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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천마리학 2016. 8. 29. 03:09

 

 

500명 규모… 양국 왕래에 약 8개월 걸려

입력 : 2015.10.29 03:00

[新조선통신사] 조선통신사 어떻게 운영됐나

조선통신사는 조선시대에 국왕이 일본의 막부(幕府) 최고권력자인 쇼군(將軍)에게 보낸 외교사절이다. 조선이 1403년(태종 3년) 명나라로부터 책봉받고 이듬해 일본의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 쇼군도 책봉받자 두 나라는 대등한 교린국(交隣國)이 됐다. 일본 쇼군이 조선에 파견한 외교사절은 일본국왕사(國王使)라고 했다.

일본 고베시립박물관이 소장한 ‘조선통신사래조도(來朝圖)’. 쇼군이 있던 에도(지금의 도쿄)에 도착한 조선통신사 일행이 국서(國書) 봉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모습을 담았다. 부산박물관이 12월 6일까지 개최하는 ‘조선시대 통신사와 부산’전에 왔다.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아 마련된 이번 전시회에는 국내외 23개 기관이 출품한 조선통신사 관련 유물 110점이 전시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내년 3월 조선통신사 관련 자료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공동 등재 신청할 예정이다.
일본 고베시립박물관이 소장한 ‘조선통신사래조도(來朝圖)’. 쇼군이 있던 에도(지금의 도쿄)에 도착한 조선통신사 일행이 국서(國書) 봉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모습을 담았다. 부산박물관이 12월 6일까지 개최하는 ‘조선시대 통신사와 부산’전에 왔다.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아 마련된 이번 전시회에는 국내외 23개 기관이 출품한 조선통신사 관련 유물 110점이 전시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내년 3월 조선통신사 관련 자료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공동 등재 신청할 예정이다. /부산박물관 제공

통신사(通信使)는 '국가 간에 신의를 통하는 사절'이라는 뜻이다. 대부분 새 쇼군이 자리에 오르면 축하 사절 명목으로 파견됐고 양국 간 외교 현안 해결과 정세 파악도 주임무였다. 조선통신사는 1413년 처음 파견된 후 1811년 20차까지 400년 가까이 이어졌다. 정사(正使)·부사(副使)·종사관(從事官) 등 수뇌부와 수행원·역관·의원·화원(畵員) 등 500명 전후한 대규모로 꾸려졌다. 한양을 떠나 부산에 도착해서 배를 타고 대마도(쓰시마)를 거쳐 일본 본토에 상륙했다. 이후 오사카까지 해로를 이용한 뒤 육로로 에도(지금의 도쿄)까지 갔다. 왕래에 대략 8개 월이 걸렸으며 2년이 넘기도 했다.

조선통신사의 일본행에는 대마도의 역할이 컸다. 일본의 대(對)조선 외교를 대행했던 대마도는 통신사 실무를 담당하면서 양국 사이에서 정치적 위상을 확보하는 동시에 경제적 이익을 챙겼다.

조선은 통신사 선발에 상당히 신경을 썼다. 통신사 일행은 일본 지식인들과 서화·시문을 교환하는 등 문화 교류에 힘썼으며 많은 기록을 남겼다.

 

 

 

 

 

400년간 20차례 日 파견된 조선통신사… 新조선통신사가 둘러보니 숨결 그대로

입력 : 2015.10.29 03:00

[新조선통신사]

바다 건너려다가 침몰사고… 쓰시마 곳곳 '통신사의 碑'
日 본토 첫 땅 시모노세키 바다 입구엔 통신사 상륙비

일본 나고야(名古屋)에 있는 불교 사찰 히가시베쓰인(東別院)은 미공개 조선통신사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지난 26일 사찰을 안내한 곤도 쓰카사(近藤司) 스님은 수장고에 깊이 간직한 족자 하나를 꺼내 보였다. 활달한 초서체로 '暗水流花徑(암수류화경) 春星帶草堂(춘성대초당)'이라고 적었다. '어둠 속 물은 꽃길로 흐르고/ 봄 하늘 별은 초가집을 에워싼다'는 뜻이다. 1811년 마지막 조선통신사의 서기(書記)였던 김선신(金善臣)이 큰 붓을 들어 쓴 두보의 시 구절이다. 곤도 스님은 "마지막 통신사는 쓰시마까지만 왔는데 어떻게 이를 소장하게 됐는지는 전하지 않는다"면서 "하지만 통신사 글씨를 어렵게 얻어 200년 이상 소중하게 보관해 온 것은 분명하다"고 했다.

