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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시인등단40주년시선집

천마리학 2015. 11. 12. 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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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시인의 깊고 뜨거운 사랑의 찬가

“세상의 남자들을 오빠라고 부르는 여류시인”
세상을 떠도는 집시, 낭만적 유미주의자, 문단의 페미니스트. 문정희 시인의 이름 앞에는 이처럼 붙는 별칭들이 많다. 그러나 딱 하나만 고르라면 주저않고 ‘사랑의 시인’이라는 말을 고를 터. 쓴내 나는 삶을 거쳐 드디어 물과 불이, 남성과 여성이 화해하는 조화로운 사랑을 꿈꾸는 그의 깊고 묵직한 시세계.


문정희 시인(55)의 절친한 친구인 소설가 윤후명씨는 “그녀는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른다. 희망과 절망을, 기쁨과 슬픔을, 아름다움과 추함을 다 곤죽이 되도록 녹여버리는 불꽃이다. 그것은 용광로 속 혼돈이다”라고 표현했다.

그는 40년대, 그러니까 지극히 쓴내 나는 한국 여인네 중의 한 사람으로 태어났다. 70년대 중진시인으로 시력(詩歷) 30년에 20여권의 시집 등을 펴낸 저력의 소유자. 만만치 않은 글쓰기와 세상살이다. 솔직히 이 연배이면 시드는 ‘파꽃’이 되기 마련이지만 그이의 가슴은 여전히 뜨겁다. 여태 꺾이지 않는 ‘찔레’로 서 있는 그 힘과 배짱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는 영원한 자유인이다. 세상 떠돌기를 반복하는 집시의 여인. 인터뷰를 한 후에도 역시 외국으로 훌쩍 떠났다. 달포 후에나 귀국한다는 전갈이다. 역마살의 시인. 어느 문학단체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은 제도권의 이방인. 96년 여름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이런 소감을 피력했다. “군집을 이루는 것은 힘없는 작은 것들뿐, 이를테면 참새일수록 큰 군집을 이루고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홀로 저 대평원을 걸어가는 밀림의 왕에게서 고독하고 아름다운 시인을 확실히 보았습니다. …상을 못 받았다고 해서 제가 시 쓰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듯이 또한 상을 받게 되었다고 해서 제게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음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대단한 일갈이다.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뜨거운 가슴의 노래

또한 그는 홀로 세상을 떠도는 낭만적 유미주의자이다. 남자를 넘어 세상과 교배하며 사는 여자다. 사랑을 할 바에야 호쾌하게 하자는 것. 시에서 토해내는 그 직설적 관능미. 더 이상 끈적이는 것은 싫다. 사랑은 물 흐르듯 흘러가야 한다. 다시 불꽃이 되도록. 물과 불은 극이다. 그러나 그에게 물이란 양수의 욕망과 사랑의 생명이 샘솟는 샘물같은 것이다. 그러기에 젖무덤 밑으로 기어드는 뜨거운 불꽃 같은 사랑을 피우고 싶어한다. 그래서 “사랑의 불꽃과 향기로 숨쉬고 있는 생명”(‘시작노트’)이거나, “꿈결처럼/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찔레’). 하여, “허허벌판에 누워서/깨끗한 남자를 기다린다.//불꽃이 울면서 짐승같이/젖무덤 밑으로 기어든다.//나무들이 간지러워/푸른 소리를 지르고//드디어 그 남자가/길을 무찔러 오는 소리”(‘떠오르는 방’)를 듣는다.

자유분방한 상상력의 시인은 세상의 모든 사물에 사랑의 의미를 부여하며 생명의 불씨 혹은 물길질을 한다. 그러나 오해는 말라. 그가 노래하는 사랑은 사회적·이성적 개념의 벽을 치거나 값싸고 단순한 사랑은 아니다. 지극히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사랑. 사랑 노래에도 원칙이 있다. 생명성을 기본으로 하여 기존 질서가 가지고 있는 편견을 부수는 것이다. 그는 문학계에서 잘 알려진 페미니스트다. 그러나 시 속에서 분노와 탄식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게 그의 시의 매력이다. 성적 몸놀림이 생명의 환희, 창조의 원천으로 자리잡는 시각. “몸 속의 뼈를 뽑아내고 싶다./물이고 싶다./물보다 더 부드러운 향기로/그만 스미고 싶다.//당신의 어둠의 뿌리/가시의 끝의 끝까지/적시고 싶다.//그대 잠속에/안겨/지상의 것들을/말갛게 씻어내고 싶다.//눈 틔우고 싶다”(‘비의 사랑’ 전문)

‘어둠의 뿌리’ ‘가시의 끝’까지 적시고 지상의 모든 것을 씻고 눈 틔우는 사랑, 그것이 ‘비의 사랑’이다. 감싸 안아주는 사랑, 그것을 모성애라 불러도 좋으리라. 물과 불이 화해하고 남성과 여성이 화해하는 조화로운 세상. 그래서 더욱 아름답다. 그의 시에서 에로스는 진정한 사랑으로 가는 정점이다.

세상 떠도는 집시의 여인,자유분방한 상상력의 낭만주의자

그러기에 “키 큰 남자를 보면/가만히 팔 걸고 싶다”(‘키 큰 남자를 보면’), “오빠! 이렇게 불러주고 나면/세상엔 모든 짐승이 사라지고/헐떡임이 사라지고//오히려 두둑한 지갑을 송두리째 들고 와/비단구두 사주고 싶어 가슴 설레이는/오빠들이 사방에 있음을/나 이제 용케도 알아버렸다”(‘오빠’)라고 노래한다. 오빠라고 불러준 그 때부터 그에게 남자는 진정한 사랑이 되었다. 남자에게 팔 걸고 싶은 여자, 그런 여자에게 뭇 남성들도 어깨 걸고 싶지 않겠는가.

딸아, 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말아라

푸른 나무 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려 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 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올리고

보름달 탐스러운 네 하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

그리고는 쉬이 쉬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한 여자야

(‘물 만드는 여자’ 전문)

이 시는 해외 여행 때 어느 전람회장에 걸린 여성의 오줌 누는 장면을 보고 시상을 떠올렸다고 한다. 애잔하면서도 장엄한 모성애를 마주하게 된다. 힘들고 지친 이 땅의 어머니들은 용기와 희망을 갖자는 완곡한 메시지.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가/오줌을 갈겨 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그럴 때일수록/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 올리고” 대지에다가 몸속의 강물을 틀란다. 그 강물이 흙속을 스밀 때 푸른 생명들이 잉태하는 소리를 들어보란다. 정말 ‘쓴내’ 나는 세상을 헤쳐온 어머니의 심정이 아니면, 세상의 안과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시야가 없었다면 떠올릴 수도, 감동할 수도 없는 시적 묘사다. 이 땅의 아낙들이 감내해온 슬픔의 깊이와 자비의 깊이가 동시에 느껴진다. 이런 ‘물 만드는 여자’들과 함께 사는 세상은 얼마나 행복한 세상인가.

신데렐라 문학소녀에서 두 아이 둔 야간학교 교사·여류시인 생활

그는 전남 보성에 태어나 비교적 ‘토호’였던 아버지의 교육열 덕에 시골 초등학교 분교 4학년생 때 광주 서석 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시골뜨기 소녀였지만 글짓기 대회에서 주는 상은 모두 그의 차지였다. 어릴 적부터 부모 곁을 떠난 탓에 외로움이 컸던 소녀. 그때마다 일기를 썼다. 전남여중 2학년 때 서울로 전학했다. 이때 오빠와 합류했다. 오빠는 서울대를 나와 미국 미네소타대학에서 수학한 엘리트. 그해 가을, 아버지의 부음을 접했다. 열네살 소녀는 처음으로 마을 사람들에 의해 아버지의 관이 묻히는 장면을 바라보며 삶의 허무를 접했다.

진명여고 1학년 가을, 숙제로 휘갈겨낸 ‘형광등’이라는 시 한편이 이화여대 주최 전국 여고생 백일장에서 입상했다. 이후 시·소설·희곡 등 여러 문학 장르를 넘나들며 대학 백일장에서 장원을 휩쓸었다. 고교 3학년 때까지 무려 스무개가 넘는 문학상을 차지했다. 이 무렵 서정주 시인의 서문과 함께 고교생 최초의 <꽃숨>이라는 시집을 냈다. ‘꽃숨’이란 꽃 피기 바로 직전 터질 듯한 몽우리를 말한다. 이렇게 미당과 기막힌 인연을 맺은 소녀 문정희는 전국 대학가에 유명세를 탔다. 미당이 교수로 있던 동국대 콩쿠르 ‘장원’으로 입상한 후 특례입학 요청을 받았고, 동국대에 들어갔다. 쾌활한 성격에 연애, 멋 부리기, 잘난 체하기 등 오만할 정도로 열정적 젊음을 발산했다. 여학생 대표도 맡았다. 대학 4학년 초여름에 창간된 <월간문학> 신인상에 ‘불면’ ‘하늘’이 당선돼 문단에 데뷔하기에 이르렀다.

등단 후 여성지 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뜬금없이 ‘결혼’이라는 것을 했다. 세상 사람들은 다시 한번 놀랐다. 신혼생활은 남편의 하숙집에서 시작했다. 미당이 주례를 섰다. 문단의 ‘신데렐라’ 문정희는 단숨에 벌거숭이가 된 아줌마로 돌변했다. 두달쯤 명성여중 야간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때야말로 세상 속으로 환원한 셈.

