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를 강의할 때마다 수강생들로부터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고 받는 질문이 있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이나 사람 이름을 쉽게 외우는 비법이 있느냐는 것이다. 수강생들은 신화를 공부하려고 굳게 결심을 했다가도 막상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등장하는 길고 이국적이며 수많은 이름에 맞닥뜨리면 기가 질려 포기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하소연한다.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언제나 똑같다. “신화에서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어려운 이름일수록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자주 나오는 쉬운 이름으로 치부하고 그냥 지나쳐라. 신화의 핵심은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가 정권을 잡은 신족을 올림포스 신족이라고 부른다. 제우스가 그리스에서 가장 높은 산인 올림포스 산에 산성을 쌓고 티탄 신족과 맞서 싸워 이겼기 때문이다.
올림포스 신족은 다시 1세대와 2세대로 나뉜다. 1세대는 제우스의 형제자매를, 2세대는 제우스가 낳아 대업을 맡긴 신들을 말한다.
그리스 신들은 로마로 그대로 받아들여지면서 이름만 다르게 불렀다. 그리스 신들의 로마식 이름에서 다시 영어식 이름이 나왔으니, 하나의 신을 두고 세 가지의 다른 이름이 있는 셈이다.
어떤 독자는 이 세 가지 이름이 서로 다른 신을 지칭하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래서 적어도 그리스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신들의 로마식, 그리고 영어식 이름만은 구분해서 알아두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제우스와 형제자매들인 1세대 신들.
신들의 왕 제우스(Zeus)는 로마에서는 유피테르(Jupiter), 영어로는 주피터(Jupiter)라 한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은 로마에서는 넵투누스(Neptunus), 영어로는 넵튠(Neptune)이라고 했다. 지하세계의 신 하데스(Hades)는 플루톤(Plouton)이라고도 했는데, 로마에서는 플루토(Pluto), 영어로도 플로토(Pluto)라 했다.
가정의 여신 헤라(Hera)는 또 어떠한가. 로마에서는 유노(Juno), 영어로는 주노(Juno)다. 곡물의 여신 데메테르(Demeter)는 로마에선 케레스(Ceres), 영어론 세레스(Ceres). 화로의 여신 헤스티아(Hestia)는 로마에서는 베스타(Vesta), 영어로는 베스터(Vesta)라고 했다.
그 다음은 제우스가 대업을 맡긴 2세대 신들.
태양의 신 아폴론(Apollon)은 로마에서는 아폴로(Apollo), 영어로도 아폴로(Apollo). 전령의 신 헤르메스(Hermes)는 로마에서는 메르쿠리우스(Mercurius), 영어로는 머큐리(Mercury)라 했다.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Hephaistos)는 로마에서는 불카누스(Vulkanus), 영어로는 벌컨(Vulkan). 전쟁의 신 아레스(Ares)는 로마에서는 마르스(Mars), 영어로는 마즈(Mars)다.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Dionysos)는 박코스(Bakchos)라고도 했는데, 로마에서는 바쿠스(Bacchus), 영어로는 바커스(Bacchus)다.
잘 알려진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는 어떨까. 로마에서는 베누스(Venus), 영어로는 비너스(Venus)다. 달과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Artemis)는 로마에서는 디아나(Diana), 영어로는 다이아나(Diana). 지혜의 여신 아테나(Athena)는 로마에서 미네르바(Minerva), 영어로도 미네르바(Minerva)라 했다. 마지막으로 짓궂은 장난꾸러기 사랑의 신 에로스(Eros)는 로마에선 쿠피도(Cupido) 혹은 아모르(Amor), 영어로는 큐피드(Cupid)다.
그리스 신화는 올림포스 신족의 12주신(主神)과 그들의 자손에 관한 이야기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2주신은 원래 남신(男神)은 제우스, 포세이돈, 아폴론, 아레스, 헤파이스토스, 헤르메스 등 6명, 여신(女神은) 헤라, 데메테르, 헤스티아, 아테나, 아르테미스, 아프로디테 등 6명이었다. 그런데 맨 나중에 디오니소스가 올림포스 신족에 합류하자 헤스티아가 자리를 양보하면서 남신은 7명, 여신은 5명이 된다.