조선시대에 1413년부터 약 400년에 걸쳐 모두 20차례 파견된 조선통신사의 흔적은 일본 곳곳에 남아 있다. 쓰시마(대마도)는 통신사가 가장 먼저 닻을 내린 곳이다. 지금은 부산에서 쾌속선을 타고 1시간10분이면 닿지만 옛 뱃길은 녹록지 않았다. 파도가 높지 않은 날을 기다려 일행 500명이 탄 6척의 배가 바다로 나섰다. 배가 침몰하는 사고도 있었다.

나고야에 있는 불교 사찰 히가시베쓰인을 찾은 ‘두바퀴로 달리는 신조선통신사’ 대원들이 조선통신사 서기 김선신의 유묵을 관람하며 일본 스님의 설명을 듣고 있다.
나고야에 있는 불교 사찰 히가시베쓰인을 찾은 ‘두바퀴로 달리는 신조선통신사’ 대원들이 조선통신사 서기 김선신의 유묵을 관람하며 일본 스님의 설명을 듣고 있다. /이진한 기자
쓰시마 북부 와니우라(鰐浦)에는 이때 희생된 112명을 추도하는 비석이 있다. 남쪽 이즈하라(嚴原)에는 '조선통신사의 비(碑)' '통신사 황윤길 현창비' 등이 서 있다.

시모노세키(下關)는 통신사 일행이 상륙한 일본 본토의 첫 땅이다. 폭 1.5㎞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규슈(九州) 모지(門司)와 마주 보고 있다. 일본 내해(內海)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다. 통신사 일행은 모두 이곳을 거쳐 갔다. 바다 입구에 '조선통신사 상륙비'가 있다. 1719년 통신사의 제술관이었던 신유한(申維翰·1681~1752)은 사행(使行) 기록인 '해유록(海遊錄)'에서 '시모노세키는 해문(海門)의 요새다. 큰 바다의 모든 배를 받아들인다. 해군 수만 명을 두어 방비하면 견고한 천혜의 요새가 된다'고 썼다.

조선통신사는 세토(瀨戶) 내해를 통해 오사카로 향했다. 가미노세키·도모노우라·우시마도·무로쓰 등을 거쳐 갔다. 오사카까지는 보름 이상 걸리는 뱃길이었다. 이 지역들엔 조선통신사의 글씨와 그림 등을 전시한 기념관·박물관이 있다.

통신사는 오사카에서 니시혼간지(西本願寺·현재 혼간지 쓰무라베쓰인)에 머물렀다. 당시엔 1000여칸 건물이 있는 대규모 사찰이었다고 한다. 1945년 폭격으로 불에 타 지금은 옛 모 습을 찾을 수 없고, 1964년 재건한 본당과 부속 건물이 있다.

이곳에서 만난 조선통신사 전문가 나카오 히로시(仲尾宏) 교토조형예술대 교수는 "조선통신사가 왕래했던 시기에 두 나라는 큰 분쟁 없이 대등한 입장에서 평화롭게 교류하는 시대를 실했다"면서 "400여년간 우호와 친선을 지속한 귀중한 경험은 양국은 물론 인류의 교훈이 되는 문화유산"이라고 말했다.