“소녀 시절의 문학적 재능과 오만한 처녀 시절을 기억하는 한 선배가 원고 청탁을 했을 때, 그 앞에 만삭의 여자가 되어 나타났어요. 그때 그의 눈가에 일어났던 경련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단칸방에서도 글쓰기 작업만은 멈출 수가 없었다. 불을 켜면 다른 사람이 깰까봐 기역자 모양의 군용 플래시를 켜고 그 불빛 아래서 원고지 칸을 채워갔다. 73년 첫 시집 <문정희 시집>을 냈다. 시에 대한 열정만은 어느 남성들의 가슴보다 뜨거웠다. 야간학교 흐릿한 불빛 아래서 깨알 같은 글씨로 시 쓰기를 반복했다. ‘댓닢사’라는 제목으로 시·시극집 <새떼>를 펴낸 게 그 무렵이다. 데뷔 7년째에 현대문학상을 받았다. 시와 함께 시극을 문예지에 자주 발표했고 손수 쓴 작품이 지금은 사라진 명동 예술극장 무대에 올려지곤 했다. 불과 몇해 전만 하더라도 국립극장 의뢰로 창극 <구운몽>을 썼을 정도로 이 방면에도 일가견이 있다.

팔방미인적인 그의 면모 밑에는 폭넓은 경험에서 기인한 넓은 시야가 있다. 그는 뉴욕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유럽 11개국을 도는 긴 장정에 나서기도 했다. 방송사와 잡지사의 청탁으로 스리랑카, 터키, 러시아, 카리브해 등 수많은 나라를 동행 취재했다. 이런 여행을 통해 변방문화와 세계문화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민족적인 것,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제기도 깊이 했다. 이후 그는 1∼2년마다 과감히 한번씩 여행길에 올랐다.

“삶에 있어 여행계획 짜는 게 중요한 일이 되었어요. 제 성질에 딱 맞아요. 살다보면 사방에 위험이 도사리잖아요. 그럴 때 잠시 모국어로부터 해방되어 제 자신을 들여다보고 갈고 닦는 거죠. 그러고 돌아와 보면 깊어지고 넓어지는 느낌을 받아요. …집시와 날라리가 아니면 당당하고 호쾌한 그 무엇으로 득음하고 싶은 거죠. 벼루가 늘 젖어 있는 사람만이 일필휘지할 수 있는 것처럼 이런 찬란한 자유혼, 자신감, 생명, 무한한 자연과 유쾌하게 사랑하면서 원고지 위에서 해결하는 길밖에 없잖아요. 이것은 오랜 경험으로 알게 된 거예요.”

디자이너 소니아 리키엘의 니트, 검정색 머플러, 은장신구, 샤넬 향수 NO 19과 같은 그의 세련된 패션적 기호들은 이런 해외에서의 떠돎을 통해 몸에 익힌 것이다. 3백여편이 넘는 영화와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감상했던 뉴욕에서의 나날. 세계적 앵커우먼 바버라 월터스가 찬바람 쌩쌩 부는 모스크바 광장에서 안개를 맞으며 전세계인들에게 브리핑하던 그 환상적인 모습에 반하기도 했다. 페미니즘에 대한 이론적 체계를 접한 것도 이 시기. 남녀간의 값싼 ‘사랑타령’이 아닌 남성과 여성간 성(性)의 본질적인 문제로 접근해 들어간 것이다. 남녀의 평등한 공존과 화해야말로 그가 꿈꾸는 것. 요즈음에도 후배 시인들을 만나면 빼놓지 않고 ‘평등’이라는 주제로 갑론을박을 한다. 사회 속 통념, 형식이란 껍데기를 깨기 위한 그이의 고행(?)은 참으로 끈질기게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문정희.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사랑시’ ‘연애시’의 대가다. 그는 무엇보다 쉽게 읽히는 시를 쓴다. 그이 역시 한때는 깊은 시, 독자 입장에서는 어려운 시를 제조하기도 했다. 평론가들을 그것을 문학성이 어쩌고 저쩌고 평하지만, 그는 최근 “시란 쉽게 써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고 한다. 그렇다고 밤낮없이 써대는 그런 시가 아니다. 항상 20여편의 시가 컴퓨터에 내장돼 있다. 여행과 떠돎을 통해 시가 적당히 익을 즈음에 한편씩 꺼내 시를 완성한다. 시가 쉽다고 시 속의 사랑마저 가벼울 수는 없는 일. 그는 요즈음 연애시에는 몸만 있고 가슴이 없다고 꼬집는다. 부모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을 주문한다. 사회적이고 민족적으로 확산된 사랑도 그속에 있다.

그 역시 유신시대라는 엄혹한 시기를 살았다. <새떼>에 수록된 3편의 시가 검열에 걸리기도 했다. 그래서 살고 있지만 사는 것 같지 않는 세상을 한탄했다. ‘그것은 무효’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무효다./이 침묵도 무효다.//강요당한 침묵의 밧줄./아, 아, 세상에/몸조차도/침묵으로 말하고 있다./내가 없다./그러나, 내가 살고 있다.//무효다./이 봄은 무효다”(‘선언’ 전문). 침묵하는 지식인을 나무라는 소리. 지성인으로서 이녁에 대한 자괴감, 비겁함에 대한 채찍. 권인숙씨 성고문 사건이 터졌을 때 자궁파열로 죽은 유관순을 주제로 한 장편시집 <아우내의 새>를 출간하기도 할 만큼 사회의식이 두텁던 그였다.

외국 여행에서 얻은 페미니스트의 안목과 강한 사랑

그러던 그가 80년대 먼 여행길에 올랐다. 외교관인 오빠의 도움과 <여성동아> 주최 불교국 순례 동행 취재차 난생 처음 밟은 외국 땅. 여행을 통해 육체와 정신 속에 잠들어 있던 감성의 세포가 한꺼번에 눈뜨는 충격을 받았다. 한편으로 5월 광주를 떠나온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 컸다. ‘군인들이 학생들을 쏴 죽이는 나라’에서 온 작가라는 주위의 시선, 그리고 가눌 수 없는 슬픔의 무게. 정신적 고통이 계속됐다. “시간이 갈수록/더 시퍼렇게 살아나는/이상한 무덤들 앞에서/흐르는 눈물조차 부끄러웠다”(‘부끄러운 날’)라는 시인의 고백.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학 석사과정을 공부했다. 참으로 힘들었다. 너무 외로웠다. 이국의 황무지에서 익명으로 내동댕이쳐진 자신의 모습은 처절했다. 날마다 망연자실했다. 비로소 모국에 대한 진실로 깊은 의미와 사랑을 실감했다. 역설적으로 그렇게 진한 사랑과 함께 강한 비판의 안목을 겸비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맏며느리로서 1년에 일곱 차례의 제사를 감당해왔던 그이. 지금도 시어머니 병치레를 도맡고 있다. 억척스런 어머니상을 드러내지 않고 세상을 보듬으면서 ‘사랑시’를 쓰는 그의 이면이야말로 진정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없다. 어쩌면 그건 정서적으로 “그 시절/당산나무 건너 새로 지은 분교”(‘책보와 가방’)의 시골뜨기 출신이기 때문일까. 작품 중에는 향토적 서정시들이 적잖다. 그 가운데 한편 ‘파꽃길’.

“흰 파꽃이 피는 여름이 되면/바닷가 명교리에 가보리라/조금만 스치어도/슬픔처럼 코끝을 건드리는/파꽃냄새를 따라가면/이 세상 끝을 닿는다는 명교리에 가서/내 이름 끝에 부르는 바다를 만나리라/어린 시절 오줌을 싸서/소금 받으러 가다 넘어진 바위/내 수치와 슬픔 위에/은빛 소금을 뿌리던 외가 식구들/이제는 모두 돌아가고 없지만/서걱이는 모래톱 속에 손을 넣으면/차가운 눈물샘은 여전히 솟으리니/조금만 스치어도/슬픔처럼 코끝을 따라가서/그리운 키를 쓰고 소금을 받으리라//넘실대는 여름바다에/푸른 추억의 날개를 달아주리라”

(‘파꽃길’ 전문)

아름다운 명교리, 그것은 우리 모두가 돌아가야 할, 그리고 돌아가고픈 인간의 고향이리라. “떠날 적마다 데리고 떠나도/그대로 남은” “죄같은 육자배기 보성”(‘고향생각’)은 실컷 울어도 좋을 원초적 고향이다. 그리움의 고향이다. 그래서 “바람 속에 쑥부쟁이 냄새 나는/그리운 고향에 가서/오늘은 토란잎처럼 싱싱한 호미를 들고/진종일 흙을 파고 싶다/…수줍음 타는 처녀가 되고 싶다”(‘그리움 속으로’). ‘착하고 따스한 눈매를 가진’ ‘수줍음 타는 처녀’가 ‘겨드랑이에서 정직한 땀내’를 풍기면서 말이다.

