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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마실 12월호 '작품집에 스며들다' 1.

천마리학 2015. 1. 9. 09:08

 

 

 

 

 <서문>

 

곡비(哭婢)와 효시(嚆矢)

 

유명한 무명시인이 되겠다고 작정한 이후,

나는 노숙(露宿)을 시작했다.

세상 귀퉁이 어디에도 없을 나의 거처,

세상 귀퉁이 어디엔가 있을지도 모를 나의 거처,

버리기로 했다.

 

은둔과 칩거, 그러나 내내 시인으로 살아왔다.

나는 우리 가계(家系)의 자손(子孫)이며 시()의 자손이다.

하여,

시대의 곡비(哭婢)가 되고, 시의 혈통을 잇고자 한다.

또한,

나의 시가 나와 새로 태어날 시들에게 효시(嚆矢)가 되고자 한다.

 

바람이 분다.

그 바람 속에 혀를 파묻는 뜨거운 키스를 하고 싶다.

 

 

 

<나의 시 사상>

 

나는 곡비(哭婢), 나의 시는 효시(嚆矢)가 되고자 한다

 

젊은 날,

문학(나에겐 시)이 구원(救援)’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의심을 했고, 이내 반발도 했다.

과연 문학이 구원일 수 있는가!

 

시보다 먼저 삶이 중요했다.

젊었으므로,

모든 것이 다 곤고(困苦)했다.

곤고함을 해결하며 살아내는 일은 마치 지뢰밭을 걸어가는 것과 같았다.

문학 또는 시가 구원(救援)이라니, 가당찮은 소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내 시인으로 살아왔다.

 

분명한 것은 삶이 먼저라는 점이다.

시를 쓰기 이전에 삶을 열렬하게 살아내야 했다.

시를 쓰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다 보니 시가 나오고, 살아내는 과정이 시가 되었다.

삶이 뜨겁지 않으면 시가 뜨거울 수 없었다.

시도 삶도 열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가 과연 나에게 구원(救援)인가 하는 처음의 의심을 지닌 채 되돌아보기도 하면서.

시는 삶이 토해내는 비명(悲鳴) 혹은 탄성(灘聲)이었다.

 

어느 사이,

삶에서 나온 시들이 다시 삶속으로 스며들어 새로운 동행이 되었고, 삶이 새로워졌다.

그 사이, 나는 수없이 죽었다.

죽어나간 이전(以前)의 삶을 태운 재()에서 수습한 사리가 곧 시()였다.

그것이 곧 구원(救援)이었다.

그리고 구원(久遠)이기도 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동안 끊임없이 구원(救援)과 구원(久遠) 사이를 들락거린 결과이다.

시는 결국 나에게 구원(救援)이었으며 구원(久遠)이 되었다.

시는 성찰이며 깨달음이다.

 

세상이 흔들리면 삶도 흔들린다.

곳곳에 지뢰가 박힌 세상, 늘 아파서 몸져누운 세상의 뼈마디가 아프다.

누군들, 늘 그 세상을 건너는 일이 어찌 아프지 않을 수 있는가.

누군들, 흔들리는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러므로 시인인 나는,

나의 삶만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픔을 대신 울어줄 수 있어야 한다.

시인은 최소한 시대의 곡비여야 한다.

 

곡비(哭婢).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우리 집안의 장례식(葬禮式) 때에 곡비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상주(喪主) 대신 울어주는 노비(奴婢)가 곡비다.

나는 우리 가계(家系)의 자손(子孫)이면서 시()의 자손이다.

그러므로 나는 시의 혈통을 잇고자 한다.

 

또한, 나의 시가,

시인(詩人)인 나에게 그리고 또 다시 태어날 시()들에게 효시(嚆矢)가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나는 시 앞에서 지금도 경건하고 진지하다.

 

곡비(哭婢)와 효시(嚆矢),

그것이 나의 시사상(詩思想)이다.

 

 

20145,

 

권천학

 

 

 

독후감 1,

 

곡비의 노숙 露宿 * 손 정 숙 (수필가)

 

 

시인이 아니더라도 한 마디 감동을 곁붙이 하고 싶은 시집 권천학님의 '노숙'을 읽었다.

천마리 학이라니 퍼뜩 자세부터 바로 앉게 하던 그가 언제부터인가 슬그머니 '천의 날개'라 예명을 고쳐달고 아예 훨훨 활개짓하는 천마리 학의 역동성을 내 뿜고 다닌다.

 

시집 '노숙'은 머리 둘 곳이 없어 한데서 밤을 새는 홈리스나 초라한 나그네의 한 숨 섞인 넋두리가 아니다. 路宿이 아니라 露宿이다. 편안히 한 곳에 안주 할 수 없는 내적인 감성의 성숙한 열매가 용트림하다 튀어나간 길 위에서의 이야기다.