 

 

 

 

42m 조선통신사 행렬圖… 호기심 가득한 일본인 표정 살아있네

입력 : 2015.10.29 03:00

[新조선통신사]
오사카역사박물관, 新조선통신사 도착 기념해 '행렬圖' 공개

日 각지 화가 40여명 투입, 통신사 일행 등 수천명 그려 여러 개 두루마리로 나눠
在日역사학자 故신기수씨가 기증한 140점 유물 중 하나

두루마리를 펴자 300년 전 조선통신사의 모습이 사진처럼 펼쳐졌다. 군관(軍官)은 더운 듯 노란 부채를 펴들었고, 긴 창을 든 병사는 뒤를 돌아보며 말을 걸기도 했다. 행렬을 책임진 부사(副使)는 가마 속에서 정면을 응시했고, 맨발의 일본인들은 조선통신사 일행을 신기한 듯 돌아보며 따라갔다. '원조 한류(韓流)'는 두루마리 속에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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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년 조선통신사 일행을 그린 ‘정덕도조선통신사행렬도’. 재일 역사학자 신기수씨가 오사카역사박물관에 기증한 것으로 통신사와 수행원, 호위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총 길이 42m로 여러 개의 두루마리로 돼 있으며 일본 각지의 화가 40여명이 투입돼 완성했다. /오사카역사박물관 제공
오사카역사박물관은 27일 신(新)조선통신사 일행의 오사카 도착을 기념해 '정덕도조선통신사행렬도(正德度朝鮮通信使行列圖)'를 본지에 공개했다. 조선통신사 다큐멘터리를 만든 재일(在日) 역사학자 고(故) 신기수씨가 기증한 140여점의 유물 중 하나로 훼손을 우려해 좀처럼 외부 반출을 하지 않는다. 1711년(숙종 37년) 조선통신사 일행 400여명과 호위하는 일본인 등 수천 명을 담은 이 그림은 42m에 달하고, 여러 개의 두루마리에 나눠져 있다. 그림을 그리는 데 일본 각지의 화가 40여명이 투입됐다. 오사와 겐이치(大澤硏一) 학예사는 "돌을 갈아 만든 염료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색도 거의 바래지 않고 보존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박물관 측은 또 1682년에 오사카에서 교토까지 배를 타고 이동하는 조선통신사 의 모습을 그린 '천화도조선통신사상판사제1선도(天和度朝鮮通信使上判事第一船圖)'도 공개했다. 배 안의 조선통신사 일행은 일본인들과 자리를 함께하며 풍경을 감상하고 있다. 신기수씨의 딸 신이화씨는 "2001년 아베 총리가 아버지의 조선통신사 강의를 들으러 온 적이 있다"며 "한·일 관계의 부침에 상관없이 조선통신사는 한국과 일본을 엮는 핵심 고리"라고 말했다.

 

 

 

 

 

    年式 오래돼 쉬어야 했는데… 이제 일 이뤄졌으니 만세 삼창하고"

입력 : 2016.04.04 04:31

['조선통신사' 韓日 공동 유네스코 등재 신청… 산파역 강남주 선생(上)]
 

부산역에 도착했을 때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강남주(77) 선생을 금방 알아봤다. 단아한 노신사는 이런 식의 유머를 했다.

"연식(年式)이 오래돼 나는 벌써 쉬어야 했는데, 이제 등재 신청이 이뤄졌으니 만세 삼창 하고 정말 물러납니다."

매스컴은 관심이 없던 사건이 있었다. 지난달 30일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 신청했다. '과거 역사'로 갈등해온 두 나라가 '과거 역사'를 갖고 함께 이런 작업을 추진한 것이다. 신청 주체는 부산문화재단과 일본의 조선통신사 연지(緣地)연락협의회다. 그가 산파역을 맡았다.

"모든 게 내 본의(本意)와는 무관했어요. 부산에서 '조선통신사' 재현 행렬을 시작한 것도 그랬어요. 당시 전문가가 없으니까 '적임자가 나타날 때까지만 일단 맡겠다'고 했던 겁니다. 몇 년 전 부산문화재단 대표를 그만둔 내가 '유네스코 등재'에 관계된 것도 그렇습니다. 이 일에서 손을 떼야 하는데 대타(代打)가 없었어요, 후임자가 경험이 적고 일본 쪽 행사를 잘 모른다고 해서 내가 계속 불려 나왔어요."

