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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칭송’ 부모들, 자식에겐 “공무원” 되라?

천마리학 2012. 10. 22. 23:38

 

 

 

잡스 칭송’ 부모들, 자식에겐 “공무원” 되라?

한겨레|입력2012.10.22 20:30|수정2012.10.22 20:40

 

[한겨레]잡스 칭송하면서 자식엔 "공무원"…꿈마저 정해주는 부모


"돈 못 버는 일 하지말고 취직"


아들의 정치인 꿈 타박한 아빠


"맏이니까 번듯한 대학·직장에"


딸의 호텔리어 꿈 꺾는 엄마


IT 관련 대회 입상한 학생에


선생님은 '과학 활동 줄여라'


IMF 외환위기 겪은 부모·교사


자녀 희망보다 안정성만 강조

경북 어느 소도시 고등학교 1학년인 이동현(가명·16)군은 책읽기를 좋아한다. 그의 독서 수준은 어지간한 어른 못지않다. 사회과학 서적이나 역사·철학 등 인문학 서적까지 넘나들며 탐독한다. 이군의 꿈은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을 배워서 시민단체 활동가나 정치인이 되는 것이다.

그의 학교 성적은 최하위권이다. 자신이 흥미를 느낀 여러 책을 섭렵하는 데는 열성이지만, 제도권 주입식 교육에는 아무래도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굳이 매진해야 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

부모는 이군을 이해하지 못한다. "돈 못 버는 일하지 말고 취직해서 돈 벌 생각을 하라"고 아버지는 종종 역정을 낸다. 어머니는 건축설계사가 되어보라고 이군을 설득하기도 한다. 중학교 때 이군이 잠깐 건축설계사에 관심을 보였던 일을 자꾸 끄집어낸다.

그런 부모 앞에서 이군은 결국 대화를 포기한다. "제가 관심 있는 건 부정하면서 그저 대학 가라는 얘기뿐이에요. 제 미래를 부모님이 정하려고 하시니, 이야기하다 보면 화만 나요."

비슷한 일을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김지은(가명·18)양도 겪었다. 호텔리어가 되고 싶은 김양은 지난 4월 2년제 호텔전문학교에 입학원서를 넣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부모한테 말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김양은 항공기 승무원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가 부모의 반대에 부딪혀 포기한 적이 있다. 이번에도 같은 상황이 벌어질까봐 김양은 두려웠다.

"부모님은 아나운서나 공무원, 선생님 하라는 말을 해오셨어요. 제가 맏이니까 번듯하고 안정적인 직장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죠."

아니나다를까, 맏딸이 호텔전문학교에 지원한 것을 어머니가 뒤늦게 알게되면서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부모는 절대 등록금을 줄 수 없다고 버텼고 김양은 결국 입학을 포기했다. 다만 김양은 꿈까지 포기하진 않았다. 호텔리어가 되고 싶다고 부모를 거듭 설득했다. 번듯한 대학을 원했던 부모에게 '타협책'도 제시했다. 4년제 대학 호텔 관련 학과를 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갈등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부모님은 외국어 공부를 해서 유학도 가고 세계적인 호텔 체인에 취직하라고 하는데, 저는 밑바닥에서 시작해 안정적으로 다니는 정도면 만족하거든요."

김양의 부모가 유별난 것은 아니다. 한국의 부모 대부분이 자녀들의 진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지난 7월 전국 31개 중학교 2학년생 1906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진로 등 미래를 결정하는 데 있어 내 의지보다 부모님의 기대에 따를 것 같다'고 답한 경우가 34.4%(매우 그렇다 5.4%, 약간 그렇다 28.8%)를 차지했다.