그렇게 문시인은 사랑을 키워드로 시를 써왔다. 시인 이전에 한 가정의 어머니로서 자식들을 일류대 졸업시키고 국제 변호사로 키웠다.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환갑을 향한 연륜의 그림자. 남부럽지 않은 자식농사에 이제는 더욱 홀가분한 집시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

위대한 예술가는 언제나 열렬히 사랑을 한 사람들이라고 했던가. 그의 20여권의 저작물 성과를 한마디로 갈무리하면 어느 유행가 제목처럼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고 말하고 싶다. 그는 지금도 지칠 줄 모르는 뜨거운 사랑을 하고 싶단다. “한철 후면 어김없이/까맣게 시든 꽃”이련만 “나도 이제 농담처럼/가볍게 사랑을 보내고 싶다”고 노래한다. “세상이 메말랐다고 하는데도/유쾌한 사랑도 의외로 많다”며 “대장간에서 만드는 것은/칼이 아니라 불꽃”이니 희끗희끗 설핏설핏 살지 말고 이 한세상 한번쯤 가열차게 사랑해보잔다. 이 한여름의 출렁이는 저 푸르디 푸른 젖가슴이 왈콱 터지도록 말이다.


    문정희 시인은....
 
1947년 전남 보성 출생, 동국대 국문과·동 대학원·서울여대 대학원(문학박사)을 졸업했다. 69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시가 당선돼 문단에 데뷔했고, 시집으로 <문정희 시집> <새떼> <찔레>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아우내의 새> <하늘보다 먼 곳에 매인 그네> <남자를 위하여> <오라, 거짓 사랑아> 등이 있고, 시극으로 <구운몽> <도미>, 시선집으로 <어린 사랑에게>, 산문집 <당당한 여자>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 등이 있다. 현대문학상·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고, 95년 미국 아이오와대학 국제창작 워크숍을 수료했으며 현재 동국대 겸임교수로 있다.

 

 

 

 

 

시인 문정희 “시는 영원한 업보, 또 끝없는 쾌락”

시집 ‘카르마의 바다’, 산문집 ‘문학의 도끼로 내 삶을 깨워라’ 동시 출간
입력 2012-09-28 오후 1:26:49

-여성신문 

 

▲    ©홍효식 / 여성신문 사진기자 (yesphoto@womennews.co.kr)
전주의 한 택시 기사는 “나의 신 속에 신이 있다 이 먼 길을 내가 걸어오다니”(‘먼 길’)를 땅에서 읊고, 이라크에서 서울로 귀환하는 장병들을 태운 비행기의 기장은 “왜 나는 너를 부를 때마다 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네 뒷모습에 대고 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아들에게’)라는 말을 하늘 위로 올려 보낸다. 취임과 퇴임의 변을 시로 대변했던 한 여성 대법관의 일화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우리 주위엔 시를 읊조리며 자기 위로의 주술을 거는 이들이 꽤 많다. 앞서의 실례처럼 대중이 애용하는 주술을 가장 많이 만들어내는 시인 중 한 명인 문정희(65·사진) 시인을 가을빛이 화창한 9월 24일 아침 강남 봉은사 그의 집 근처에서 만났다. 1969년 등단, 올해로 ‘정식’ 문학인생(진명여고 시절부터의 화려한 백일장 수상 경력과 여고생 최초의 시집 ‘꽃숨’의 이력까지 합치면 얼추 50년이다) 43년을 맞은 그는 서사시집 ‘아우내의 새’, 시극집을 포함해 최근 ‘카르마의 바다’에 이르기까지 14개의 시집을 펴내고, 또 14년 만에 시인의 심정을 소상히 담은 산문집 ‘문학의 도끼로 내 삶을 깨워라’를 내놓은 참이었다.

 

재 소녀 시인 미당의 사랑받아… 물·관능·탐미 탐색

 

 

 

그의 산문집 제목은 문학에 살고 문학에 죽을 것 같은 절박감을 흠씬 풍긴다. 부산의 한 문학 강연에서 “인생에서 무엇을 제일 소중히 생각하느냐”는 여성의 질문에 프랑스의 여성 소설가 조르주 상드의 말을 인용해 “첫째는 자식, 둘째는 나의 일, 셋째는 사랑”이라는 의외의 답변을 했다는 시인. 그의 말대로 인생의 시기에 따라 순위는 얼마든지 앞뒤가 바뀔 수도 있고, 이 절대 순위의 강박관념에서 해방되는 것이 바로 “소녀가 아니라 인생을 이해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는 방증이라는 넉넉한 태도에 부담이 한층 덜어졌다.

시인은 2년 만의 신작 제목에 감연히 ‘업보’라는 뜻의 ‘카르마’를 붙였다. 1993년 발표한 박사학위 논문 ‘서정주의 시 연구- 물의 심상과 상징체계를 중심으로’(서울여대)를 기점으로 그는 ‘물’의 이미지에 천착, ‘물의 시인’으로도 불려왔다. 지난해 가을부터 석 달간 한 작가 초청 프로그램에 참여해 물의 도시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지내면서 원 없이 물을 바라보고 담금질한 내밀하고 관능적인 언어로 ‘카르마의 바다’를 썼다.

“‘카르마’, 이것은 나에 대한 스스로의 선언이자 확신입니다. 그동안 대중과의 소통이 너무 무거워질까봐 이 제목을 망설이며 붙이지 못했죠. 그런데 지금 이 제목을 단호히 선택한 이유는 이제는 대중과의 소통에 그렇게 집착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자기 선언이라고나 할까요? 결국 시는 비밀문서, 연애편지 같은 존재니까요.”

‘카르마의 바다’가 출간 일주일 만에 재판을 찍었다는 것은 그에게 의외의 기쁨과 확신을 주었다. “문학이 본질로 가지 않으면 나도, 문학도, 시대도 같이 죽는다”는.

그는 잘 알려져 있듯이 미당 서정주가 인정한 천재 소녀 시인이었다. 여고생으로 20여 개의 백일장을 석권하며 한 백일장의 심사위원이었던 미당과 만났다. 당시 ‘플랭카드’란 그의 시에 장원을 주저치 않고 준 미당은 그의 등을 두드려주며 “빼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격려했다(“지금 내 가슴의 순수한 백지는 젖어가고 있다”로 시작되는 ‘플랭카드’엔 여고생의 눈으로 본 4·19 전후의 시대인식이 들어 있다. 시인은 “이제 두 동강이 나서 이젠 지표조차 희미해진 산하에 푸른 풍경화룰 꽂자고, 그리고 서투른 풍금 소리같이 나이 어린 자유여, 민주여, 결코 순백해야만 하는 어머니여”란 시구를 다시 되뇌며 “그 나이에 어떻게 그런 감성이 숨어 있었는지”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 인연으로 미당은 그의 첫 시집 제목으로 ‘아름다운 첫 숨결’이란 뜻의 ‘꽃숨’을 지어주고 이례적으로 여고생 시집의 서문을 써주었다. 미당은 “하늘 아래 네가 있도다”란 말로 그의 존엄성을 일깨우며 그가 주저 없이 문학에 뛰어들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해준 대스승이다. 자연스럽게 그는 미당의 탐미주의와 관능적 시어에 영향을 받았다. 그가 그토록 ‘물’에 집착했던 것도 미당의 영향이다. 미당은 생명의 원형으로서 물의 순환에 주목했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피, 눈물, 오줌 등 몸속 물이 눈물이 돼 빠져나가고, 아내의 정화수 기도가 돼 하늘로 올라가고, 이것이 비가 돼 다시 땅으로 내려와 그 물로 곡식을 길러내고 그걸 인간과 동물이 먹고 산다”는 것. 그의 물도 이 연장선상에 있다.

“난 그 ‘물’을 여성의 물, 여성의 생명성으로 봅니다. 자궁 속 물, 즉 양수가 그렇죠. 그래서 카르마의 바다는 우리의 시, 운명, 생명으로까지 확장됩니다. 미당에게서 가장 감탄하는 부분은 관능성입니다. 우리 시엔 탐미정신이 좀 부족하죠. 우리말로 관능적인 것을 표현하려다 보면 금세 더러워지는 느낌이고… 나도 부딪치고 또 부딪치는 고통을 겪었어요. 이번 ‘카르마의 바다’에서도 물과 관능을 연결해보려 했는데, 그만 ‘출렁이다 만’ 느낌이에요(웃음). 그러면서 또 실감하죠. 시라는 것을 주무르며 한 여자가 50년을 질주한다는 것이 쉽지 않구나 하는 것을요. 언젠가는 탐미와 관능의 미의식이 충만한 시작을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문학은 재능 99%에 노력 99%의 어울림, 더도 덜도 아니다”

햇살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文字)

“응”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시 ‘응’ 중

그의 시는 관능적이란 평을 많이 받는다. 대표적인 시가 ‘응’이다. 글자의 형태만 봐도 남녀의 성관계를 오묘하게 연상시킨다고도 한다. 그는 여기에 ‘평등’을 강조한다.

“이 시엔 에피소드가 있어요. 샤워를 하고 있는데 문자가 왔어요. 휴대전화를 바꾼 터라 문자 보내기가 쉽지 않았고 급한 마음에, 그리 친근한 사이도 아닌데 ‘응’이란 문자를 보냈죠. 그랬더니, 상대편 왈, 그 문자를 보는 순간 심장이 터질 것 같더래요. 새로운 문자 시대와 매체의 어울림이죠. 구체적인 대답보다는 나의 시 역시 현대적인 매체 위에 둥둥 떠 있다고나 할까요. 누군가는 ‘시가 시인에게 나 하고 싶어, 물으니 시인의 대답이 응’이었다며 시와 시인의 대화같다고도 평했죠. 사실, 속물적 유혹이 올 때마다 시에 물으면 시의 대답은 늘 ‘좋은 시 한 편!’이에요. 그것이 시와 무슨 상관이냐는 거죠. 그래서 샛길로 빠지지 않게 해준 시에 너무나 감사해요.”