고대 그리스 문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인본주의였다. 철학자 프로타고라스(Protagoras)의 유명한 말처럼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인간은 ‘만물의 척도’였다. 그들이 인간을 얼마나 중시했으면 신들에게 인간의 모습을 투영했을까. 그리스 신들은 인간을 빼닮았다. 인간처럼 사랑하고, 싸우며, 도둑질하고, 간통한다.
그래서 그리스 신들은 각기 다양한 인간유형 중 하나를 구현하고 있다. 헤라 여신은 헤라 유형의 여자를, 제우스 신은 제우스 유형의 남자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단 얘기다.
이 시리즈는 그리스 신화의 12주신에 하데스와 헤스티아를 보탠 총 14명 그리스 신들의 이야기를 사랑이란 테마에 초점을 맞춰 세대 순으로 살펴본다. 그 안에는 사랑과 질투와 이별과 응징이 있으며, 신들 각각이 대변하는 인간의 유형이 있다.
필자는 지난 2년여 동안 SBS 라디오프로그램 <책하고 놀자>의 ‘김원익의 그리스 신화 읽기’라는 코너를 통해 그리스 신화를 두고 주제별로 씨줄과 날줄로 가르며 다양한 해석을 시도했다. 이 시리즈는 그중 그리스 신들을 둘러싼 사랑의 이야기를 전한 부분에다 당시 미처 하지 못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보태 펴낸 것이다.
내 사랑은 과연 어떤 신의 사랑을 닮았을까? 나는 과연 어떤 신을 닮았을까?
질투의 화신 헤라(2)
김원익 칼럼니스트, 2016.03.26
제우스가 변신한 뻐꾸기를 품은 헤라
헤라, 그녀가 사랑한 처음이자 마지막은 남편 제우스였다. 그런데 헤라가 제우스와 결혼하는 과정을 보면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미적지근하다. 아주 소극적이었으니까.
아름다운 헤라에 눈독을 들이던 제우스는 어느 날 산에 홀로 있는 그녀를 발견한다.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제우스는 비를 내리게 한 후 비에 흠뻑 젖은 뻐꾸기로 변신하여 여신의 무릎에 내려앉았다. 헤라가 가엾게 여기고 뻐꾸기를 가슴에 품자 제우스가 얼른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그녀와 강제로 사랑을 나누려했다. 헤라는 처음에는 완강히 저항하다가 결국 제우스로부터 자신을 정실부인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서야 그를 허락했다.
헤라에겐 이렇듯 제우스와 결혼하여 그의 아내 역할을 하는 일이 중요했다. 사람들이 헤라를 결혼과 가정의 여신으로 삼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헤라는 자신의 결혼생활을 방해하는 자는 누구도 용서하지 않았다. 그녀는 특히 제우스가 한눈을 판 대상에게 ‘충격과 공포’의 보복을 가했다. 제일 먼저 그녀의 질투의 표적이 된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숲의 요정 칼리스토(Kallisto)였다.
칼리스토를 곰으로 변신시킨 헤라
칼리스토는 원래 독신으로 살기로 결심했다. 독신자의 수호신 아르테미스 여신을 신봉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른 요정들과 함께 아르테미스 여신을 따라다니며 숲 속에서 사냥을 하며 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요정들 사이에서 칼리스토를 발견한 제우스는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에게 다가갈 방법을 찾던 제우스는 마침내 아르테미스 여신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그녀와 사랑을 나눈다.
몇 달이 흐른 뒤 요정들과 목욕을 즐기던 아르테미스 여신은 칼리스토가 임신한 사실을 발견하고는 “상대가 누구냐”고 다그쳤다. 칼리스토가 머뭇거리며 여신의 이름을 대자 어안이 벙벙해진 여신은 그녀를 무리에서 추방했다. 영문도 모른 채 버림받은 칼리스토는 혼자 살며 아들 아르카스(Arkas)를 낳아 길렀다.
그런데 불행은 정녕 한꺼번에 찾아오는 모양이다. 제우스와 칼리스토의 관계를 눈치 챈 헤라가 분노하여 칼리스토를 곰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칼리스토는 틈만 나면 산속을 헤매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제우스는 불쌍한 아들 아르카스를 헤르메스의 어머니 마이아(Maia)에게 맡긴다.