이런 '부모의 기대'에 함정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진로컨설팅업체 '와이즈멘토'의 조진표 대표는 "성공담이든 실패담이든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얘기하는 것은 모두 옛날에 경험한 일이어서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선 맞지 않는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현실에 맞지 않는 부모의 기대가 오히려 자녀의 올바른 진로 개척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기대가 '직업 안정성'에만 맞춰져 있는 것도 문제다. 조 대표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중산층이 깊은 불안감을 품게 됐고 이후 부모들이 자녀에게 기대하는 직업 선택의 제1원칙이 '안정성'이 됐다"고 말했다. 그 결과, 학생들의 진로 선택 폭은 더 좁아지고 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지난 2월 중1~고2 학생 6291명을 대상으로 희망 직업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1~4위를 공무원 또는 전문직(초등교사 8.8%, 의사 4.5%, 공무원 4.1%, 중·고등교사 4.0%)이 차지했다. 임언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선임연구위원은 "일반계고 학생들의 선호도를 11년 전 조사(2001년)와 비교해보면 간호사·경찰·군인 등에 대한 선호가 높아진 반면, 사업가(4→20위 밖), 경영인(11→19위)이 크게 하락했다"며 "안정적 직업에 대한 학생들의 선호가 훨씬 높아졌다"고 분석했다.

학교 역시 안정적 직업으로 향하는 궤도에서 벗어나는 일을 좀체 용인하지 않는다.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 2학년인 남승희(가명·17)군은 정보기술(IT) 분야의 벤처사업가를 꿈꾼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애플에서 나온 음악재생기 '아이팟 터치'를 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왜 우리나라는 이런 것을 못 만들까, 그렇다면 내가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경영자를 꿈꾸는 그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정보기술 분야에 대한 관심도 높아 창의력올림픽대회나 과학토론대회 등에도 꾸준히 참가했고 몇몇 상도 받았다.

그런데 그의 진로를 세심하게 이끌어주는 교사가 학교엔 없었다. 오히려 담임 교사는 내신 성적이 좋아야 한다며 과학과 관련한 외부 활동을 줄이라고 남군을 타박하고 있다. "제가 구체적으로 진로를 정하고, 입학사정관제에 맞춰 대학을 준비하는 데 학교는 도움이 별로 안 됐어요. 저 혼자 찾아가고 준비하고 있어요."

그나마 남군은 운이 좋은 편이다. 어떤 진로를 개척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 학생들에게 학교의 도움은 더욱 희귀하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이수진(가명·16)양은 지금까지 세차례 미래의 직업을 바꿨지만 여전히 혼란스럽다. 피아니스트가 되려 했다가, 법조인으로 마음을 돌렸다가, 올해부터는 심리학자를 해볼까 생각 중이다. 최근에는 인권단체 활동을 하며 인권운동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

학교에서 매주 한 시간씩 진로탐색 수업을 듣지만, 인터넷으로 대학 진학 정보를 알아보거나 직업 전반을 개괄하는 수준이어서 별 도움이 안 된다. "뭔가 더 새로운 걸 경험하면 곧 생각이 바뀔 것 같아 진로를 딱 고정하기 쉽지 않아요.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제안하는 진로도 딱히 흥미를 끌지 않고요."

교육과학기술부와 직업능력개발원이 2011년 전국 학생 2165명을 상대로 진행한 조사를 보면, '희망 직업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응답학생의 28.9%가 부정적(잘 모르겠다 21.6%, 없다 7.3%)으로 답했다. <한겨레>와 전교조의 조사에서도 '인생에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부정적으로 답한 학생이 17.6%(별로 그렇지 않다 14.2%, 전혀 그렇지 않다 3.4%)였다.

조진표 와이즈멘토 대표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독립한 상황'을 성공의 기준으로 둔다면 직업 선택의 폭을 훨씬 더 넓힐 수 있다"며 "학교도 대입 상담만 할 게 아니라, 학생들의 적성을 발견하고 직업 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민간 자원을 적극 활용해서 학생들의 욕구를 해소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경쟁 사회에선 안정적 직업이 최우선이라는 부모와 교사들의 관념부터 바꿔야 한다고 조언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한국진로교육학회장인 김봉환 숙명여대 교수(교육학과)는 "공무원들조차 성과에 따라 퇴출되고 있는 상황에서 학부모·교사들부터 '안정적 직업이 있다'는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며 "입시 경쟁에서 앞서나가야 한다는 부모와 교사의 욕망을 자녀 또는 학생들에게 관철시키려 하는 게 아닌지 근본적 반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지훈 기자watchdo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