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수필-안수길의 '일하는 행복'
安壽吉-일하는 행복 안수길(安壽吉) (1911~1977)
알랭이 그의 <행복론>에서, '파리의 경찰서장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한 말은, 언제 생각을 해 보아도 재치 있고 의미심장한 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경찰서장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예기치 않았던 사건들이 뒤를 이어 기다리고 있고, 직책상 그것을 처리하지 않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할 일이 없어 하품을 하거나 적적한 느낌이 들 때는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이 말은, 사람이란 일을 하는 데서 행복을 누릴 수 있고, 행복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겠다.
사실, 일에 열중하고 있노라면, 몸과 마음에 일종의 리듬이 생겨 쾌적한 느낌을 맛볼 수 있고, 일한 자리가 생기게 되므로, 역시 일종의 정복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더구나 특정한 일을 끝마쳤을 때의 쾌감은, 일이 주는 일련의 행복감의 절정(絶頂)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행복감을 맛볼 수 있게 하는 일을 싫어하는 본능 같은 것이 사람에게는 있다.
게으름이 그것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이 게으름의 검은 흐름은, 마치 물이 낮은 데로 한없이 흐르게 마련인 것처럼, 걷잡지 않으면 끝 가는 데를 알 수 없게 되고, 마침내는 일에서 맛볼 수 있는 행복감에 영영 참여하지 못하게 되고 만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물론 불행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불행한 사회요, 이런 사람들이 많은 나라 역시 불행한 나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개인으로서도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게으름의 검은 흐름에 둑을 쌓고 일에 열중해야 함은 물론, 사회나 나라를 위해서도 일하는 기풍(氣風)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하물며,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이 이런 풍조를 절실히 요구하고 있음에랴.
일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일이라고 하면 흔히 육체적인 것만을 생각하거나, 혹은 물질적 보수만을 앞세우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물론, 정신적 노동의 경우에도 육체적 노동의 요소가 전연 없는 것이 아니요, 또 일에는 대체로 물질적 보수가 따르는 법이다. 그러나, 육체적 노동만이 일이라거나, 일에는 반드시 물질적 보수가 따른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학생이 공부로 책을 읽는 것은 학생으로서는 훌륭한 일이나 육체적 노동은 아닌 것이요, 일인 공부를 했다고 해서 학생이 보수를 받는 법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일이란 정신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보수가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어쨌든 각자가 해야 할 바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고 싶다.
각자가 해야 할 바에 게으름을 부리지 말고 달려들어 열중하는 습관을 특히 학생들은 길러야 할 것이다.
이런 습관을 기르기 위해서는 매일 일정 분량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이란 처음 달라붙을 때에는 싫고 신명이 나지 않으나, 견디고 그냥 밀고 나가는 사이에 리듬이 생기게 마련인 것이요, 리듬이 생기게 되면 비로소 행복감에 잠기게 되는 것이다.
로댕도 덮어놓고 일을 하자고 말했고, 도스토예프스키도 언제 영감을 기다려 일에 달라붙겠는가 하고 말했다.
스탕달도 매일 일정량의 일을 규칙적으로 했다고 스스로 써 놓고 있다. 이렇게 위대한 업적을 남겨 놓은 사람들의 일하는 방법은 한결같이 우선 달라붙는 것이요, 매일 끊임없이 일정량의 일을 하는 것이었다.
안수길(1911∼1977) 호는 남석(南石). 1911년 11월 3일 함남 함흥 태생. 함흥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14세에 만주로 가서 1926년 만주 간도 중앙학교를 졸업하였다. 1927년 함흥고보 2학년 재학중 맹휴사건 주동으로 자퇴하고, 이듬해 경신학교 3년에 편입하여 다니던 중 광주학생의거가 일어나자 이에 참여하여 퇴학당하였다. 1930년 일본에 건너가 토요중학(東洋中學)에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과 함께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사범부 영어과에 입학했으나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1935년 <조선 문단>에 '적십자 병원장'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그는 민족적 리얼리즘의 작자로 객관적 입장에서 우리 민족의 생활과 역사가 지닌 고민을 사실적으로 그렸다.1936년 간도일보사 기자로 근무하다가 1937년 만몽일보와 병합되어 만선일보로 발족되자 염상섭, 신형철, 송석훈 등과 같이 일을 하였다. 1945년 6월에 만선일보를 사직하고 함흥으로 돌아왔다가, 1948년 월남하여 경도신문 문화부 차장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대구 부산 등지로 피난하였다가 해군 정훈감실 문관으로 근무하였고, 이후 서라벌예대 교수, 이화여대 강사, 한양대 교수,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 한국문협이사를 역임하였다. 제2회 아세아 자유문화상, 서울시 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1977년 4월 18일 사망했다. 그는 1935년 단편 <적십자병원장>과 꽁트 <붉은 목도리> 등이 <<조선문단>>에 당선되어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한다. 그 뒤 박영준, 김진국 등과 함께 문예동인지 <<북향>>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1940년부터 단편 <사호실>(1940), <한여름 밤>(1940), <원각촌>(1942), <목축기>(1943), 중편 <벼>(1940)를 발표하는 등 꾸준한 창작활동을 한다. 1944년에는 처녀장편 <북향보>를 만선일보에 5개월 동안 연재하였고, 첫 창작집 <<북원>>을 간행하기도 한다. 이 시기 작품들은 대개 자신의 만주 체험을 바탕으로 만주에서 정착하고 살아가는 조선인의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작가의 현실적 체험과 동족에 대한 인간적 시선을 바탕으로 만주에서의 개척과 정착과정의 어려움 등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해방공간에서 <여수>(1949), <밀회>(1949), <상매기>(1949) 등을 발표하였고, 6.25 이후 <나루터 탈주>(1951), <제비>(1952), <역의 처세철학>(1953) 등 지식인의 무력감과 자의식적 반성을 다룬 일련의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만주체험에서 벗어나 새로운 소설 영역을 확보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과 6.25라는 민족사적 격변 및 만주 → 북한→ 남한이라는 배경의 이동은 원체험 공간으로서의 만주를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게 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제삼인간형>(1953), 장편 <가장행렬>(1956), <유화과>(!956), <제2의 청춘>(1957)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이 작가의 문학적 원점이라고도 할 북간도를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이는 <북간도>가 만주의 조선인 개척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북간도>(1959-1967)는 작가의 체험과 사실적 묘사를 기저로 한 리얼리즘소설이다. 이한복 일가의 4대에 걸친 가족사를 통해 민족의 수난과 항일 투쟁사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 5부작은 민족문학의 큰 수확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후 민족주의적 장편소설 <창을 남으로>, <통>(1968-1969), <성천강>(1971-1974) 등을 계속 발표하였다.
[출처]에세이 코리아 |