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명 규모… 양국 왕래에 약 8개월 걸려입력 : 2015.10.29 03:00 [新조선통신사] 조선통신사 어떻게 운영됐나조선통신사는 조선시대에 국왕이 일본의 막부(幕府) 최고권력자인 쇼군(將軍)에게 보낸 외교사절이다. 조선이 1403년(태종 3년) 명나라로부터 책봉받고 이듬해 일본의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 쇼군도 책봉받자 두 나라는 대등한 교린국(交隣國)이 됐다. 일본 쇼군이 조선에 파견한 외교사절은 일본국왕사(國王使)라고 했다.
통신사(通信使)는 '국가 간에 신의를 통하는 사절'이라는 뜻이다. 대부분 새 쇼군이 자리에 오르면 축하 사절 명목으로 파견됐고 양국 간 외교 현안 해결과 정세 파악도 주임무였다. 조선통신사는 1413년 처음 파견된 후 1811년 20차까지 400년 가까이 이어졌다. 정사(正使)·부사(副使)·종사관(從事官) 등 수뇌부와 수행원·역관·의원·화원(畵員) 등 500명 전후한 대규모로 꾸려졌다. 한양을 떠나 부산에 도착해서 배를 타고 대마도(쓰시마)를 거쳐 일본 본토에 상륙했다. 이후 오사카까지 해로를 이용한 뒤 육로로 에도(지금의 도쿄)까지 갔다. 왕래에 대략 8개 월이 걸렸으며 2년이 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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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간 20차례 日 파견된 조선통신사… 新조선통신사가 둘러보니 숨결 그대로입력 : 2015.10.29 03:00 [新조선통신사]
일본 나고야(名古屋)에 있는 불교 사찰 히가시베쓰인(東別院)은 미공개 조선통신사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지난 26일 사찰을 안내한 곤도 쓰카사(近藤司) 스님은 수장고에 깊이 간직한 족자 하나를 꺼내 보였다. 활달한 초서체로 '暗水流花徑(암수류화경) 春星帶草堂(춘성대초당)'이라고 적었다. '어둠 속 물은 꽃길로 흐르고/ 봄 하늘 별은 초가집을 에워싼다'는 뜻이다. 1811년 마지막 조선통신사의 서기(書記)였던 김선신(金善臣)이 큰 붓을 들어 쓴 두보의 시 구절이다. 곤도 스님은 "마지막 통신사는 쓰시마까지만 왔는데 어떻게 이를 소장하게 됐는지는 전하지 않는다"면서 "하지만 통신사 글씨를 어렵게 얻어 200년 이상 소중하게 보관해 온 것은 분명하다"고 했다. 쓰시마 북부 와니우라(鰐浦)에는 이때 희생된 112명을 추도하는 비석이 있다. 남쪽 이즈하라(嚴原)에는 '조선통신사의 비(碑)' '통신사 황윤길 현창비' 등이 서 있다. 시모노세키(下關)는 통신사 일행이 상륙한 일본 본토의 첫 땅이다. 폭 1.5㎞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규슈(九州) 모지(門司)와 마주 보고 있다. 일본 내해(內海)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다. 통신사 일행은 모두 이곳을 거쳐 갔다. 바다 입구에 '조선통신사 상륙비'가 있다. 1719년 통신사의 제술관이었던 신유한(申維翰·1681~1752)은 사행(使行) 기록인 '해유록(海遊錄)'에서 '시모노세키는 해문(海門)의 요새다. 큰 바다의 모든 배를 받아들인다. 해군 수만 명을 두어 방비하면 견고한 천혜의 요새가 된다'고 썼다. 조선통신사는 세토(瀨戶) 내해를 통해 오사카로 향했다. 가미노세키·도모노우라·우시마도·무로쓰 등을 거쳐 갔다. 오사카까지는 보름 이상 걸리는 뱃길이었다. 이 지역들엔 조선통신사의 글씨와 그림 등을 전시한 기념관·박물관이 있다. 통신사는 오사카에서 니시혼간지(西本願寺·현재 혼간지 쓰무라베쓰인)에 머물렀다. 당시엔 1000여칸 건물이 있는 대규모 사찰이었다고 한다. 1945년 폭격으로 불에 타 지금은 옛 모 습을 찾을 수 없고, 1964년 재건한 본당과 부속 건물이 있다. 이곳에서 만난 조선통신사 전문가 나카오 히로시(仲尾宏) 교토조형예술대 교수는 "조선통신사가 왕래했던 시기에 두 나라는 큰 분쟁 없이 대등한 입장에서 평화롭게 교류하는 시대를 실했다"면서 "400여년간 우호와 친선을 지속한 귀중한 경험은 양국은 물론 인류의 교훈이 되는 문화유산"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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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m 조선통신사 행렬圖… 호기심 가득한 일본인 표정 살아있네입력 : 2015.10.29 03:00 [新조선통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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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4.04 04:31 ['조선통신사' 韓日 공동 유네스코 등재 신청… 산파역 강남주 선생(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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