그에게 이는 궁금증 중 하나는 ‘천재 시인’의 중압감을 어떻게 극복했을까다. 너무 빨리 알아버린 찬탄의 맛, 잊기도 버리기도 버거웠으리라. 20대 시인으로선 처음으로 현대문학상 수상 기록을 세우기도 했지만, 그리 큰 도움은 못 됐을 것 같다.

“초기엔 등단 때 받은 스포트라이트의 추억을 7~8년간 간직하고 있었는데, 이걸 다 버리면서 중압감을 극복했어요. 그건 나의 젊은 날의 하나의 추억일 뿐, 계속 가지고 있었더라면 문학의 세계로 못 들어갔겠죠. 그 추억 중에 정말 좋은 것 하나만 간직하면 돼요. 문학은 재능 99%에 노력과 연습 99%가 더해지는, 그 외에는 어떤 것도 더 중요하지 않은 존재입니다. 모든 작가는 내가 과연 재능이 있을까, 내내 의심하고 또 고민하죠. 그런데 난 어린 시절 경험을 통해 그냥 자연스럽게 ‘난 재능이 있다’로 결론 내버렸어요. 그래서 소모적 고뇌를 하나 던 셈이죠.”

그는 20대 말 현대문학상을 받은 이후 8년의 긴 공백기를 거쳐서야 새 시집을 내놓았다. 젊고 왕성하고 의욕도 치솟았던 반면 광주항쟁의 후유증도 깊었다. 시대적으로 서정시는 안 되겠다는 절망감도 느꼈다. 다행이라면 1982년부터 2년간 뉴욕대에 다니며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뉴욕 생활을 하며 다양한 문화적 충격, 그중에서도 여성학과 조우한 경험이다. 당시 여성학자 케이트 밀레트, 피임운동을 펼친 마거릿 생어 등 여성해방운동 최전선에 선 여성들의 삶을 접할 수 있었다. 귀국해보니 한국엔 이미 이화여대 여성학과를 중심으로 여성학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여성 작가 중에도 여성적 통찰과 시대적 자각이 부족한 상태로 시를 쓰는 이들이 꽤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의 시 중엔 “나는 일찍이 이 땅에 남자로 태어나지 못했네 PK도 아니었고 TK도 아니었고 물론 MK도 아니었지 KS도 못 되었네”로 시작하며 스스로를 남성 중심 세계에서 소외된 왕따로 자각하는 동시에 이를 축복으로 여기는 ‘내가 찾은 골목’이란 시가 있다. 그는 스스로를 ‘

 

 

문정희 시인의 "딸에게 쓴 글"

호랑이 눈썹을 빼고도 남을 그 아름다운 나이에 무엇보다도 연애를 해라. 네가 밤늦도록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두드리거나 음악을 듣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몹시 흐뭇하면서도 한편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단다. 그동안 너에게 수없이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마는, 또한 음악이 주는 그 고양된 영혼의 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마는,
그러나 책보다 음악보다 컴퓨터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역시 사람이 사람을 심혈을 기울여 사랑하는 연애가 아니겠느냐. 네가 허덕이는 엄마를 돕겠다 는 갸륵한 마음으로 기꺼이 설거지를 하거나 분리된 쓰레기 봉지를 들고 나갈 때면 나는 속으로 울컥 화를 내곤 한단다.

딸아! 제발 그 따위 착한 딸을 집어치워라. 그리고 정숙한 학생도 집어치워라. 너는 네 여학교 교실에 붙어 있던 신사임당의 그 우아한 팔자를 행여라도 부러워하거나 이상형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닐 테지. 혹은 장차 결혼을 생각하며 행여라도 어떤 조건을 염두에 두어 계산을 한다거나 뭔가를 두려워하며 주저하고 망설이는 것은 아닐 테지.

딸아! 너는 결코 그 누구도 아닌 너로서 살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당당하게 필생의 연애에 빠지기 바란다. 연애를 한다고해서 누구를 카페에서 만나고 함께 극장에 가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그런 종류를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리라. 그런 것은 연애가 아니란다. 사람을 진실로 사귀는 것도 아니란다. 많은 경우의 결혼이 지루하고 불행한 것은 바로 그런 건성 연애를 사랑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딸아! 진실로 자기의 일을 누구에게도 기대거나 응석 떨지 않는 그 어른의 전 존재로서 먼저 연애를 하기를 바란다. 연애란 사람의 생명 속에 숨어 있는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푸른 불꽃이 튀어나오는 강렬한 에너지를 말한다.
그 에너지의 힘을 만나보지 못하고 체험해보지 못하고 어떻게 학문에 심취할 것이며 어떻게 자기의 길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냐. 그러나 세상에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렇듯 깊고 뜨겁고 순수한 숨결을 내뿜는 야성의 생명성을 제대로 맛보지 못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솔직하게 말못할 것도 없다. 나는 아직도 제일의 소원의 하나로 연애를 꿈꾸고 있단다. 오랫동안 시를 써 왔지만 그보다 더 오랫동안 수많은 덫과 타성에 걸려서 거짓 정숙성에 사로잡혀 무사하게 살아왔다. 지금까지의 대부분의 여성의 삶이라는 것이 그런 범주였다는 것은 너도 잘 알고 있으리라.

딸아! 지금 막 코앞에 다가오는 세기는 틀림없이 여성의 세기가 될 거라고 한다. 어서 네 가슴 속 깊이 숨쉬고 있는 야성의 불인 늑대(archetype)를 깨워라. 그리고 하늘이 흔들릴 정도로 포효하며 열정을 다해 연애를 하거라.

- 시인 문정희

 

 

 

 

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 문정희 시인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

기사입력 : 2015-03-30 10:

한국시인협회장 문정희(文貞姬·68)

[이투데이 브라보마이라이프 이지혜 기자]솔직담백하고 독창적인 문체로 사랑받는 시인 문정희(文貞姬·68). 그런 그녀가 인간적으로 가장 사랑하는 시인은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1973)’다. 네루다의 자서전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를 펼쳐 든 순간 그녀는 자유분방하고 낭만적인 그의 삶을 동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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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인협회장 문정희 시인. 신태현 기자 holjjak@

일탈을 위한 동기부여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네루다의 자서전을 만난 그녀는 적대적이고 경쟁에 빠진 언어를 사용하는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명쾌하고 자유분방한 시인의 사고가 점점 커지고 거대한 정신을 이루는 과정을 읽어 내리며 시인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이 솟구쳤다.

“내가 살고 있는 삶이 너무 진부하고 권태스럽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잖아요. 특히 나이가 들수록 일상에 매몰되고, 삶의 상투성에 휘몰리기 마련이죠. 그럴 때면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데, 중년은 도전이 두렵고 일상을 탈피하기 어려울 수도 있어요. 많은 사람이 그런 중년들에게 ‘현재에 만족해라, 감사해라’라고 위로를 하죠. 하지만 이런 메시지에 안주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해야 해요. 자꾸 생각을 전환하려 하고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죠. 나 역시 ‘이건 아니지. 인간이라면 좀 더 다른 삶이 있겠지. 새로운 게 없을까?’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를 읽으면 우리네와는 다른 사고를 하고 자유분방하게 살았던 네루다의 삶이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극이 되죠. 나도 일상을 탈피해 새로운 생각을 하고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동기부여도 생기고요.”


자유로운 사랑을 노래하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사랑의 노래> 중 ‘사랑은 이다지도 짧고 망각은 그렇게도 길다(Love is so short, forgetting is so long)’라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그녀는 얼마 전 그에 대한 화답으로 ‘이 세상 모든 사랑은 무죄’라는 시구를 썼다. 사랑의 기쁨뿐만 아니라 그 아픔까지 달콤하게 노래하는 그녀에겐 거침없이 자유로운 사랑에 대한 갈증이 남아 있었다. 

“정말 밤을 꼴딱 새워가며 읽었어요. 무엇보다 자유분방하고 저돌적인 그의 연애 이야기가 참 흥미로웠죠. 네루다가 전하는 사랑에 대한 감정과 일화들을 읽다보니, 나의 옛 추억과 사랑도 떠오르고 여러모로 재밌는 상상을 하며 읽었어요. 그는 칠레시인인데 확실히 남미의 감수성이라는 게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이 자유롭고 솔직하더라고요. 그는 ‘여인’이라는 존재를 아름다움의 마지막 개념으로 생각하고 사랑 노래를 써냈는데 그것 또한 참 인상적이었어요. 그런 면에서 보면 저는 한국의 시인이고, 머릿속으로는 자유롭지만 한국의 문화와 교육에 길들었기 때문에 그처럼 자유분방한 연애감정을 풀지 못했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무척 아쉽고 때론 한스럽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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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의 내지에 적힌 문정희 시인의 메시지.

가보고 싶은 나라, 칠레 

그녀는 ‘여행이란 이 세상에서 발견한 가장 뜨겁고 황홀한 즐거움 중 하나’라고 말한다. 네루다 자서전의 배경인 ‘칠레’는 그런 그녀의 가슴을 한껏 들뜨게 하였다.