강남주 선생은 “조선통신사의 의미와 가치는 세계사에서도 흔하지 않다”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좋은 문화적 자산을
쓰시마에선 활용하고
왜 출발지인 부산에서는
아무것도 안 하는가

강남주 선생

조선통신사는 1428년 왜구(倭寇) 문제 해결을 위해 시작됐다. '통신(通信)'은 믿음(信)을 서로 통하게 한다는 뜻이다. 조선 중기까지 지속된 통신사 왕래는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임진왜란)으로 중단됐다.

그 뒤 일본을 제패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화평 메시지를 전해왔다. 조선 조정에서는 도쿠가와 막부의 진의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사명대사를 '탐적사(探賊使·도적의 동태를 살피러 가는 사절)'로 일본에 파견하기도 했다.

당시 조선은 북에서 발흥하는 여진족(청나라)과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었다. 그러면 남으로는 대일 관계를 좋게 가져갈 필요가 있었다. 1607년 일본과 강화가 이뤄졌다. 그 뒤로 통신사가 12번이나 파견됐다. 한 번 여정(旅程)은 1년~1년 반이 걸렸다.

―두 나라가 함께 유네스코 등재를 추진한 게 흥미롭습니다. 누구 발상이었습니까?

"2007년 시모노세키 축제(祝祭)에 초대됐을 때 내가 만찬장에서 '조선통신사의 의미와 가치는 세계사에서도 흔치 않다'며 유네스코 등재에 대해 발언했어요. 일본 측에서 '대단히 필요하다'며 호응했습니다. 당시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뱃길을 떠난 것은 목숨 건 행위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전쟁 시대를 평화 시대로 바꾼 것처럼 우리의 이런 작업이 경색된 한일 관계의 탈출구가 되지 않겠나 싶었어요."

그의 마지막 공식 직책은 한국 측 학술위원장이다. 방대한 자료 중에서 등재 신청할 가치가 있는 것을 고르기 위해 학문적 검증을 맡았다. 두 나라 학술 위원이 10명씩 한국과 일본을 교대로 오가며 열두 차례 토론을 벌였다.

"용어 하나로 신경을 곤두세울 때도 있었어요. 이런 얘기를 해야 될지 모르나, 유네스코에 등재하는 신청서 내용 중 '일본이 조선에 출병(出兵)하여'라는 문장을 놓고는…."

일본 오사카박물관에 전시된 조선통신사 행렬을 그린 에마키(두루마리 그림). /박상훈 기자

임진왜란을 '조선 출병'이라고
사용하는 日 설득해

―'조선 출병'은 임진왜란을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적절하지 않다. 용어를 바꿔달라'고 했어요. 일본 학자들은 자기네 상식으로 출병(出兵) 표현이 정확하고, 전통적으로 그렇게 쓰여왔다고 했어요. 내가 '그건 일본 입장이고 보편적으로는 침략이 맞다. 또 세계사를 봐도 히틀러·무솔리니 등 독재자 이름이 구체적으로 나온다. 왜 여기서만 일본이 출병했다는 식으로 하느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명시하자'고 주장한 뒤 휴회(休會)를 시켰어요. 결국 일본 측에서 우리 의견을 받아들였어요."

―거꾸로 일본 측이 우리에게 양보를 요구한 것도 있습니까?

"별로 없었는데, 다만 등재 목록 중에 조선통신사를 섭외한 데 공(功)이 큰 일본인들의 초상화를 넣어달라고 했어요.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등재되면 가문의 영광이니까요. 하지만 그것까지는 안 된다고 반대했지요."

조선 후기에 총 12차례 파견된 통신사의 외교·여정·문화 교류에 관한 기록 중 111건 333점이 선정됐다. 한국 측 63건 124점, 일본 측 48건 209점이었다. 등재 여부는 내년 7월쯤 결정된다. <下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