어느 덧 장성한 아르카스는 사냥을 하다가 곰을 만난다. 그렇다. 변신한 어머니였다. 아들을 알아본 어머니는 기뻐 달려갔지만, 아들의 눈엔 그저 달려오는 사냥감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모자가 이런 기가 막힌 상봉을 하게 된 것도 헤라의 질투심 때문이었다고 한다. 아르카스가 막 활시위를 당겨 어머니에게 화살을 날리려는 순간, 하늘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본 제우스가 깜짝 놀랐다. 그는 부리나케 어머니와 아들을 하늘로 불러들였다. 이어 어머니는 큰곰자리, 아들은 작은 곰 자리로 만들어 하늘에 별자리로 박아주었다. 그러나 헤라의 질투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오케아노스(Ocheanos)신에게 부탁하여 그 별자리들이 신선한 바다에 가라앉지 못하도록 했다. 그래서 큰곰자리와 작은곰자리는 극 주변만을 도는 별자리가 된다.
암소로 변신한 이오를 괴롭히는 헤라
헤라가 강의 신 이나코스(Inachos)의 딸 이오에게 가한 박해는 이보다 더 심했다. 제우스가 이오와 함께 있다는 얘기를 들은 헤라는 문제의 현장을 찾았다. 하지만 제우스는 역시 ‘프로’였다. 헤라가 도착하기 전 얼른 이오를 암소로 변신시켜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어떻게 암소와 사랑을 할 수 있겠느냐는 투였다. 하지만 헤라도 만만찮은 ‘프로’였다. 사태를 짐작한 그녀는 제우스에게 자신을 사랑한다면 암소를 선물로 달라고 했다. 심심할 때 놀이친구로 삼겠다는 것이다.
아내 헤라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제우스는 암소를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다. 헤라는 암소를 끌고 가 자신의 충복 아르고스(Argos)에게 감시하도록 했다. 아르고스는 눈이 백 개나 달린 괴물이었다. 백 개의 눈 중 하나는 절대로 감기지 않아 감시병으로는 그만이었다. 몸이 닳아 이오를 빼내올 궁리를 하던 제우스는 전령 헤르메스에게 그 임무를 맡긴다.
헤르메스는 나그네로 변신한 채 아르고스에게 다가간다. 그리곤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헤르메스의 절묘한 피리소리를 듣던 아르고스의 눈이 하나씩 감기기 시작했다. 마침내 항상 떠 있던 눈마저도 마술에 걸린 듯 감긴다. 그 순간 헤르메스가 칼을 뽑아 아르고스의 목을 치고, 이오를 빼돌리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오의 시련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독한 마음을 품은 헤라는 죽은 아르고스의 몸에서 백 개의 눈을 빼낸다. 이 눈들을 자신의 신조(神鳥)인 공작의 꼬리에 붙여준 다음 쇠파리 떼를 보내 도망치는 이오를 공격했다. 쇠파리 떼는 암소의 옆구리와 잔등에 붙어 피를 빨아댔다. 암소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그리스를 가로질러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해협을 건너갔다가 다시 소아시아로 갔다.
이후 그 해협은 암소로 변신한 이오가 건넜다고 하여 ‘암소의 건널목’이라는 뜻을 지닌 ‘보스포로스(Bosporos)’라 불렸다. ‘보스포로스’는 영어로는 ‘보스포러스(Bosporus)’라고 한다. 마르마라(Marmara)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해협으로, 현재 그 입구에는 터키 최대의 도시 이스탄불(Istanbul)이 놓여있다.
이리저리 방황하던 이오는 마침내 이집트에 도착한다. 비로소 안정을 찾게 된 이오는 그곳에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에파포스(Ephapos)라는 제우스의 아들을 낳았다. 헤라의 질투는 결국 처음에 의도한 결과를 이루어내지 못한 채 허무한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질투의 화신 헤라 (3)
김원익 칼럼니스트, 2016.05.12
헤라의 질투, 그 최대 피해자 헤라클레스
그리스 신화에는 헤라 여신이 남편인 제우스를 무척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직접적인 이야기는 없다. 남편에 대한 헤라 여신의 사랑은 칼리스토나 이오처럼 남편이 한눈을 판 대상이나, 남편과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에게 그녀가 가한 보복의 정도로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제우스가 한눈을 팔아 낳은 자식들 중 헤라가 가장 미워한 인물은 바로 영웅 헤라클레스(Herakles)였다.