“책을 읽는 내내 길고 긴 바닷가에 접한 칠레라는 나라가 무척 사랑스럽게 느껴졌어요. 꼭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로망이 생겼죠. 네루다의 자서전에 펼쳐진 칠레는 가난하지만 따뜻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곳이에요. 재미있는 일화가 한 가지 나와요. 한 사람이 기차에 몰래 무임승차했는데 갑자기 검표원이 오지 뭐예요. 그러자 그이는 어깨와 다리를 구부리고, 주변 사람들은 그의 등 위에 담요를 얹어 능청스럽게 카드놀이를 하기 시작했어요. 검표원은 그 숨은 사람이 탁자라고 착각하고 지나갔죠. 자칫 어둡게 그려질 수도 있는 상황인데 너무나 유쾌하고 인간미 넘치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런 이야기만 보아도 칠레라는 나라가 너무 재밌고, 가난을 피투성이 나게 생각하지 않고 유머러스하게 극복해나가는 모습이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살아 있다는 것은 

그녀는 최근 내놓은 시에세이집 <살아 있다는 것은>에서 ‘나는 여든 살까지만 젊고, 아흔 살까지만 아름다울까 보다’라는 말을 했다. 그녀가 말하는 젊음과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그 의미가 궁금했다. 

“생명이 붙어 있는 한은 젊고 아름답겠다는 거죠. 사람들은 ‘젊다’, ‘아름답다’는 것을 너무 나이에만 기준을 두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여든 살을 먹은 소년도 보았고, 서른 살을 먹은 영감도 보았죠. 실제 나이나 외모로 판단하기보단 그 사람의 정신세계나 감각이 얼마나 젊은지를 볼 줄 알아야 해요. 얼마 전 카페에 차를 마시러 갔다가 들어보니까 옆에 앉은 아가씨들이 결혼 혼수 이야기만 그렇게 하더라고요. 그래서 속으로 ‘아이고, 저런 늙은이들이 다 있나’하고 생각했어요. 로맨틱한 감성이 아닌 소유에만 사로잡혀 있는 그들의 모습은 ‘늙은이’나 다름없죠. 그런 계산적인 사고보다는 현재를 더 풍부하게 느끼고 깊이 고민하려는 자세가 필요한데 말이죠. 저는 현재를 가장 젊게 소유하려 해요. 얼마 전에 책에서도 썼지만 그 말은 즉 ‘살아 있다는 것’이고, ‘깨어 있다는 것’이죠. 우리에게 시간은 언제나 새것이에요. 그래서 매 순간 호기심을 잃지 않고 많은 것을 느끼려 해요. 순간을 놓치며 사는 건 영원을 놓치며 사는 것과 같죠. 오직 이 순간만이 나의 전부니까요.” 

 

 

 

문정희 시인 , 한국시인협회 신임회장에 취임

      • 박현주 기자
      • | 등록 : 2014-09-04 16:52
      • | 수정 : 2014-09-04 16:52 
       

      [문정희 시인] 

      아주경제 박현주 기자 = 문정희(67) 시인이 4일 사단법인 한국시인협회 제40대 신임 회장에 취임했다. 
       
      한국시인협회는 지난달 26일 평의원회의를 열고 고(故) 김종철 회장의 별세로 공석이 된 신임 회장에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장인 문 시인을 추천, 이날 등기이사회의 인준을 받았다고 밝혔다.
       
      문 신임 회장은 전임자의 잔여 임기 기간인 오는 2016년 3월까지 회장직을 맡는다.
       
      1947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문 신임 회장은 동국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서울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9년 '월간문학'을 통해 등단한 뒤 시집 '꽃숨'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아우내의 새' 등의 시집과 '사색의 그리운 풀밭' '사랑과 우수의 사이' 등의 수필집을 냈다. 제1회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육사시문학상 등을 받았다. 마케도니아 국제 시(詩) 축제 최고작품상, 레바논 나지 나만 문학상, 스웨덴 시카다상 등 해외 시문학상도 여러 차례 받았다.

       

       

       

       

       

      둥단 40주년 시선집 출판

      -중앙일보

      -2014년 9월 19일

       

       

       

       

       

       

      유인경이 만난 사람]문정희 시인

      “시는 혁명, 정신혁명 일으킬 시 너무 드물어”

       

       

       

      요즘 문정희 시인에게 전화하면 “지금 베니스예요” “여기는 스웨덴”이란 답이 올 때가 많다. 세계 각국에서 열리는 각종 문학축제나 토론회, 시인의 행사 등에 초청받아 간 것이다. 그의 시집은 8개 언어로 번역돼 10개국에서 발간됐다. K-팝이나 드라마만 한류가 아니다.

      문 시인은 가장 대중적으로 친숙한 시인이기도 하다. 전수안 대법관은 그의 시 <먼길>로 퇴임사를 대신했고, 이라크로 파병 가는 비행기에서는 그의 <아들에게>란 시가 낭송되기도 했다.

      외계어 같은 인터넷 용어나 짧은 문자 메시지가 가득한 요즘 시대에 시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아니 우리 삶에서 시는 어떤 역할을 하는지, 무엇보다 시인은 어떤 삶을 사는지가 궁금해 가을이 시작되는 길목에서 문정희 시인을 만나야 했다.


      국내보다 해외에서의 활동이 더 활발합니다.
      “경제인이나 연예인도 아닌 시인을 외국에서 자주 초청해주는 것은 감사한 일이죠. 올봄에 프랑스의 유명한 예술전문방송인 아르테 텔레비전에서 <기적을 이룬 한국>이란 5부작 프로그램 가운데 시의 소재가 된 제 서재를 소개하겠다며 찾아와 촬영했습니다. 기적을 이룬 한국인 가운데 시인을 선정한 것만으로도 기뻐 흔쾌히 응했죠. 6월에는 스웨덴 스톡홀름대 초청으로 시낭송을 했고, 7월에는 일본 조사이 국제대학에서 한·중·일 시인들이 모여 생명을 주제로 토론을 했습니다. 9월에는 중국 사마천학회의 초청으로 중국에 가고 11월에 다시 일본에서 이토 히로미 시인과 여성의 몸을 주제로 토론을 합니다. 제가 아니라 한국시에 대한 관심이겠지요.”

      그 나라의 정서, 삶, 역사를 함축한 시가 외국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소통되는지 궁금합니다.
      “물론 우리 시가 외국인들에게 제대로 알려지려면 좋은 번역이 전제가 돼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삶이 이미 세계인으로서의 보편성에 노출되어 있어 우리 시가 외국에서도 공감대를 형성하고 호응을 이끌어내는 데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우리도 보들레르, 로르카 등의 번역시를 읽고 감동을 느끼지 않나요. 시라는 개념 자체가 서구적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한국어로 낭송을 해도 외국인들이 감동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시인들끼리는 서로 동지애, 자매애를 느껴 소통에 문제가 없습니다. ‘시는 인류의 모국어’란 말도 있잖아요.”

      그런데 왜 유독 문 시인을 외국에서 많이 찾을까요.
      “한국의 언어는 정감의 언어입니다. ‘이쯤 하면 알아듣겠지’ 하며 너무 함축된 시어를 쓰거나 민족시 등을 고집하면 외국인들에게는 이질감을 주죠. 제 시가 외국에서 인정받는 것은 명료하고 논리적이고 분명한 것을 표현하려 했기 때문일 겁니다. 정확한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또 저는 외국에 가면 그 나라를 철저히 공부하고 갑니다. 아마 학창시절에 그 정도 공부했으면 고시도 충분히 합격했을 거예요. 그렇게 그 나라에 대해 이해심을 갖고 쓴 시는 당연히 그들에게도 받아들여지고 서로 공감대를 나누게 됩니다.”