인생의 길이 거치는 온갖 구비마다에서 펼쳐지는 자아와 대상과의 교류, 마찰과 투쟁의 시는 시인의 인간성만큼 경쾌하고 단호하고 다정하다. 그것은 시인은 한 세대를 같이 건너는 모든 이들의 고통, 슬픔을 대신 울어주는 곡비의 짐을 친히 져 주어야 한다는 그의 마음 밭에서 연유한다.

 

 

유명한 무명시인이 되겠다고 작정한 이후, /나는 노숙을 시작했다. /세상 귀퉁이 어딘가에 있을 지도 모르는 나의 거처, /세상 귀퉁이 어디에도 없을 거처, /버리기로 했다. //은둔과 칩거, /그러나 내내 시인으로 살아왔다./

..... (서문 중에서)

 

 

'노숙'에 실린 66편의 시들은 나에게도 파고드는 힘이 순하고 신속해서 음미하는데 시간이 따로 필요치 않았다.

수정궁처럼 찬란하게 빛나던 온 천지가 갑자기 몰아친 눈보라에 지붕이 날아가고 나무가 쓰러지고, 전깃줄이 끊어져 너덜거리는 암흑세계로 토론토의 거리를 먹칠하던 지난 년 초. 냅색에 노트북 하나 짊어지고 내 집을 찾아왔었다. 얼음무지개 영롱한 나이아가라에서 콰르릉거리는 폭포수처럼 밤새워 이야기나 실컷 흘리자며 싱긋이 웃던 낯익은 음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노숙'은 조금도 부담을 주지 않았다.

 

 

꽃자루의 행랑채

씨앗의 숨소리가 들리는

이슬의 집에서

하룻밤

 

어둠 깊은 씨방에서도

하룻밤

 

태풍의 눈 기막힌 고요 속 절벽에서도

하룻밤

월식(月蝕)의 일그러진

비탈

비좁은 들창 넘어

종점 없는 바람의 길로 흘러들어가는

풍찬노숙(風餐露宿)

목숨 한나절

 

('노숙' 전문 )

 

 

유명한 무명시인이 되겠다고 작정한 시인의 발걸음은 명쾌하기 한이 없다.

 

 

봄이면

모자를 눌러 쓴 시간이

대문 밖으로 걸어 나간다

나뭇가지에도 걸터앉고

풀잎더미에도 주저앉는다

 

웅덩이에 고여 있는 한 떼의 시간들이

태엽을 탱탱하게 조여 감아서

쏘아대는 빛 화살

 

속눈썹에 엉겨 붙은 해의 살 들이

오랜만의 외출을 눈부시게 한다

 

그늘 속을 관통할 때마다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시간들이 푸득거리고

주저앉아 있던 풀잎들도 일어나

재깍초깍재깍초깍재깍재깍초깍초깍재깍초깍.....

싹트는 소리로 초침을 닦기 시작한다

 

모자를 벗어들고 돌아온 봄외출이

불면의 의자에 앉아 따라 마시는

시간의 즙

황금잔 속의 혁명을 지켜보는

봄 그리고 밤

 

('모자를 쓴 시간이 대문 밖으로' 전문)

 

 

그러나 시간을 따라나선 그의 발걸음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드디어 시인의 숨통이 막혀온다.

 

탈출하고 싶다

시멘트골조 딴딴한 허공

심장의 고동소리와 맥박소리를 엿듣는

벽 속의 귀

숨 막히는 빈 집으로부터

 

파헤쳐진 길바닥과

열려있는 맨홀속의 궁창으로부터

 

가던 길 돌려세우는 U턴의

횡단보도 앞에서

쓰레기 매립지로 떠나는 무쇠트럭

하수종말처리장으로 밀려가는

합성세제 거품으로부터

시립병원 영안실로 끌려가며 내지르는

소름 돋는 미움미움미움미움.....

 

탈출하고 싶다

찌그러진 동전으로 채워지는 공중전화

푸른 낙엽의 거리

깡통들이 굴러다니는 도시로 부터

 

('탈출하고 싶다' 전문)

 

 

사위가 무겁게 가라앉은 시간. 마치 쏟아지는 별 아래 홀로이 듯 온 몸이 떨릴 때가 있다.

길을 내며 걷는 나그네는 어디서나 추위를 타는 노숙자일 수밖에 없다.

 

.....나는 수 없이 죽었다. 죽어나간 이전의 삶을 태운 재에서 수습한 사리가 곧 시였고 그 시는 곧 효시(嚆矢)가 되었다.... 세상이 흔들리면 삶도 흔들린다. .....그 세상을 건너는 일이 어찌 아프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러므로 시인인 나는 나의 삶만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픔을 대신 울어주는 곡비여야 한다.....