제우스는 자신을 대신해 인간을 위해 큰일을 해낼 영웅을 하나 낳을 결심을 하고 이름도 미리 ‘헤라클레스’라고 지어두었다. 헤라클레스는 ‘헤라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뜻. 제우스는 그렇게 해서라도 아들을 헤라의 질투로부터 보호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제우스의 의도와는 달리 헤라는 헤라클레스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헤라클레스가 암피트리온(Amphytrion)의 아내 알크메네(Alkmene)의 몸을 빌려 태어날 때가 되었다. 제우스는 신들을 모아놓고 “앞으로 암피트리온이 속한 페르세우스 가문에서 제일 먼저 태어나는 아이가 미케네의 왕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질투의 화신 헤라가 가만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그녀는 제우스의 약속을 스틱스 강에 대고 맹세하게 한 다음, 알크메네에게 해산의 여신을 보내지 않고 헤라클레스의 탄생을 지연시켰다. 그 사이 또 다른 페르세우스의 가문에 속하는 스테넬로스(Sthenelos)의 집에 해산의 여신을 먼저 보내 잉태된 지 일곱 달밖에 되지 않은 에우리스테우스(Eurysteus)가 태어나게 만들었다.
제우스는 ‘아차’ 싶었다. 하지만 이미 스틱스 강에 대고 맹세한 터라 에우리스테우스를 미케네의 왕으로 만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스틱스 강은 죽은 혼령은 꼭 건너야 하는 지하세계를 흐르는 강. 그곳에 대고 한 번 맹세를 하면 신이든 인간이든 꼭 실행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헤라클레스는 태어날 때부터 헤라의 질투의 표적이 된 것이다.
헤라클레스가 태어나자, 그에 대한 헤라의 박해는 더 심해졌다. 헤라클레스가 생후 8개월 되었을 때였다. 그에게는 이피클레스(Iphikles)라는 쌍둥이 동생이 있었다. 두 아이는 요람에서 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요람에 독사 두 마리가 나타나 똬리를 틀며 그들을 공격했다. 바로 헤라가 두 아이를 죽이기 위해 몰래 집어넣은 독사들이었다. 이피클레스는 두려움에 큰 소리로 울기만 했지만, 헤라클레스는 놀라는 기색 없이 고사리 같은 양손으로 뱀의 목을 졸라 죽였다.
헤라의 질투 덕분에 생긴 은하수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밤하늘에 아름다운 은하수가 생긴 것도 헤라의 질투 덕분이다. 제우스는 헤라클레스를 신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렸을 때 헤라의 젖을 맛보아야 했다. 기회를 노리던 제우스는 어느 날 헤라가 깊이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어린 헤라클레스를 데려와 몰래 젖을 물렸다. 그런데 젖을 빨던 헤라클레스는 실수로 그만 헤라의 살을 깨물고 말았다. 잠에서 깨어난 헤라가 화들짝 놀라며 헤라클레스를 뿌리치자 그녀의 가슴에서 젖이 뿜어 나와 하늘에 뿌려졌다. 그러자 하늘에 하얀 길이 아름답게 펼쳐지면서 은하수가 되었다. 그래서 은하수는 영어로 우유길, 즉 milky way라고 부른다.
헤라의 분노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장성한 헤라클레스가 테베를 괴롭히던 이웃나라 오르코메노스(Orchomenos)를 응징한 적이 있었다. 테베로 조공을 받으러 온 오르코메노스의 사신들을 혼내 쫓아버린 것이다. 이어 보복하려고 테베로 쳐들어온 오르코메노스의 군사들도 단숨에 무찔렀다. 헤라클레스는 강화조약을 맺어 해마다 오르코메노스에 바쳐온 조공의 두 배를 받아냈다.
테베의 왕 크레온(Kreon)은 보답으로 헤라클레스에게 공주 메가라(Megara)를 아내로 주었다. 헤라클레스는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 둘을 낳고 한동안 행복했다. 헤라가 그런 헤라클레스를 놔둘 리 없었다. 여신은 그에게 다시 광기를 몰아넣었다. 그러자 헤라클레스의 눈에 갑자기 아들들은 하이에나로, 아내는 암사자로 보이는 게 아닌가. 결국 헤라클레스는 그들을 제 손으로 목 졸라 죽이고 말았다. 심지어 그를 말리던 아버지 암피트리온도 공격했다고 한다.