      영화 <변호인>의 감독은 한 시대의 아픔이 문학이나 문화로 남겨질 때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면서 IMF사태 같은 국가적 고통을 겪고도 왜 그걸 다룬 문학작품이 없는지 안타깝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한국 시인들은 여전히 꽃·별·사랑만 노래하는 경우가 많아 보입니다.
      “공자는 ‘국가의 불행은 시인의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재료가 많기 때문이죠. 저는 한국전쟁 무렵에 태어나 4·19 혁명과 5·16 군사쿠데타, 10월 유신과 5월 광주를 거쳐 1997년 경제위기까지 겪었습니다. 미국 시인들은 ‘내 장난감은 탄피와 수류탄이었다’는 제 얘기에 무척 놀랍니다. 환경을 보면 한국 시인은 정말 축복(?)받은 셈입니다. 또 시는 언어를 재료로 만드는 요리입니다. 현실의 구조를 투시하는 힘이 있고 그것을 언어를 통해 시화시키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너무 서정시가 많다면 우리 시인들이 현실 투시에 소홀하다는 방증일 겁니다. 그런 사회문제에의 관심보다 정감이나 자기호소, 교훈에 몰두하는 한국시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고요. 시는 혁명입니다. 그런데 무혈의 정신혁명을 일으킬 시가 너무 드물죠. 발레리가 스승 말라르메에게 ‘시를 어떻게 씁니까’라고 묻자 스승은 ‘고독이 하는 소리를 받아 적어라’란 답을 합니다. 고독의 권리를 잊거나 잃어버린 이들, 문명의 과잉과 정보 과잉이 시인들에게는 독 묻은 사과 같은 재앙입니다. 모두 바빠 허둥대지만 가장 필요한 정신을 망각합니다. 물이 흘러넘치는 홍수가 날 때 정작 필요한 것은 인간이 마실 한 잔의 생수죠. 시는 그런 생수 역할을 해야 하고, 시인은 생수를 만드는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문화는 과잉이지만 정서적으로 황폐화된 현대, 특히 한국처럼 양극화가 심각하고 상처가 많은 우리들에게 시는 어떤 역할을 할까요. 시를 한 편 읽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요즘 자연과 환경파괴를 우려하지만 가장 파괴된 것은 인간입니다. 아마존 밀림보다 더 황폐해진 것이 인간의 정신과 마음이 아닐까요.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 나왔을 때 프랑스 문맹률은 45%,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발표했을 때 러시아는 90%가 문맹이었습니다. 문맹의 시대에도 고급스럽고 귀중한 언어들이 쏟아져나와 문학의 골격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시를 읊조린다 해도 잠시 위안은 받아도 치유는 되지 않죠. 아무개 시인의 시를 읽고 위로받는 건 자그마한 밴드로 심장병을 고치는 것과 같습니다. 우선 시인들의 시를 자주 접해 시어에 익숙해진 다음에 나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 자체가 자기 치유입니다. 거기에 문학의 기쁨이 있어요. 상투에 길들여진 언어를 걷어내고 내면에 솟아난 신선한 샘물을 만나는 게 문학이니까요. 일기건 습작이건 자기 언어를 만드는 것이 바로 모두 시인이 되고 스스로를 치유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시인과 달리 유독 남성성과 여성성, 섹스를 다룬 작품이 많습니다. <남자를 위하여> 등 남성을
      위로하는 시도 많고요. 특히 ‘세상의 사나이들은 기둥 하나를/세우기 위해 산다/좀 더 튼튼하고/좀 더 당당하게/시대의 밤을 찌를 수 있는 기둥/(중략)천 년 후의 여자 하나/오래 잠 못 들게 하는/멋진 사나이가 여기 있다’란 <사랑하는 사마천의 당신에게>는 인상적이었습니다. 정말 기둥 하나 세우려고 별별 짓을 다하는 졸렬한 남성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맞아요. 천 년 전에 남근을 잘리는 궁형을 감수하며 역사에다 진정한 큰 기둥을 세운 사마천 같은 남자가 있는가 하면 고작해야 남성적 에너지의 강화를 위해 그런 끔찍한 짓을 하는 남성들이 있다니…. 어떤 이는 ‘Pen is Penis’란 말로 문학이나 언론에서의 남성 우월주의를 말합니다만, 제게 펜은 피입니다. 생명의 피죠. 오늘날 시를 쓰며 남자를 통과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시를 쓰기 어려워요. 남성을 이해하고, 남성의 원형질을 살려주는 것도 시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성 공격은 여성학 초기에나 다루는 것이고 이제는 여성이 갖고 있는 생명의 원형질로 서로를 감싸줘야 해요. 남성과 여성은 더불어 살아야 할 존재이니까요.”

       

       

       

       

       

      진명여고 시절에 백일장을 휩쓸며 ‘천재 문학소녀’로 불리고 미당 서정주 선생으로부터 극찬을 받았습니다. 대부분의 ‘소년 천재’는 그 무게에 짓눌려 불행해지거나 이름도 없이 사라지던데 지금도 승승장구하는 비결은 무엇인가요.
      “청소년 시절엔 저도 우쭐하고 착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재능과 영광은 그저 추억거리로 밀어두었습니다. 문학은 직장처럼 시간이 흐르면 과장, 부장으로 승진하는 미래가 보이는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목숨처럼 시에 매달려 왔죠. 그 과정에 얼떨결에 결혼을 하고,(왜 가장 중요한 선택은 제일 허술하게 할까요) 치마 뒤집어쓰고 인당수에 뛰어든 심청이의 심정으로 제 선택에 책임을 졌어요. 결혼, 출산, 양육 등 한국의 전형적인 가부장제에 함몰되어 넋이 빠진 삶을 살았지만 그 사이에 10월 유신, 광주를 겪으며 사회의 고통을 느꼈고, 아우내장터에 가서 유관순을 기억하며 ‘왜 난 소리를 못 지를까, 왜 난 미치지 못하나’란 회의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30대에 미국 뉴욕으로 유학을 떠났어요. 모국어를 잠재우니 저는 시인이 아니라 그저 영어 못하는 아줌마더군요. 물론 나중에는 그게 언어로부터 자유로운 계기가 되었지만요. 미국에서 예술적 자극과 개안, 고정관념이 사라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8년 동안 시인으로 공백을 가진 후 다시 공부해서 본질로 승부하는 정공법으로 시를 썼습니다. 다들 제가 엄청나게 문학상을 휩쓴 걸로 아는데 우리나라 390개의 문학상 가운데 그렇게 많은 상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돌아보면 제 전 재산은 도처에 깔린 외로움과 고통과 위험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시에 찔리며/낚시바늘 입에 물고 온 몸 파득거리며/내가 가는 길/그래도 나는 시 몇 편을/통행세로 바치고 싶다’란 시 <통행세>를 썼어요. 그게 시인의 삶입니다.”

      고정관념이겠지만 대부분의 여류시인은 조신하고 옷차림도 단아한데, 문 시인은 온몸을 휘감는 스카프, 엄청난 크기의 반지, 집시처럼 부풀린 헤어스타일 등 세련된 연극배우 같은 분위기입니다.
      “이미지가 화려하죠. 그래서 ‘내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길에 나서면/사람들은 멋있다고 말하지만/나는 그녀의 상처를 덮는 날개입니다/쓰라린 불구를 가리는 붕대입니다’로 시작되는 <머플러>란 시도 썼습니다. 실은 뚱뚱해진 몸을 가리기 위해 스카프를 애용합니다만…. 외국에 가면 시장에 가서 스카프나 반지를 사는 것이 취미이자 제게 주는 선물입니다. 10달러, 20유로 정도의 저렴한 가격이지만 저를 행복하게 해주니까요. 외양은 화려해 보이지만, 저는 가사도우미도 두지 않고 사는 주부입니다. 평생 결핍감이 없어 보이는 얼굴이긴 하지만 시인은 항상 스스로 절제하고 유배시켜야 합니다.”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한계령쯤을 넘다가/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한계령을 위한 연가>, ‘사랑에 은퇴하고/가을 하늘처럼 투명해지면/터키석 반지 사러 터키에 가고 싶다’<터키석 반지>,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돌아누워 버리는/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남편> 등 연애에 관련한 시가 많습니다. 아직도 연애를 꿈꾸십니까. 아니면 진작 은퇴하셨나요.
      “위장 은퇴했습니다.(웃음)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씨도 타계하기 전, 부자유한 몸을 휠체어에 맡긴 채 마지막 인터뷰에 응하면서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조금도 주저없이 ‘연애!’라고 대답했죠. ‘해도 자꾸 더 하고 싶은 것이 연애야’라면서요. 모든 예술가들에게 연애감정은 원천적인 힘입니다. 곧 나올 시집 <응>은 연애보다 더 강도가 높은 걸요. ‘햇살 가득한 대낮/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네가 물었을 때/꽃처럼 피어난/나의 문자(文字)/“응”//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그건 문학이고 상징이지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제가 어릴 때 모 선배의 연애스캔들을 목도했을 때 아름답지 않고 흉해 보이더군요. 저도 숱한 연애로 유명한 조르주 상드의 말처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의 순위는 첫째 아이들, 둘째 일, 다음이 사랑입니다. 오죽하면 무용가 홍신자씨가 저보고 ‘당신은 입은 (세련된) 유럽인데 몸은 (개발이 안 된) 아프리카’라고 했을까요. 하지만 시인이어서 숙명적으로 가슴속에는 항상 연애가 진행 중입니다.”

      문 시인이 존경받는 이유는 연애시만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을 표현한 시, 혹은 통찰력이 넘치는 시를 썼기 때문입니다.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되고 싶은 권력의지는 없었습니까.
      “장관보다 시인이 더 영광스럽습니다. 문학은 생래적으로 이상을 추구합니다. 현재가 낙원이라고 하더라도 좀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끝없이 부정하고 저항해야 하죠. 문학이 권력을 사랑하는 방법은 찬사나 칭송이 아니라 질문과 비판과 저항이에요. 어용이나 관변작가는 침묵의 비겁자입니다. 진정 살아 있는 정신을 원한다면 권력자도 어렵지만 문인들의 그런 날선 질문, 진정한 사랑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문정희 시인은 “문학의 본질은 질문하는 것”이라면서 “내가 누구이며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나란 질문을 계속 던지고 내면의 갈증을 해소하는 문학 없이는 진흙탕을 헤매는 돼지의 삶과 같다”고 했다, 문 시인의 명징한 말보다 그의 큼직한 돌반지에 자꾸 눈길이 가는 걸 보면 난 돼지임에 분명하다.

