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 화보

천마리학 2010. 8. 14. 00:10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 화보

 
1945년 8월 15일세계 제 2차대전의 종말인 일본의 패망 당시 처참한 폐허의 모습과 패자의 굴욕적인 항복과정을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자료이기에 요약 정리 하였습니다.  학헌
 
B-29 폭격으로 쑥대밭이 된 도꾜산업지역.
도꾜는 53.8% 가 파괴되었고 6백 7십만 인구가
2 백 4 십만으로 줄어 들었습니다.


원폭으로 완전 파괴된 나가사끼



오끼나와에 있던 일본군들 12 명이 투항하는 모습입니다.
일본은 전쟁에서 죽는 것은 영광이라고 선전하면서
항복은 있을 수 없다라고 교육했습니다.
프로파간다는 일본군의 자살을 막기 위하여 삐라를 뿌리며
노력한 결과 쾀을 점령한지 10 개월 만에
산 속 동굴에 있던 일본군 35 명이 투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패전이 짙어가고 미군에 투항해도 죽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투항은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오끼나와에서 9498 명, 아이오지마에서 1038 명,
싸이판에서 2161 명, 쾀에서 524 명, 타라와 150 명 등

수없이 많은 일본군들이 투항해 왔습니다.



1945년 8월 14일 일본은 8월 15일 투르만 대통령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국민에게 발표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일본항복이 알려지자 밖으로 쏟아저 나온 쌘프란시스코
시민들 중에서 여성들이 베개를 들고나와 기쁨에 넘치는
베개싸움을 벌리며 좋아하는 모습입니다.



거리로 몰려나와 축하 함성을 지르던 뉴욕시민들이 너무
기뻐서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도 포옹했는데
Life magazine's photographer Alfred Eisenstaedt 의
대표작 수병과 흰옷 입은 간호원의 키스 사진은
가장 유명한 사진으로 세계인의 기억에 남아 있었습니다.



사진의 인물 중에 간호원은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본인이 사진 속의 수병이었다고
나섰습니다.
그때마다 경찰은 사실규명을 해야 했었고
간호원 기브슨씨는 자문을 했었습니다.

2007.8,4. 80세의 그렌 맥더피씨가 그 인물임이 밝혔습니다. 간호원 기브슨씨도 그가 맞다고 확인해 주었습니다.

맥더피씨의 말에 의하면 그당시 18세였던 나는 너무
행복해서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브르크린에 살고 있는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가던 중에
간호원을 만났습니다.
그녀도 나를 보고 큰소리를 지르며 얼굴에는 함박 웃음이
가득 했었습니다.
나는 막 달려가서 그녀를 끼어안고 키스를 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나눈 말은 없었습니다.

그후 곧바로 길건너 전철역으로 향했고 부르크린으로
갔습니다. 지금 세의 맥더피씨는 페암으로 병원에
입원 중에 있습니다.

일본에게 항복절차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를 마닐라에서
개최했습니다.
8월 19일 마닐라에 도착한 맥아더 장군이 공항에서
군악대의 환영연주를 듣고 있습니다.
내가 들어본 연주 중에 가장 감명 깊은 순간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회의장으로 갔습니다.



맥아더 장군의 명령에 따라 일본 대표는 군용기를 흰색으로
바꿔 칠하고 녹십자를 그려 붙인 비행기를 타고 19일 12시
44분 이에시마 섬에 착륙했습니다.

중장 도라시로 가와베와 그 일행이 12명이었습니다.
미국측 준장 찰스 윌로비가 안내를 하고 있습니다.
맥아더 장군과 회의를 하기 위하여 미군 비행기로 갈아타고
마닐라로 갔습니다.
일본 대표들은 갖고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파인애풀
주스를 마셨습니다.

식사 후 미국 담배와 군표 군인들이 사용하는 돈을
권했으나 거절했습니다.



작은 키의 가와베 중장이 키 큰 미군 준장 윌로비의 안내를
받아 회의장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마닐라 회의 광경입니다.
19시간 만에 떠나는 일본 대표단의 가방 속에는 항복문서와
절차, 그리고 맥아더 장군이 일본총독이 된다는 문서가

담겨져 있습니다.



1945년 9월 2일 도꾜만에 정박해 있는 미함대 미조리함에서 항복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천황을 살려준다는 조건하에 일본은 무조건 항복에
싸인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의 서명




일본 마지막 외무대신 마모루 시게미수가 천황을 대신해서
서명하고 있습니다.

일본군 중장 우메주가 서명을 하고 있고 그 뒤에 서 있는

부관이 눈물을 닦고 있습니다.



항복문서에는 그외에 중국, 영국, 쏘련, 오스트리아, 카나다,프랑스, 네델란드, 뉴질랜드 대표가 서명을 했습니다.
아침부터 날이 흐려 우중충했었는데 모두 서명을 끝내자
도꾜만에는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늘 위로는 400대의 B-29가 떠있고 그 밑으로 1500대의
전투기가 편대를 지어 미조리함 위를 날았습니다.
드라마틱한 순간이었고 마지막 승리에 대한 경의였습니다.



미조리함을 떠나기 전 일본대표단의 굳은 표정입니다.
항복문서는 미국이 한 장 밀본이 한 장씩 보유하기로
하였습니다.
미국은 5000명의 가미가제가 존재한 일본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항복했다고 해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11월 1일 일차로 6군을 규슈에 상륙시켰습니다.
에어본 특수부대가 먼저 도꾜에 들어가 기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뜻밖에도 일본인들이 적대시 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1946년 봄에 8군과 10군을 도꾜에 상륙시켰습니다.



전후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열차는 만원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일본 병사들도 즐거워하는 표정입니다.



원폭 피해자들입니다.
전쟁통에 헤어진 가족들을 찾기 위한 광고문들입니다.
새로 이사간 집 주소를 적어놓고 있습니다.



폭격으로 페허가 된 오사까 성입니다.



천황이 맥아더 장군을 예방하겠다고 해서 장군이
미 대사관에서 천황을 만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천황을 신으로 모시고 있었지만
맥아더 장군은 히로히토 인간을 만나는 자리라
넥타이를 안 매고 만났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