얼마 후 제 정신으로 돌아온 헤라클레스는 잘못을 깊이 뉘우쳤다. 그는 곧장 델포이의 아폴론 신탁소를 찾아가 엄청난 살인죄를 씻을 방도를 물었다. 그러자 피티아(Phytia) 여사제가 “미케네의 에우리스테우스 왕을 찾아가 그가 시키는 일을 하라”는 신탁을 전했다. 에우리스테우스 왕은 알다시피 헤라 덕택으로 헤라클레스 대신 왕이 된 인물. 일곱 달 만에 엉겁결에 태어난 그는 미숙아였으며 천성이 소심하고 겁이 많았다. 그런 그를 헤라클레스가 찾아왔다. 그러자 헤라의 사주를 받은 그는 보통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들을 헤라클레스에게 시켰다. 그게 바로 유명한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이다.
12가지 과업을 마친 후에도 헤라클레스는 수많은 시련을 겪고 결국 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그러자 헤라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다. 죽도록 미워하던 헤라클레스에게 자신과 제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소중한 딸이자 청춘의 여신이었던 헤베(Hebe)를 아내로 주었기 때문이다. 어떤 신화학자에 의하면, 헤라가 헤라클레스에게 딸을 준 것은 그가 한때 자신을 능욕하려 했던 기간테스(거인족) 포르피리온(Porphyrion)을 죽여 자신을 구해주었기 때문이다.
자, 헤라의 강한 질투심을 보여주는 에피소드 두 개를 더 들어보자.
(그림 5), (그림 6), (그림 7), (그림 8)
괴물과 두루미가 된 라미아와 게라나
제우스는 한때 포세이돈과 리비아(Lybia)의 딸 라미아(Lamia)를 사랑했다. 그 소문을 듣고 헤라는 제우스의 소생이었던 아들 하나를 포함해서 라미아의 자식들을 모두 죽인 뒤 그녀를 다른 사람의 자식들을 사냥해 잡아먹는 괴물로 만들어버렸다. 다른 설에 의하면, 헤라가 그녀의 자식들을 훔쳐가자 라미아는 슬픔과 분노에 빠진 나머지 다른 사람의 자식들을 사냥해 잡아먹다가 결국 계속된 악행으로 괴물로 변신하고 말았다.
이때 라미아가 변신한 괴물의 모습은 머리가 뱀의 머리를 했거나 허리 아래가 뱀의 꼬리를 한 것으로 묘사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헤라는 라미아의 자식들을 모두 죽인 뒤 그녀에게 눈이 감기지 않는 형벌을 가했다. 그러자 잠을 잘 수 없게 된 라미아는 밤낮으로 죽은 자식들의 환영에 시달리게 된다. 이에 제우스는 라미아가 밤에라도 편안히 휴식하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눈을 자유자재로 빼었다가 다시 끼워 넣을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또한 피그미족의 여왕이었던 게라나(Gerana)는 언젠가 자신이 헤라보다 더 아름답다고 오만을 떨었다. 이에 분노한 헤라는 그녀를 두루미로 변신시킨 다음 두루미가 피그미족을 만날 때마다 싸움을 벌이도록 저주를 걸었다. 그래서 지금도 두루미는 상공을 날다가 피그미족이 보이기만 하면 무턱대고 공격을 퍼붓는다고 한다.
‘남편에 목숨 거는’ 헤라 유형의 여자, 그녀의 사랑법
헤라의 사랑은 오로지 일편단심 남편 제우스에게로만 향해 있었다. 그래서 헤라의 질투는 결국 남편 제우스에 대한 그녀만의 너무도 지독한 사랑의 방식이었다. 헤라 유형의 여자에게 인생 최고의 목표는 영국작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에 등장하는 베넷 부인(Mrs. Bennet)이 생각하는 것처럼 ‘든든한 남편을 만나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누리는 것’이다. 그래서 헤라 유형의 여자는 한 가정을 꾸려서 아내와 가족을 먹여 살릴 능력이 있는 남자에게 더욱 마음이 끌릴 수 있다.