      <글·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나 옷 벗어요/ 그다음도 벗어요// 가고 가고 가는 것들 아름다워서// 주고 주고 주는 것들 풍요로워서// 돌이킬 수 없어 아득함으로/ 돌아갈 수 없어 무한함으로// 부르르 전율하며/ 흐르는 강물// (‘물시’ 부분)

       

       

      책을 가까이 하고 싶은 계절이다. 서점에 깔린 수많은 책 가운데 한 권의 시집을 집었다. ‘카르마의 바다.’(문예중앙) 세상을 향해 늘 당당하고 우렁찬 목소리를 낸 문정희 시인의 신작이다. 이번에는 어떤 남다른 메시지를 담았을까? 시인의 새로운 육성이 궁금했다.

       

      달콤한 가을 햇살이 비치는 서울 강남의 한 까페에서 그를 만났다. 시집과 더불어 산문집 <문학의 도끼로 내 삶을 깨워라>(다산책방)도 14년만에 출간했다. 지난 2011년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이탈리아 카 포스카리 대학이 주관하는 예술가 프로그램에 초청받아 3개월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머물며 <카르마의 바다>를 썼다. 카르마(carma)란 불교용어로 업보(業)를 뜻한다. 카르마와 바다는 어떤 관계일까.

       

       

      “물”

       

      “사람이 흘리는 한 방울의 눈물 속에는 많은 의미가 있어요. 우리가 물을 마시고 그것이 내 몸속에 들어가 나의 슬픔과, 감동과, 사랑과 융화되면서 눈물로 나오기까지는 정말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고 한편으론 수세기가 담겨있다고 할 수도 있죠. 물이 몸에 들어가고 또 나오고 그것이 강으로 흘러가 바다가 되고 또 생명수가 되었다가 다시 눈물이 된다는 점에서 물의 카르마는 대단해요.”

       

      43년간 시를 써온 그에게 물은 익숙한 소재였다. 스승 미당 서정주의 시를 물의 이미지로 해석해 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물에 대한 깊이 있는 탐색을 해왔고 오랜 기간 내공을 쌓아온 저력이 물과 언어의 만남을 빚어냈다. “물은 우리 몸의 70%를 이루고 있고, 지구 역시 물로 뒤덮여 있지요. 그리고 물은 곧 생명이에요. 화성에도 물이 있느니 없느니 궁금해 하는 것도 생명과 연관되기 때문이에요.”

       

       

       

      ⓒ 손예운 _눈물은 인간이 흘리는 가장 작은 바다이다.

       

       

      “여성”

       

      문 시인의 창작열은 긴 세월에 걸쳐 이어져왔다. 고등학교(진명여고) 재학 중 백일장을 석권하며 주목을 받고 여고생으로서는 최초로 첫 시집 <꽃숨>을 발간했고 1969년에 시인 서정주와 박목월의 추천으로 문예지 '월간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문단에 등단했다. 어려서부터 ‘날리던’ 문학소녀였던 그의 열정은 물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나라 사회 구조상 여자들은 결혼과 출산을 하면 더 이상 시를 쓰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아직까지 시를 쓰고 있다는 자체에 그는 성공의 의미를 둔다. 왕성한 시작(詩作) 활동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그는 ‘호기심과 겸손함’ 이라고 답했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 공부하고 또 공부하며 문학에서의 근본인 읽기와 쓰기를 끊임없이 연마했다. 1982년 두 아이를 데리고 뉴욕에서 유학한 것도 인접예술장르와 세상에 대한 눈을 넓히고 소통의 두려움을 떨쳐 한 단계 성숙한 시인의 길로 나아가게 된 계기였다.

       

      “뉴욕에 있다 보니 우리나라를 나무가 아니라 숲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생기더라구요. 우리나라가 세계화되고 의식구조가 글로벌화 되니 나의 시세계도 청승맞음이나 우리만의 정서에 머물지 않고 좀 더 보편적인 정서에 노출되었던 것 같아요. 귀국해서는 사회 민주화와 함께 억압받는 여성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해 노력했지요.”

       

       

      “남성”

       

      이 쯤 해서 지난 학기 ‘시문학’ 수업에서 들었던 ‘문정희: 에코페미니즘(eo-feminism)적 시세계’라는 주제가 떠올랐다. 이 시대의 생명파괴를 문제 삼는 생태학과 여성주의가 결합되어 한 단계 발전된 형태가 에코페미니즘이다. 즉 페미니즘이 학문적 갈래로서 흑인과 백인 또는 종교적 차별처럼 남자와 여자에 관한 일종의 인권 운동에 해당한다면 에코페미니즘은 모든 차별을 더 큰 눈으로 바라보면서 생명의 존엄과 평등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자신의 문학 사상에 대해 “저는 무작정 여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본래의 위대함을 노래하고 그것을 문학의 테마로 삼아온 것이지요.” 라며 설명했고 “여성성 안에는 대지(大地)적인 무한한 생명력이 있는데, 거기서 여성의 본질을 찾을 수 있어요.” 라고 덧붙였다.

      그의 시집 중에는 남성성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남자를 위하여>도 있다. 용감함을 기대한 나머지 울면 남자답지 못하다는 식으로 제약하고 있는 게 현실인만큼 남자들을 그런 사회적 억압에서 해방시킬 필요가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여자와 남자는 더불어 살아가야하는데 서로를 무작정 공격한다는 것은 좋지 않다는 차원에서 남자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시를 썼다고 한다.

       

      문 시인은 요즘 빈번한 성폭력 성범죄 문제에 대한 지적도 했다.

      “많은 남성들이 성에 대해 야성적이고 동물적인 것이 남자다움의 상징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사회로부터 길들여짐의 문제에요. 여성성 남성성 모두 아름다우며 서로 아껴야해요.”

       

       

      호랑이 눈썹 빼고도 남을 그 아름다운 나이에 무엇보다도 연애를 해라/ (중략) 내가 가끔 설거지를 하거나 분리된 쓰레기 봉지를 들고 나갈때면 나는 속으로 울컥 화를 내곤 한단다/ 딸아! 제발 그 따위 착한 딸을 집어치워라. 그리고 정숙한 학생도 집어치워라/ 너는 네 여학교 교실에 붙어있던 신사임당의 우아한 그 팔자를 행여라도 부러워하거나 이상형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닐테지/ 딸아! 너는 결코 그 누구도 아닌 너로서 살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당당하게 필생의 연애에 빠지길 바란다// (‘딸아 연애를 해라’ 부분)

       

       

      “시언어”

       

      문 시인에게 좋은 시란 감동을 주는 것이다. 이해하기 어렵고 독자와 소통이 불가능한 시는 좋은 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좋은 시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좋은 시를 많이 읽어 ‘먹어’야 한다. 그래서 언어에 대한 집념 또한 대단하다.  문 시인은 책을 ‘미친 듯이’ 읽는다며 최근 읽고 있는 시집을 소개했다.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와 스웨덴 시인 토마스 트란스틀리메르의 시를 읽고있는데 두 시인 모두 노벨문학상 수상 이력이 있는 세계적인 시인이지요. 국내 시인도 여럿 좋아해요. 진은영 시인은 가볍지 않고 깊이가 있어요. 김선우 정끝별 시인도 참 좋아요. 사실 좋아하는 시인은 정말 많죠.”

      시인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곧 삶이다. 처음 시를 시작한 것이 53년 전부터라고 하니 생애를 시와 함께한 셈이다. 온 감각을 열고 관심을 시에 두고 있으면 신문을 보는 것도 TV를 보는 것도 모두 시가 된다. 걷다가 길에 서서 펜과 종이를 꺼내 메모를 남기는 일도 다반사다. 시를 쓰지 않으면 건강이 나빠지는 것 같고 기분도 우울할 정도란다.

       

       

       

      (좌) 문정희 시인과 함께. (우) 문정희 시인의 친필 사인. ⓒ 손예운

       

      시인이 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에게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언어 부자’가 되라는 것이다. 부자가 돈도 잘 쓰듯이 언어의 용량이 큰 부자가 시를 쓸 때 꺼낼 언어가 많아진다. 다독(多讀)과 더불어 좋은 책을 골라 읽는 것이 중요하다. 몸에 나쁜 음식 가려내는 것처럼 책도 유기농인지 불량식품인지 따져가며 읽어야 한다.

       

      문 시인이 생각하는 시의 미래는 밝다. 인간은 감각적이고 마음이 동(動)하는 것에 반응하며, 늘 새롭고 세련된 표현을 동경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가슴에 손을 얹어 봐요. 심장 뛰는 소리가 느껴지면 그건 시의 영원함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이 세상에 태어나 언어를 구사하면서 사는 인간인 이상, ‘시’라고 하는 가장 아름다운 형태의 언어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지난해 7월에 시집 두 권을 샀다. 2007년 6월에 고정희 유고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를 구입했으니 꼭 1년 만이다. 명색이 아이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내가 이러하니 이 땅 시인들의 외로움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두 권 다 개인 시집이 아니라 문태준 시인이 고르고 해설을 붙여 엮은 시집이다. 근년에 ‘뜨고 있는’ 시인은 시를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했던 걸까. 문 시인의 시는 ‘가재미’밖에 읽지 않았으면서 그가 엮은 시집을 선뜻 산 것은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을 터이다.

      그러나 나는 이 시집을 한 반 년쯤 묵혀 두었다. 책 속표지에 휘갈겨 쓴 구입날짜(20080725)와 서명이 민망하다. 비좁은 서가 위에 위태하게 얹힌 예의 책을 꺼내 무심하게 넘겨보기 시작한 게 오늘이다. 읽어내려 가다가 정진규의 산문시 ‘옛날 국수가게’에 시선이 머물렀고, 문정희의 ‘키 큰 남자를 보면’ 앞에서 나는 빙그레 웃었다.


