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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샘-지팡이 사던 날 - 권천학 essaykorea

천마리학 2010. 8. 23. 19:17

ID: 회원정보 없음 늘샘  작성일시 - 2003년 11월 14일 금요일 오후 4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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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 사던 날 - 권천학


지팡이 사던 날


권천학


  지팡이를 사기 위해 아버지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맞잡은 손바닥에서 아버지의 온기가 나지막하게 전해져왔다. 전처럼 뜨겁지가 않고 그저 예릿한 정도여서 가슴이 또다시 먹먹해졌다.
  아버지의 손가락 끝 부분이 서늘하게 느껴져서 내 손으로 아버지의 손가락 끝 부분을 모아잡고 걸었다. 자세가 약간 불편하게 느껴졌지만 그렇게라도 아버지의 손을 덥혀드리고 싶었다. 그렇게 요모조모 손을 옮겨 잡아가며 걷는데 아버지의 걸음이 자꾸만 빨라지는 걸 알 수 있었다.
  왜 이리 급하실까? 그 늠름하고 당당하시던 모습은 다 어디로 갔을까? 반듯한 자세로 당당하게 보일만큼 가슴 쭉 펴고 걷던 아버지, 계집애가 거만하게 보인다니까, 나 학생 적 아버지 자세 닮았다는 이유로 어머니로부터 자주 듣던 말이다.
  젊으셨을 때 말술을 마시면서도 한번도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던 아버지셨다.
 “아버지, 뭐가 그리 급하세요? 천천히 걸으세요”
 “몸이 자꾸만 앞으로 쏠려 넘어질 거 같아서 발을 내딛다보니.....그렇게 돼”
 아버지의 대답에 또다시 가슴이 서늘해져온다.
어려서는 네 다리로 젊어서는 두 다리로 늙어서는 세 다리로 다니는 게 뭘까? 나 어렸을 때 아버지가 들려주신 수수께끼다.
  아버지의 목에 매달려 흉내 내며 깔깔거리던 그때가 눈에 선한데 지금은 기울어진 어깨, 회한 가득해 보이는 아버지의 눈빛을 느낄 때마다 가슴이 시리다.
  비로소 아버지를 83세의 노인으로 실감해야하는 일이 서럽다.
아버지의 손을 요리조리 옮겨 잡아 가면서 더욱 힘이 되어드리려고 마음을 써봤지만 그게 무슨 힘이 될까? 아버지의 힘이 되어드릴 수 없는 것이 가느다란 한숨으로 새어나왔다.

 며칠 전, 부모님을 뵈러 왔던 그날 아버지는 지팡이가 필요하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나는 가슴 속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흡사 못들을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모른 척 하고 싶었다.
근래 들어 왜소해진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리고 조마조마해오던 터였다.
  딸에게 미안해선지 신발장 안에 있는 거 쓰지 그러느냐고 어머니가 거드셨다. 몇 해 전 어머니가 계단에서 넘어져 병원치료를 받을 때 쓰시던 것이었다.
  “그건 짧아서 안돼”
아버지께서는 속에 칼이 달려있는 3단 지팡이, 손잡이 장식이 멋진 지팡이, 나무로 만들어진 지팡이 등 친구 분들이 가지고 있는 지팡이들을 설명하셨다.
  그렇게 계속 어머니와 지팡이에 대한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시는 동안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결국 그날이 마침 일요일이어서 문을 닫은 가게들이 많을 테니까 다른 날 기회 봐서 알아보겠다는 말로 얼버무리고 말았었다.

  이삼년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활기차셨다.
힘있는 모습으로 매일 산에도 가시고 어쩌다 찾아뵙는 일이 뜸하다싶으면 전화를 걸어 넌 뭐가 그리 바쁘냐? 하고 나무라시기도 했고, 가끔은 너 요즘 바쁘냐? 안 바쁘면 어디 구경 좀 가자 하시기도 했다.
  그러던 아버지가 언제부턴가 음식을 드시면서도 별맛이 없다고 하셨고, 어디를 가자고 해도 귀찮아서 집에 있겠다고 사양하시는 일이 잦았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뜨끔뜨끔, 아버지 다시 한번 드셔보세요 맛이 있어요. 거기 가면 아버지 좋아하시는 거 있을지 모르는데....하면서 아버지의 스산함에 이르지 못하는 너스레를 떨곤 했다.
  지팡이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시던 며칠 전 그날도 자고가거라 하시며 붙드셨다. 그날 밤도 언제나 그래 오셨던 것처럼 늘 쓰시는 사우나 침대를 나에게 내어주시고 당신은 침대 옆 바닥에 자리를 펴고 주무셨고,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육십을 눈앞에 둔 이 딸을 위해 따뜻한 세숫물을 받아놓고 ‘얘 빨리 나와 세수해라’ 하셨다.
 “전 겨울에도 찬물 쓰는데 괜히 걱정하셔.....”하고 마지못한 척 목욕실로 들어갔지만 따뜻한 세숫물에 아버지를 느끼며 흐르는 눈물을 씻어야했다.
 안 됩니다 아버지. 그동안 당신은 든든한 바람막이였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세상사에 지칠 때마다 쏟아내는 제 푸념까지도 다 들어주는 친구였습니다. 더 이상 허물어지시면 안 됩니다. 아버지. 이제 어떻게 해야 제가 당신의 든든한 지팡이가 될 수 있을까요?

 백화점에서 마음에 드는 지팡이를 고르는 동안 내내 가슴속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 essay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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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천학

일본에서 출생 전북 김제에서 성장.
<여성중앙>에 단편 ‘모래성’ 당선, KBS. MBC 드라마 당선, <현대문학>에 ‘지게’ ‘지게꾼의 노을’이 천료되어 등단.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한국시협 회원, 현대시협 이사. 월간 <어머니> 편집장 및 <풀잎문학> 주간 역임. 도서출판 학마을 및 하나플러스 대표, 계간 문예 다층 편집동인, 한국전자문학도서관 웹진 주간. ♣ essay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