헤라 유형의 여자는 고등학교 시절 벌써 남편 같은 남자 친구를 만날 가능성이 있다. 그녀는 남자친구와 커플링을 끼고 커플티를 입고 다니면서 스스럼없이 친밀도를 과시하면서 TV 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처럼 부부생활에 가까운 경험을 미리 할 수도 있다. 헤라 유형의 여자는 이때 사귄 남자친구를 장래의 남편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녀의 의도는 대부분 빗나갈 수 있다. 이어 대학에 들어간 그녀의 관심도 이상적인 남편감을 고르는 데 쏠려있을 수 있다.
헤라 유형의 여자가 직장생활을 한다면? 일단 성실하며 동료나 상사들에게 예의바르고 공손하다. 자신이 맡은 일을 항상 깔끔하게 처리하고 추진력도 강하다. 그래서 동료나 상사로부터 인정받아 남들보다 빨리 승진을 하기도 한다. 무슨 일을 해도 특유의 성실성 때문에 출중한 능력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정해보자. 대학 졸업을 앞둔 헤라 유형의 여자가 생활비 포함 전액 장학금을 받는 조건의 유학을 앞둔 상황을. 하지만 앞으로 결혼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녀에게 이 모든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녀는 좋은 남편이 나타난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어디든지 그를 따라갈 의지가 있다. 그녀의 진짜 직장생활은 남편과 함께 꾸리는 결혼생활이기 때문이다.
헤라 유형의 여자에게 남편의 기쁨은 곧 자신의 기쁨이다. 남편의 성공은 곧 자신의 성공이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있는 것이 마냥 좋고 무엇이든지 남편과 함께하는 것이 즐겁다. 심지어 자식들보다도 남편이 우선이다. 그런 만큼 그녀는 남편에게 종속되어 있을 수 있다. 남편이 자기보다 일찍 죽으면 정체성을 잃고 깊은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최악의 경우 남편을 따라 목숨을 끊거나 햄릿의 어머니 거트루드(Gertrude)처럼 즉시 재혼할 수도 있다. 그녀에게는 남편이라는 ‘핵우산’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랑과 불안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헤라 유형의 여자는 남편이 자신에게 조금만 소홀히 하는 낌새가 보여도 자신을 떠나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런 불안은 근거 없는 경우가 많지만, 그 불안은 심하면 우울증을 거쳐 의부증으로 번질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남편에게 모든 것을 걸면 안 된다. 남편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도 안 된다. 남편은 수많은 남자 중 하나일 뿐이며, 남편보다 훌륭한 남자도 많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1996년에 상영된 할리우드영화 <조강지처클럽>을 참고할 만하다. 헤라 유형의 여자가 가야할 이상적인 방향을 잘 보여주니까. 이 영화의 주인공인 브렌다, 앨리스, 애니는 대학시절 단짝친구들이다. 그들은 졸업 후 생활에 바빠 만나지 못하다가 또 다른 단짝친구 신시아의 자살을 계기로 오랜만에 마주한다.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하는 중에 그들은 모두 남편을 젊은 여자들에게 빼앗기고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한다.
‘서로 돕고 살라’는 신시아의 유서를 읽고 나서 그들은 결심한다. 더 이상 남편에게 끌려 다니는 수동적인 삶을 살지 않기로 말이다. 비로소 그들은 '조강지처클럽(The First Wives Club)'이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힘을 합해 남편들에게 복수하기로 다짐한다. 그들은 드디어 남편들을 혼쭐내주고 가정으로 돌아오게 만든다. 2007년 SBS에서 방영된 드라마 <조강지처클럽>도 이 영화에서 영감을 받은 듯 무대만 우리나라로 바뀌었을 뿐 내용은 거의 같다.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는 제우스와 결혼한 후 한 번도 한 눈을 판 적이 없다. 그녀는 그야말로 정절과 지조의 화신이라고 할만하다. 헤라 유형의 여자들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남편과 한 평생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녀는 남편이 생애 첫 남자이자 마지막 남자일 수 있다. 그래서 그녀의 사전에는 이혼이라는 단어는 없다. 어떤 경우에도 자진해서 이혼하지 않는다. 이런 헤라 유형의 여자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척 마음에 들어 한 모양이다. 명품 화장품 브랜드가 헤라의 이름을 따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