      고교 시절 이래 수년간의 습작기를 거쳤지만 나는 아직 한 편의 시도 제대로 써 보지 못했다. 그래서일 게다.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치긴 하지만 지나치게 관념적이거나 어려운 작품 앞에서 나는 대번에 기가 질리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일상시(日常詩)’로 일컬어지는 김광규의 시에 기울어지고, 쉽게 다가오는 시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정식으로 시를 공부해 보지 못한 탓인지 나는 문정희의 시를 읽은 기억이 없다. 지난해 수업 시간에 처음으로 교재에 실린 ‘겨울일기’로 시인을 처음 만났다. 문정희 시인은 1947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회갑을 넘긴 이다. 그런데 ‘겨울일기’에는 할머니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어럽쇼, 이 할매 좀 봐……. 그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시인의 비유와 언어의 운용은 내 편견을 깨끗이 뛰어넘는 것이었다. 잃어버린 사랑의 아픔을 그는 ‘편안한 칩거’라는 반어로 노래했다. 나는 언젠가 문정희를 읽어 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서 이내 그걸 잊어버렸다.



      김세원 낭송 <한계령을 위한 연가>


      ▲ 시인 문정희(1947∼ )

      두 시집에는 ‘키 큰 남자를 보면’과 ‘한계령을 위한 연가’ 등 문정희의 시 두 편이 실려 있다. 각각에 딸린 문태준 시인의 해설도 마음에 감겨온다. ‘키 큰 남자…’에 대해 문태준은 ‘느닷없이 옛날 옆집 오빠와 누나가 다시 그리워졌다.’고 썼고 ‘첫사랑이라는 이름의 은하(銀河)’를 이야기한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시에는 아스라한 추억의 편린들이 따뜻하고 빛나고 있다. 키 큰 남자의 팔에 매달려 그의 눈썹을 만지고, 거기 잎으로 매달려 하늘을 갉아먹고 싶다고 여인은 이야기한다. 그러나 여인의 그것은 감상이되, 한갓진 감상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생생한 추억의 시간은 허튼 감상 따위야 쉬 넘어버리는지 모른다.

      ‘한계령을 위한 연가’는 연시이되, 연시를 넘는 삶의 노래처럼 보인다. 한계령, 강원도 인제와 양양의 경계에 있다는 그 고개는 해마다 눈 소식과 함께 ‘교통두절’을 전해주는 곳이다. 폭설은 그 유장하고 긴 고갯길에 쌓이고 쌓여 외부세계와 고개를 고립시키지만, 시인은 그 폭설 속에 갇히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못 잊을 사람’과 함께라는 전제와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하는 열망으로 뜨겁다. 그래서 그것은 ‘눈부신 고립’이고 ‘공포’나 ‘두려움’이 아니라 ‘동화’로 인식되는 것이다. 폭설에 덮인 한계령은 아름답다. 거기 ‘기꺼이 묶여/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하고 노래하는 여자를 상상해 보라.

      시인의 해설처럼 ‘눈이 쌓여 무게가 생기듯이 어느 순간 이 시는 우리의 가슴께를 누르며 묵직하게 쌓이기 시작한다.’ 냉정하고 두려운 현실만큼이나 그 ‘고립에 대한 욕망’도 뜨겁다. 현실에 의해 무화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덧없이 빛날 뿐이다.

      해설자는 시인이 “여성의 지위와 몸을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가두려는 것들을 거부하면서 한국시사에서 ‘여성’을 당당하게 발언해 왔”고, “그러면서 여성 특유의 감수성으로 사랑의 가치를 활달하고 솔직하게 표현해 왔다.”고 소개한다. 시인의 시가 한갓진 ‘사랑’을 노래하는 ‘연가’가 아니라 단단한 ‘삶’의 노래로 읽히는 까닭이다.



      청춘의 때를 넘긴 지 오래, 새삼스레 이 연시들이 마음에 감겨오는 것도 나이듦의 징표인지 모르겠다. 나는 일요일 오후 내내 누워 뒹굴며 시집을 뒤적거렸다. 그리고는 온라인 서점에 보관해 둔 몇 권의 책과 함께 문정희 시집 <오라, 거짓 사랑아>와,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 그리고 기형도와 백무산의 오래된 시집을 각각 주문했다.

      ‘시를 읽는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글귀가 여전히 수사로만 존재하는 각박한 세상이다. 먹고 사는 일이 고단하고 힘들어서, 밥과 쌀을 짓는 일이 바빠서 저마다 시를 잊어버리고 살지만, 시는 때로 먹고 사는 일의 용기가 되고 희망이 된다. 또 그것은 밥과 쌀이 되기도 할 터이다.

      양희은이 부르는 노래 <한계령>을 들으면서 시방 백두대간의 한 고개, 한계령을 지나가는 눈발과 1월의 바람을 생각해 본다.


      <2009. 1. 18.>




       

       

       

      ‘물의 시인’ 문정희 “물을 통해 독자와 하나돼 흠뻑 젖었으면…”

      [동아일보] 입력 2012-08-29 03:00:00 | 수정 2012-08-29 10:13:30

      문정희 시인은 “젊다는 것에 대한 가치가 커진 세상이다. 나도 젊다. 수치(나이)가 아니라 용기와 모험이 젊다는 것의 잣대라면 나는 여전히 젊다”고 말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시인 문정희(65)는 ‘물의 시인’이다. 20여 년 전부터 물에 비친, 물 속에 들어있는 원형적 심상을 시로 풀어내려고 고심했다. 1993년 발표한 박사논문도 ‘서정주의 시 연구-물의 심상과 상징체계를 중심으로’였다. 그가 물의 도시인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갔다. 카포스카리대가 초청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한 작가 초청 프로그램에 참여해 지난해 가을 무렵 3개월을 지냈다.》

       

      시인의 눈에 베네치아는 “관능적인 물의 도시이지만, 관광객에게 자신의 비루해진 늙은 몸을 보여주는 ‘창녀’ 같기도 했다”. 그가 베네치아의 습습한 고독과 자발적 유배의 시간을 담아 2년 만에 열두 번째 시집 ‘카르마의 바다’(문예중앙)를 펴냈다. 14년 만의 산문집 ‘문학의 도끼로 내 삶을 깨워라’(다산책방)도 함께 나왔다. 등단 43년째를 맞은 여류시인의 쉼 없는 문학적 정진의 원동력이 궁금해 지난 주말 그를 만났다.

      시인은 물에 자신을 이입하고, 결국 물과 하나가 된다. 시를 읽는 독자들도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 물과 물이 만나면 결국 물이 되는 것처럼. “물의 원형적 심상은 생명, 정화, 갱생이에요. 물방울 하나에 사랑, 상처, 고통, 모험, 그리고 제 카르마(업보)가 들어있죠. 올림픽 양궁을 보면 화살이 10점 과녁에 들어가는 순간 화살과 과녁, 궁사가 전혀 다른 물질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것 같아요. 제 시집을 통해서도 물과 물을 쓰는 저, 그리고 물을 읽는 독자가 하나가 되고 흠뻑 젖었으면 좋겠어요.”

      물의 이미지는 ‘눈물’과 ‘바다’로 압축된다. 이들은 수동과 능동, 내향과 외향 등으로 대립되며 다채로운 변주를 이끌어낸다. ‘많은 바다를 건넜지만/눈물을 다 건너지는 못했다//(…)//나는 모르겠다/나는 아직도 눈물을 건너고 있다/눈물이 마르면 눈부시게 하얀 소금꽃이 필 것이다’(시 ‘소금꽃’ 일부)

      ‘살아 있다는 것은/파도처럼 끝없이 몸을 뒤집는 것이다/내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 몸을 뒤집을 때마다/악기처럼 리듬이 태어나는 것이다’(시 ‘살아 있다는 것은’ 일부)

      문 시인은 시원시원하고 활달한 성격이다. 하지만 “자신이 눈물과 바다 중 어디에 가깝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눈물”이라는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대부분의 사람이 저를 ‘바다’로 보지만 사실 ‘눈물’에 가까워요. 고독과 비감 속에서 시를 쓰는 에너지가 나옵니다. 가수 싸이가 ‘싸이와 박재상(싸이의 본명)이 다르다’고 하는 것처럼 시인 문정희와 인간 문정희가 다른 거지요.”

      산문집에는 해외 체류 경험을 주로 적었지만 여행기라기보다는 시작노트에 가깝다. 인상 깊었던 순간을 적고, 그 느낌으로 썼던 시를 뒤에 덧붙였다. “제 시가 배태됐던 흙의 이야기를 모았어요. 잡다한 일상보다는 제 시 이야기를 다정하게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시인은 고교 때부터 문학 천재로 불리며 미당 서정주(1915∼2000)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쉼 없이 시작 활동을 해온 그는 “저처럼 호기심 많은 사람이 40년 넘게 시만 ‘팠다’. 어떤 의미에서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시를 얻었다는 생각도 한다”고 말했다.

      “미당 선생은 제게 ‘조그만 재능으로 봉우리는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노력이 없으면 산맥은 만들 수 없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시를 쓰는 손이 무르익어 숙수(熟手)가 된 것 같아요. 제게 허락된 남은 시간 동안 시를 여한 없이 쓰고 싶어요.”

      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