 내려가라, 넌 자격이 없다라고 하셨다. 쌀 한 톨에 들어 있는 우주를 보지 못한다면, 수행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해인사 청동 대불 조성 문제는 그후 어떻게 되었나?

 

문화재청에서 승인이 났지만, 해인사측이 아직 공식 발표를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안다. 부처님을 크게 만들어서 불교를 표현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한국 불교는 귀족 불교다.

 

귀족 불교라니?

 

스님들 의식도 그렇고, 생활도 귀족적이다. 구조 조정 해야 할 데가 바로 불교계다. 선원에도 물질이 너무 풍요하다. 이 문명으로부터 탈피해서 가능하면 원시적으로 자급 자족하며 수행 정진해야 한국 불교는 되살아난다.

 

교계 내부 문제를 너무 드러내는 것 아닌가라는 비판이 있는데.

 

드러내는 게 아니다. 이미 다 드러나 있다. 부처님이 지금 여기 계신다면, 이런 형태로 사찰을 운영하실까? 스님들이 돈을 만지는 한 불교계의 변화는 불가능하다. 스님들은 수행과 전법에 힘쓰고, 나머지는 다 재가 불자들에게 맡겨야 한다. 귀족으로 살면서 사회적 역할은 외면하는 스님들, 정신차려야 한다. 법복을 입은 비구니가 폭행을 당하고(지난 218, LG건설 인부들이 움막에서 농성하던 비구니 스님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조계사 법당에 공권력이 들어가고, 북한산의 천년 고찰이 훼손되는데도 모르쇠하고 있다. 수모를 당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다. 자업 자득이다. 이번 기회에 참회하고, 진정한 수행자로 돌아가야 한다.

 

오는 515일 종교계·학계·문화예술계와 시민·환경 단체 인사들이 참여해 북한산 국립공원 살리기 2002인 선언을 채택한다. 지난해 지리산 위령제에서 촉발된 종교간 대화가 성숙해, 시민·환경 단체와 손잡고 생명운동의 새로운 대안을 창출하려는 것이다.

 

스님은 올 하안거(음력 415~715) 때 사패산 입구 움막에 시민선방을 개설한다. 물질주의에 물든 삶의 방식을 반성하고, 생명 가치를 중심에 두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문재 편집위원 moon@sisapress.com


 

 

 

인터뷰
[지리산도보순례 : 제4신] '지리산 빨치산 토벌 전시관'에서(5월8일~9일)
기사입력시간 [603호] 2001.05.17  (목) 이문재 취재부장 | moon@sisapress.com  

'지리산을 그대로 놔두라'. 순례단이 출발할 때마다 외치는 구호다. 산청에서 하동으로 향하는 길. 지리산은 신음하고 있다.단 하루도 포크레인이나 덤프 트럭과 마주치지 않은 날이 없다. 몇몇 부상자들이 발생했지만,순례는 순항 중이다. 대열은 천왕봉을 중심으로4시에서 6시 방향으로 내려가고 있다.

 

   
 
ⓒ시사저널 안희태
'우리는 같은 민족' : 빨치산 토벌 전시관 외부에 전시된 조각품. 아직도 냉전논리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다.
 
5월8일 아침, 비가 그쳐 있다. 하지만 천왕봉은 보이지 않는다. 운무에 가려져 있다. 산 아래, 인간들이 저지르고 있는 탐욕스런 작태들이 보기 싫었던 것일까.

 

외공마을 '피의 골짜기'에서 맞은 비가 마르지 않는다. 젖은 옷과 신발은 밤새 말랐지만, 대원들의 표정은 젖어 있다. 50년 째 '무명 묘지'로 남아 있는 밤나무밭을 두 발로 밟고 온 느낌이 생생한 것이다.

오전 8시, 순례 행렬에서 이탈해 중산리 버스 종점 옆에 세워진 '지리산 빨치산 토벌 전시관'을 찾았다. 취재팀과 동행한 서봉석 군의원은 "당초에는 '지리산 평화의 집'이라고 명명하려 했는데, 토벌 전시관이 되고 말았다. 남북 정상이 만나 평화를 논의하는 마당에, 공비 토벌을 기념하다니,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예상과 달리 전시관 건물은 아담한 2층 건물이었다. 2년 전 다른 용도로 지었던 것을 전시 공간으로 바꾼 것이다. 입구에는 장갑차와 탱크, 경비행기 등 한국전쟁 당시 국군이 사용하던 무기가 전시되어 있고, 그 주위에 빨치산 토벌 장면을 비롯한 조형물(테마 조각)과 시비가 세워져 있다. 전시관 뒤에는 빨치산이 은거하던 아지트와 1963년 11월, 최후의 빨치산(정순덕)이 생포됐던 내원골 민가(구들장 아지트)가 실물 크기로 복원돼 있다.

 

   
 
ⓒ시사저널 안희태
'안보교육' : 토벌전시관은 남북화해시대라는 큰 흐름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
 
빨치산 토벌 전시관은 전쟁박물관을 떠올리게 한다. 몇 년 전, 서울 용산에 전쟁박물관이 세워질 때 찬반 양론이 분분했다. 그 중에서 '우리가 기념할 만한 전쟁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염원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목소리가 높았던 기억이 난다.