 

(후기 중에서)

 

 

그의 곡비는 우선적으로 자신을 대상으로 쏟아내는 피 울음이다.

이제 밴쿠버로 옮겨간 시인은 또 다른 노숙지에서 이 시대의 슬픔과 고통을 재가 되도록 울어줄 곡비가 되어 울부짖어 줄 것이다. 그 울음은 내 귀에 아름답게 울려올 것이다. 그 울림은 그가 바라는 구원의 노래이고 그 노래의 효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엔가 또 불쑥 나이아가라 폭포로 찾아올지 모른다. 그런 만남을 기대하면서.....

그때는 그가 좋아하는 쓴 블랙커피가 아니라, 역시 그가 좋아하는 쓰디쓴 귀네스(Guinness)를 마셔야겠다.

 

 

독후감 2, 

 

곡비의 노래

-권천학 시집 [노숙[을 읽고

 

나운택(칼럼니스트)

 

 

한 때 같은 매체에 칼럼을 쓴 인연으로 알게 된 권천학시인이 어느 가을날 불쑥 시집을 보내왔다. 학창시절이후 시집을 손에 잡아본 기억이 별로 없는 나는 얼떨결에 받아든 시집을 조심스레 펼치고 예전 한 때 소월, 청마, 미당, 박목월 같은 시인들의 시들에 감동하여 읽고 또 읽어 외우려고 애쓰던 그 시절의 감성으로 잠시 돌아가 약간은 설레는 마음으로 시들을 하나씩 읽어 나갔다.

 

평소 다른 글들은 탐독하지만 시라면 막연히 너무 어렵고 멀게만 느껴졌었다. 특히 요즘 나오는 대부분의 소위 현대시들은 나에겐 그저 언어의 유희이거나 관념의 장난정도로만 비쳐져 더욱 그랬다. 그런데, 권천학시인의 시들을 한 수, 한 수 차례로 읽어 나가다 보니 신기하게도 그 동안 어렵게만 느껴졌던 시들 속에서 어렴풋이 뭔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거기엔 놀랍게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문득 만나게 되는 풍경과 생각과 고민과 아픔과 분노가 단아한 모습으로 정돈되어 있었다.

 

……박자 정확한 숨소리/ 냉동된 언어가 덜그럭거리는 모눈종이위에/ 말갛게 떠 있는/ 증류수 같은 시보다/ 엇박자로 한숨도 토해내고/ 다소 비틀거리더라도 사람냄새가 나는/ 그래서 눈물이 배어나오는/ 그런 시가 맛이 난다/ 땀내 배어 있는 삶의 행간에서/ 비누거품을 일으키는 시/ 시론보다 인생론에 맞는/ 그런 시가 나는 좋다” (사람 냄새나는 시가 좋다)

 

아하! 그랬구나. 그제서야 시인은 곡비(哭婢). 곡비여야 한다.”라고 했던 시인의 머릿말이 새삼 떠올랐다. 그랬다. 시인은 인적 없는 깊은 산중에 우뚝 솟은 어느 봉우리에 걸쳐있는 뭉개구름 옆을 고고하게 날아가는 한 마리 학이기를 거부하고, 천마리 학의 날개짓으로 온 누리를 감싸 안아 이 땅에서 함께 숨을 나눠 쉬며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위해 대신 울어주는 곡비가 되고자 했다. 그래서, 시인은 세상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가는 일상사들을 세상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다정한 언어로 정제하여 때로는 나직히, 때로는 처절하게, 때로는 감칠맛 나게 저들을 대신하여 그렇게 곡()하고 있었다.

 

……손가락을 가시에 찔리는 일은 사소하다./ 남의 염통이 곪는 것 보다 가시에 찔린 내 손가락은 사소하지 않다./ 그보다 더 사소하지 않은 것은/ 가시에서 꽃을 피워낸다는 것을 깨닫는 일/ 고단함을 깨닫는 일이 더 고단하고/ 외로움을 깨닫는 일이/ 외로움보다 더 외롭다는 것을 깨닫는 일만큼이나/ 사소하지 않다/ 그리하여 가시밭길을 살면서/ 성공의 꽃을 피워내는 일은 더욱 사소하지가 않다/ ……” (사소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

 

무심히 지나가는 나그네의 눈에는 마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그저 통속하고 사소한 일일 뿐이다. 심지어 사랑하는 이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이 세상에 남은 자들의 애절한 통곡소리마저도 그저 무덤덤하게 닥아오는 일상의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따뜻한 애정을 담아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에는 그저 사소하고, 하찮은 일은 없는 듯 하다. ‘한 시대를 함께 건너는 사람들의 충실한 곡비가 되고자 한 시인의 눈에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보통 사람들에겐 사소해 보이는 것들조차도 놀랍고, 신기하고, 고맙고, 안타깝고, 가슴 아프게 닥아오는 모양이다. 시인은 가시 찔린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이 아파 소리 내어 대신 울고 있었다.