 

토벌 전시관은 전형적인 대립 논리의 결과물이다. 아군과 적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같은 대립 논리로는 더불어 살아가는 상생의 문명을 일구어낼 수 없다. 대립의 논리는 승패의 악순환을 되풀이할 따름이다. 지배와 전복의 악순환. 상처가 치유되기는커녕, 상처는 또다른 상처를낳는다. 대립의 논리에서 완전한 승리는 없다. 승자의 자리가 바뀔 뿐이다.

대립의 논리에서 보기에 '지리산 위령제'를 불필요하다. 이쪽은 선이고 저쪽은 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생명은 하나라는 상생의 논리에서 보면, 국군이나 빨치산은 다 같은 피해자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뭇생명의 상생을 희원하는 지리산 위령제 기간에 개관한 빨치산 토벌 전시관이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다.

'전쟁-고통-상처-화합'으로 이루어진 테마 조각 가운데에는 국군이 개머리판으로 인민군을 가격하려는 순간을 조각한 '작품'이 있는데 그 제목이 <우리는 같은 민족>이다. 그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작품 설명'이 붙어 있다.

'서로 다른 이념, 그리고 전쟁. 그로 인한 고통과 상처... 그 참혹한 비극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전쟁, 고통, 상처, 그리고 화합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조각상 앞에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되는가'

 

   
 
ⓒ시사저널 안희태
냉전논리 벗어나야 : 서봉석의원은 전시관이 지나치게 토벌대의 시각에 치우쳐 있다고 지적한다.
 
시비 앞에서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신동엽 시인의 <봄은>과 나태주 시인의 <강강수월래>가 나란히 새겨져 있었다. 신동엽 시인과 나태주 시인의 시가 어떻게 '빨치산 토벌 전시관' 과 어울리게 된 것일까, 의아했다. 신동엽 시인의 시 <봄은>에서 한민족이 녹여버려야 할 '미움의 쇠붙이'는 곧 외세와 이념일 터였다. 나태주 시인의 시 <강강수월래> 또한 남과 북이 서로 얼싸안고 강강수월래를 추는 그날을 열망하는 통일의 시이다. 두 시는 오히려 지리산 위령제에 적합한 시이지, '빨치산 토벌을 기념하는' 전시관과는 어울리기 힘든 시다.

 

서봉석의원은 전시관 1층 '역사실'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도 부적절하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1948년 '여순 사건'을 일방적으로 '반란'이라고 규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당시 군인들이 진압을 거부한 제주 4·3 사건은, 특별법이 제정되고 위령제가 거행되고 있는데, 지금 그 군인들을 '좌익'으로 보는 것은 낡은 냉전 논리라는 것이다.

오전 10시. 인근 중학교 학생들이 단체 관람을 하러 왔다. 한 학생이 "빨치산, 아주 나쁜 놈들이데요"라고 말했다. 아마 그 어린 중학생은 이곳 출신이 아니거나, 할아버지나 부모로부터 '그때 이야기'를 아직 듣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학생들은 <휘파람> <반갑습니다> 따위의 북한 노래를 거리낌없이 불러댔다.

지리산 빨치산 토벌전시관 앞에서 냉전 논리는 아직도 엄연했다.


길 위에서 맞은 어버이날

순례 3일 째부터 부상자가 발생하더니, 오늘(5월8일)에는 첫 낙오자가 생겼다. 시인 권천학씨(58)가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는 바람에 지원팀 자동차 신세를 졌다. 발바닥 물집 치료법을 두고 의견이 둘로 나뉘었다. 물집을 터뜨려야 한다는 쪽과 그대로 둬야 한다는 쪽. 한 대원은 그저께 물집을 터뜨렸고, 한 여성 대원은 터뜨리는 대신 양말에 쑥을 넣고 걸었다.

이틀이 지나자 두 대원 모두 '쌩쌩'했다. 어제,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며 걷고 나서인지, 모두들 걷기에 자신감이 붙은 모양이다.

외공마을에서 내려와 산청군을 벗어난다. 하동군 옥종면 월횡리. 티타늄 광산 시추지에서 야영한다.

길 위에서도 어버이날은 어버이날이었다. 2.5t 트럭으로 대형 천막이며 취사 도구, 대원들의 커다란 배낭 등을 운반하는 지원팀 응묵 스님(실상사)과 안준환 지원팀장이 어디선가 카네이션을 구해온 것이다. 순례단 막내 송정희씨(원광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가 단장 수경스님 왼쪽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드렸다.

스님은 전혀 예상을 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쑥스러워 했다. 하지만 이내 "평생 카네이션은 처음 받아보네"라며 환하게 웃었다. 대원들은 손뼉을 치면서, 저마다 두고온(혹은 돌아가신) 부모와, 두고온 어린 자녀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오늘 구간에 참여한 진주 환경운동연합 김석봉 사무국장의 강연이 있었다.

새벽녘에, 먹구름 사이로 보름달이 얼핏 나타나곤 했다.

5월8~9일 지리산도보순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