 

이름이 똥쉬파리라고 더럽게 생각하지 마라/ 깨끗함의 착각이 더러움이고/ 미추 가리는 분별심이 잘 난 체일 뿐,/ 목숨은 다 같고. 낳고 죽는 운명도 다 같다/ 더러움을 만드는 놈이 더 더러운 법이니/ 이름만으로 단정하지 마라/……” (똥쉬파리)

 

누구에게나 멸시받고 하찮아 보이는 똥쉬파리들의 억울한 하소연마저도 시인의 귀엔 크게 들리나 보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서도 기꺼이 곡비가 되어 이렇게 준엄하게 곡하고 있다.

 

폭설주의보가 내리면/ 도무지 걸려올 리 없는 전화가 기다려진다/ 결코 당도하지 못 하리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간첩질이라도 하듯 이메일을 열어본다/……/그러나 지금/ 눈이 내리니까, 비가 오니까, 꽃이 피었으니까, 바람 불어 좋으니까/ 한 잔 하자며 뭉치곤 하던 전화도/ 마음 부비는 일도 뜸해져 가는 요즈음에랴/ 아직도 덜 삭은 그리움이 있었던가/ 안스러워라/ 아직도 내 몸 안에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다니/ 참 하염없어라/……/ 아직도 발령중인 폭설주의보/ 도무지 걸려올 리 없는 전화벨 소리를 기다리는/ 어쩔 수 없는 내가 가엾어서/ 저 밑바닥에서 애닯아 두근거리는 소리를/ 아직도 멈추지 못 하는 내가 어이없어서/ 내가 나 때문에/ 식어빠진 커피를 독약으로 마신다” (독약을 마신다)

 

폭풍같이 몰아치던 젊은 날의 뜨거운 열정과 폭설처럼 퍼붓던 젊음의 욕망들이 가슴속 저 깊은 곳으로 서서히 숨어들어 이제 농익은 숙성주의 은은한 향기를 완성하기 위해 부글거리는 마지막 발효의 몸부림을 치는 나이에 그 몸부림을 조용히 다독이며 속으로 삭히려는 시인의 독백을 읽다가 나는 문득 백석(白石)의 시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을 떠올렸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 나는 이런 저녁에는 더욱 화로를 다가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아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어두워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믈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김윤식과 김현이 <한국문학사>에서 한국시가 낳은 가장 아름다운 시중의 하나라고 극찬한 이 시는 갑작스레 가난하고 불운해진 백석의 맑고 맑아서 금속이 된 듯한 체념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마른 가지 꽃눈 틔우느라/ 마른버짐 핀 봄 가시내/ 봄마실 갔다가/ 부르튼 입술로/ 치맛단에 꽃물 잔뜩 묻혀와/ 온 동네 다 물들이는 연분홍 소문/ 젖몽오리/ 꽃몽오리/ 살몽오리/ 참 가시내도……”(꽃가루 주의보 5소문)

 

징허다 꽃!/ 봄만 되면 벌거벗는 저것들!/ 안달 나 아랫도리 다 드러내 놓고/ 부끄러움도 없이 지랄들이야/ 그래 봤자/ 가는 봄을 잡지도 못 할 거면서/ 아무렴/ 기우는 햇볕에/ 시 한 편 구워내느라/ 노을 앞에서 잉걸불 지피는 내 속만 할까” (꽃가루주의보 6봄꽃)

노곤하게 감겨오는 봄기운은 시인도 어쩌지 못해 아련하게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잡힐 듯 말 듯한 생명충동, 원초적 사랑의 본능은 시인을 통해 이렇게 아름답게 우리에게 닥아온다. 약간의 질투를 은근히 감추고.

 

유명한 무명시인이 되겠다고 작정한 이후 스스로 노숙(露宿)을 시작했다는 시인. 그는 태어나고 자란 고국땅을 떠나 태평양 건너 낯선 땅에서 노숙을 하다가 이제 또 다시 철새처럼 훌쩍 대륙을 가로질러 서부로 날아갔다. 새로 옮겨 앉은 노숙지에서 더 많은 아픈 이들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힘찬 날개짓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닉네임인 천마리학의 포근한 날개짓이 온 세상을 덮는 날 이 세상은 좀 더 살만한 곳이 되어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